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골레지(1710~1736)

페르골레지(1710~1736) ⓒ 참여사회


페르골레지 '슬픔의 성모'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어머니 마리아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사랑을 설파하는 아들 예수가 늘 염려스러웠다. 하지만 아들이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믿었다. 아들은 기득권 세력과 충돌했고, 민중에게 버림받아 결국 십자가로 끌려나왔다. 어머니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십자가에 매달린 아들을 보며 울부짖을 수도 없었다. 극한의 슬픔, 현실에서 체념할 수밖에 없지만 영원 속에 새겨져 빛나는 모성, 바로 성모 마리아의 마음이다.

"탄식하는 어머니의 마음, 날카로운 칼이 뚫고 지나갔네.
존귀한 어머니 애통해 하실 때 함께 울지 않을 사람 누구 있으리?
이토록 깊은 어머니의 고통에 함께 통곡하지 않을 사람 누구 있으리?
사랑의 원천이신 성모여, 내 영혼을 어루만져 당신과 함께 슬퍼하게 하소서."

'슬픔의 성모'의 라틴어 제목은 '스타바트 마터(Stabat Mater)'로 '어머니는 서 계시고'라는 뜻이다.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모습을 보며 비탄에 잠긴 채 서있는 성모 마리아를 노래한 성가곡이다. 13세기 이탈리아 시인 야코포네 다 토디가 가사를 썼고 여러 작곡가가 음악을 붙였다. 특히 지오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지(1710 ~1736)의 작품이 가슴 저미도록 아름답다. '내 육신이 죽을 때(Quando Corpus Morietur)'에 이어서, 끝 부분의 '아멘'이 듣는 이의 눈물을 조용히 닦아준다.

영화 <아마데우스>에 삽입된 곡 중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작품이 아닌 것은 페르골레지의 '스타바트 마터'뿐이다. 35살에 세상을 떠난 모차르트보다 더 꽃다운 나이에 죽은 천재에 대한 오마주였을까? 영화에서 살리에리 아버지의 장례식 장면에 나오는데, 18세기 성당의 장례미사 때 널리 연주됐다고 한다.

페르골레지 '슬픔의 성모' 중 '내 육신이 죽을 때' 이 음악을 듣고 싶다면?



페르골레지는 26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천재 작곡가다. 그는 어려서부터 한쪽 다리를 절었지만 10대 때 천재로 이름을 날렸고, 바이올린 즉흥 연주 솜씨가 사람들을 경탄하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사랑에 빠진 수도승> <콧대 높은 죄수> <마님이 된 하녀> 등의 오페라가 성공해 '오페라 부파'의 선구자로 역사에 기록됐고, 바이올린 소나타와 협주곡 등 기악곡, 오라토리오와 칸타타 등 종교음악도 많이 남겼다.

페르골레지는 한때 귀부인 마리아 스파넬리와 열렬한 사랑을 나누는 등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폐결핵이 점점 악화되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나폴리 근교 포추올리의 수도원에 들어갔다. 적막한 수도원에서 죽음을 예감하며 써 내려간 곡이 바로 '슬픔의 성모'다. '슬픔의 성모'는 젊은 나이에 외롭게 세상을 떠난 천재의 마지막 작품이다. 이 곡을 쓸 때 페르골레지는 예수의 죽음 앞에서 말을 잊은 성모 마리아를 떠올리며, 젊은 아들을 먼저 보내는 자신의 어머니를 애타게 그리워했을 것만 같다.

고레츠키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

인류 역사에서 젊은 넋들의 죽음은 왜 끊이지 않을까. 동서고금, 어머니의 눈물은 왜 마르지 않을까. 폴란드의 작곡가 헨릭 고레츠키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 1977년 초연되어 현대음악으로는 드물게 100만 장 넘게 음반이 팔렸다. 그만큼 슬픔이 이 지구별을 뒤덮고 있기 때문일까.

이 교향곡에는 탄식 같은 소프라노의 노래가 들어 있다. 1악장은 중세 수도원에서 전승된 '슬픔의 성모'다. 잃어버린 아들의 고통을 나누고 싶다고, 목소리라도 들려달라고 애원하는 어머니는 아들이 세상을 떠났음을 인정할 수 없다. 3악장은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으로 아들을 잃은 폴란드 어머니들의 아픔을 노래한다. 내 사랑하는 아들은 어디로 갔는가? 아들을 빼앗아 간 자들을 원망하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는다. 늙은 어미의 눈에서 흐른 눈물이 강을 이루어도, 아들을 살릴 수는 없다. 차디찬 무덤 속에 누워 있는 아들을 찾을 길 없어 어머니는 갈 곳을 잃었다.

고레츠키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 중 2악장 이 음악을 듣고 싶다면?



대답 없는 세월호의 4월이 가고, 광주의 젊은 영령들이 부활하는 5월이다. 슬픔은 왜 이렇게 되풀이되는 걸까. 고레츠키의 '슬픔의 노래' 2악장은 나치 수용소에서 죽어간 한 소녀가 수용소 벽에 써 놓은 말을 가사로 사용했다.

"엄마, 울지 마세요. 비록 제가 먼저 떠나지만 고결하신 성처녀 마리아가 저를 지켜주고 있어요."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이채훈님은 MBC 해직 PD입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클래식 음악 다큐멘터리를 연출했습니다. 2012년 해직된 뒤 ‘진실의 힘 음악 여행’ 등 음악 강연으로 이 시대 마음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가 사랑하는 모차르트>, <우리들의 현대 침묵사>(공저) 등이 있습니다.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클래식 음악감상 페르골레지 고레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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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가 1995년부터 발행한 시민사회 정론지입니다. 올바른 시민사회 여론 형성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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