농구선수 이승준이 최근 은퇴를 결정한 것으로 알려져서 팬들의 아쉬움을 사고 있다.

1978년생인 이승준은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를 둔 혼혈 출신으로 역시 농구선수로 활동 중인 동생 이동준과 '형제 선수'로 이름을 알렸다. 또한 이승준은 문태종-문태영-이동준-전태풍-김민수 등과 함께 2000년대 후반 이후 한국농구를 이끌었던 귀화 혼혈선수 세대의 돌풍을 주도했던 선수로 꼽힌다.

미국에서 성장하며 시애틀 퍼시픽 대학을 졸업한 이승준은 NBA 새크라멘토 킹스와 LA 레이커스의 서머리그에 참여하기도 했고, 미국 ABA와 브라질-포르투갈 등 다양한 해외리그를 경험하며 선수생활을 이어왔다. KBL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미국명 에릭 산드린으로 활동하던 2007년 울산 모비스에 당시에는 교체 외국인 선수 신분으로 발탁되면서부터였다. 2009년에는 귀화 혼혈선수 드래프트를 통하여 삼성에 지명받으며 한국 선수로 인정받았고, 귀화 시험을 거쳐 정식 한국 국적도 취득했다.

이승준은 정식 귀화 이전 외국인 선수로 뛰던 모비스 시절에는 07/08시즌 24경기 평균 11.8점 6.6리바운드 1.3블록 1.4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귀화 이후인 2009/10시즌부터 2015/16시즌까지는 삼성-동부-SK를 거치며 7년간 총 254경기에 출전하여 경기당 13.9득점 7.2리바운드 2.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통산 누적 기록은 3525득점 1841리바운드 534어시스트다.

특히 이승준은 귀화 혼혈선수 출신 중에서도 단연 수려한 외모와 탁월한 운동능력으로 화제를 모았다. 204cm 107kg의 탄탄한 신체조건에 폭발적인 탄력을 바탕으로 한 덩크슛과, 3점까지도 가능한 넓은 슛범위까지 두루 갖춰 국내에서는 지금도 보기 드문 유형의 선수이자 KBL의 하이라이트 필름 제조기로 불리기도 했다. 이승준이 국내무대에서 정식으로 데뷔하기 전부터 해외무대에서의 활약하던 동영상이 누리꾼들 사이에서 퍼지며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애증으로 점철된 국내 프로무대 활동

 SK에게 강했던 이승준

은퇴를 선택한 농구선수 이승준. 과거 삼성에서 뛰던 시절의 모습. ⓒ KBL


하지만 이승준의 국내 프로무대 경력은 '애증'으로 점철된다. 뛰어난 운동능력과 스타성을 바탕으로 KBL을 평정할 역대급 선수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지만 정작 뚜껑을 열고나자 이승준의 커리어는 그에 미치지 못했다.

'역대 최고의 신체조건'과 '역대 최악의 BQ(농구지능)'를 겸비했다는 상반된 평가는 이승준의 KBL 경력을 가장 함축적으로 요약한다. 이승준은 공격적인 면에서는 분명히 재능이 많았지만 수비력이나 상황 판단력, 전술 이해도에서 낮은 평가를 받았다.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한 블록슛 능력은 나쁘지 않았지만, 상대 선수의 돌파나 훼이크에 대처하는 가로수비능력이 취약했고 약속된 수비전술 패턴에 대한 응용력이 떨어져서 팀 수비의 구멍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승준은 KBL에 진출하기 전까지만 해도 포워드로 활약했다. 짜여진 패턴 위주의 경기보다는 개인 능력을 바탕으로 화려한 공격농구와 외곽 위주의 플레이를 즐기던 선수였다. 그런데 주로 빅맨과 수비 위주의 안정된 플레이를 선호하는 KBL의 스타일과는 잘 맞지 않았다는 평가다. 이승준과 모비스-국가대표팀에서 인연을 맺었던 유재학 감독은 "전술적으로 잘 컨트롤하면 수비와 리바운드에 큰 이점을 안겨줄 수 있지만, 그냥 내버려두면 20점을 넣고 상대에 40점을 내줄 수도 있는 선수"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이승준을 보유했던 팀들의 성적이 하나같이 좋지 못했던 것은 그의 장단점과 무관하지 않다. 이승준이 한국무대에서 올린 최고 성적은 삼성 시절 첫 두 시즌 연속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것이 전부다. 그런데 삼성은 이승준이 입단하기 직전까지 2년 연속 결승에 진출했던 팀이었다.

오히려 삼성에서 마지막 시즌을 비롯하여 동부, 모비스, SK 등은 하필 이승준을 영입한 이후 줄줄이 플레이오프 무대에 탈락하거나 팀 역사상 최악의 성적을 경신하는 수모를 당했다. 물론 김상준이나 강동희, 이충희처럼 KBL 역사상 손꼽히는 무능한 감독들을 만난 불운도 있었고, 팀 성적 부진의 책임을 이승준에게만 돌릴 수 없는 경우도 많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승준 역시 기대에 못미쳤다는 점이다.

이승준을 팀의 중심에 세워 전력을 끌어올리려는 시도는 사실상 100% 실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승준 본인의 자기관리나 태도도 딱히 훌륭했다고는 볼 수 없다. 초기였던 모비스 시절에는 소위 철심 파문으로 부상을 숨기고 입단했다는 의혹에 휩싸인 적도 있고, 삼성 시절에는 팀의 주축이던 테렌스 레더와 안준호 감독과의 불화설로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동부 시절에는 비시즌에 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푸에르토리코 리그에서 뛰며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않았다가 다음 시즌 치명적인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하며 전열에서 이탈하는 등 가는 팀마다 크고작은 구설수도 많았다. 이로 인하여 동부나 SK 팬들에게는 지금도 이승준의 이미지가 그리 좋지 않다.

국제무대에서 펄펄 날았던 이승준

하지만 이승준의 농구인생을 그저그런 먹튀나 거품형 선수로만 재단할 수 없는 것은 그가 태극마크를 달고 보여준 놀라운 활약 때문이다. 이승준은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2012 런던올림픽 최종예선, 2013 필리핀 아시아선수권 등에서 세 번이나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맹활약했다. 특이하게도 KBL에서 장단점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모습과 달리, 대표팀에서는 뽑힐 때마다 항상 에이스에 가까운 활약을 펼치며 '국제용' 선수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는 KBL과 국제무대의 스타일 차이와 관련이 있다. 국제무대서는 이승준의 장단점이 상대팀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데다, 장신에 힘과 기동력, 3점슛까지 두루 겸비한 이승준만큼 국제무대에서 빅맨과 득점원으로서의 옵션을 두루 갖춘 선수가 대표팀에 없었다. 고질적인 빅맨 부족에 시름하던 한국농구에게도 귀화 혼혈선수 중 단연 최고의 빅맨이었던 이승준의 가치는 매우 중요했다. 김종규나 이종현이 있지만 대표팀에서 이승준이 보여준 임팩트에는 크게 미치지 못한다.

이승준은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은메달, 2013 아시아선수권 3위로 한국에 16년 만의 농구월드컵 출전권을 안기는데 기여했다. 이승준이 국가대표로서 최고의 성적을 올린 대회는 모두 그의 장단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유재학 감독과 함께 했던 시기였다. 또다른 귀화 혼혈선수 문태종이 2014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주목받기 전까지만 해도 귀화 혼혈 출신 국가대표의 최고 성공사례는 단연 이승준이었다.

무엇보다 이승준 본인도 국가대표팀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이 남달랐다. KBL에서는 종종 기복 있고 느슨한 플레이로 질타를 받기도 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대표팀에서는 그야말로 몸을 날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팀이 요구하는 플레이를 성실하게 수행하며 극찬을 받았다. 팬들조차 이승준의 소속팀은 KBL 구단이 아니라 '팀 코리아'로 해야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큼 '국대 이승준'은 프로무대와 전혀 다른 선수였다. 이러한 대표팀에 대한 열정과 헌신 덕분에 지금도 많은 팬들이 이승준에 대하여 좋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영원히 늙지않을 것 같던 이승준도 부상과 세월의 흐름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동부에서 2013/14시즌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한 이승준은 이듬해까지 단 한 경기도 나서지 못했다. 15/16시즌에는 SK로 이적하며 친동생 이동준과 선수생활 말년 한 팀에서 뛰게되는 기쁨도 누렸지만 기량은 이미 완연한 하락세였다. 이미 나이도 30대 후반으로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가 된 데다, 부상은 그의 최대 장점이던 운동능력을 빼앗아가 버렸다.

이승준은 아쉽게도 KBL 데뷔 당시에 기대했던 재능을 다 보여주지 못한 채 선수경력을 마감하게 됐지만, 그가 한국농구에서 보낸 약 10년의 시간동안 많은 팬들을 웃고울린 그의 활약상은 KBL 역사의 한 페이지로 오랜 시간 남을 것이다. 은퇴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결혼과 가정을 꾸리며 또 다른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에 선 이승준이 어떤 모습으로 팬들 앞에서 다시 돌아오게 될지 기대된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농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