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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나라는 없다' 한국교육방송공사 EBS의 대표적인 장수 어린이프로그램인 〈딩동댕 유치원〉을 연출하는 이지현 PD가 준비하고 있는 기획의 가제이다. 이 PD는 2022년 5월 딩동댕 유치원에 신체장애가 있어 휠체어를 탄 '하늘이', 다문화 가정 아동 '마리', 태권도를 좋아하는 여성 아이 '하리', 책을 좋아하는 문학소년이자 조손가정 아동 '조아', 유기견이었던 '댕구' 등 소수자 정체성이나 사회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어린이 캐릭터를 선보였고, 지난해 8월부턴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별이'도 등장시켰다.

각계에서 주목하기 시작했다. 2022년 양성평등미디어상을 비롯해 지난해 미디어 다양성 어워즈 대상,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상, 한국장애인인권상, 언론인권상 특별상 등을 받았다. 이 PD는 다시 새로운 도전을 했다. 올해 2월, 40여 년 딩동댕 유치원 사상 처음으로 성교육 특집을 방송했다.

33개월 아이가 응급실 여러 곳을 돌다 사망한 사건으로 상징되는 열악한 어린이 의료환경, 유아에게도 찾아온 우울증과 자살률의 증가 등은 어린이들에게 그 자체로 디스토피아다. 초등학생과 유치원생 자녀를 키우는 이 PD에게 '어린이를 위한 나라는 없다'는 피할 수 없는 주제일지도 모른다. 세월호 참사 10주기인 4월 16일 오전 경기도 일산 EBS 사옥에서 이 PD를 만났다.

"자녀 성교육, 나부터도 어떻게 하는지 몰랐다"
 
이지현 EBS PD
 이지현 EBS PD
ⓒ 박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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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5월 개편 후 2년이 흘렀다.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힘들었던 순간은 없었나?

"(휠체어를 타는) 하늘이의 경우 인지장애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본을 쓸 때는 이해 가능한 범위에서 작업할 수 있었다. 물론 이동권을 공부하고, 경사로를 고려하는 등 세트 제작에 신경 썼다. 하지만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별이는 대본을 쓸 때 작가들도 힘이 들었고, 인형 연기자들도 공부를 많이 해야 해서 설득하는 데 오래 걸렸다. 월화수목금 매일 방송하기 때문에 한 편을 위해 길게 자문받고 연구할 시간이 없다. 별이가 한번 나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유치원의 일원으로 나오기 때문에 데일리 프로그램으로서 감당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됐다. 그 고민은 현재 진행형이다."

- 연출자로서 경험과 평가도 궁금하다.

"별이가 나오고 6개월 이상 지났다. 그동안 자문을 받으면서 "이런 대사는 써도 되냐"고 많이 물었다. 예를 들어 풍선이 있는데 어떻게 반응할지 물으면 "좋아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답을 받는다. 취향은 발달장애가 있다고 해서 특별히 다를 게 없다. 나도 제작을 하면서 편견을 깨야 했다. 은연중에 자폐가 있는 아이들을 한 덩어리로 대했던 것 같다. 별이라는 아이가 뭘 좋아하는지 개인의 취향이 있을 뿐 '자폐'라는 틀로 규정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자문도 받고, 공부도 하면서 제작진도 별이라는 아이와 친해지고 있다."

- 딩동댕 유치원 성교육 특집을 기획하게 된 계기는?

"자녀를 키우며 성교육을 해야 하는데 나부터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한국 사회에서 순결교육은 받았지만 성교육 관련 지식이 없더라. 내가 공부하면서 이걸 방송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생식기 명칭이라든지 유아 자위, 생명의 탄생 등의 주제를 어디까지 다뤄야 하는지, 특히 방송이니까 어디까지 보여줘야 하는지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다."

- 성교육 방송 사실이 알려지면서 선정적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과거 <까칠남녀>(2017~18)가 비판을 많이 받아서 EBS 내부에도 우려가 나왔다. 사실 스무 편 정도는 방송하고 싶었다. 전문가 자문을 받으면서 여러 저항이 있을 만한 아이템을 일단 배제했고 안전한(?) 부분 먼저 해보자고 해서 두 편을 방송했다. 그 부분은 아쉽다."

- 어린이 대상 성교육 프로그램이 부족한 건 사실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아이들이 인터넷으로 많은 정보를 얻는다. 인터넷에서 얻게 할 것인지, 전문가들이 체계적으로 커리큘럼을 짜서 정확하게 전달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성교육의 출발은 '권리 교육'이다. 그동안 한국에서 성교육은 생물학적 차원에서 접근했다면, 이제부터라도 자신과 타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존중과 동의', '성평등' 개념까지 포함하는 권리 교육으로 확장하고 전환해야 한다. 이건 스웨덴, 핀란드, 미국 등 많은 성교육 선진국에서 각자 나라에 맞게 제도화해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신체뿐 아니라 정서적 성교육도 함께 한다. 자존감, 바디 이미지, 그루밍 성범죄, 피임, 포르노 등에 관한 지식 교육을 적절한 시기에 배워야 한다."

"기존 어린이 프로그램 방식에 문제가 있다"

- 지금은 어떤 기획을 준비하고 있나?

"'어린이를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가제로 두세 편 정도 준비하고 있다. 저출생이 문제라고 하는데 태어날 아이들 말고, 태어난 아이들에게는 무엇을 해주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한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소아청소년과가 부족한 문제 등 디스토피아가 떠오른다.

보통 드라마 형식으로 방송을 만드는데 '어린이를 위한 나라는 없다'는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어린이들을 취재해서 만들어보려고 한다. 만약 소아청소년과 문제를 예로 들면 어린이들은 이 사안을 어떻게 인지하고 느끼는지 궁금하다.

1부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사회적 인프라 이야기를 하고 싶다. 공중화장실 세면대가 너무 높아 아이들이 손을 씻기에 불편하다거나 엘리베이터에 설치된 손 소독제가 어린이 눈높이에 설치돼 있어 눈에 튀는 사고도 자주 발생한다. 2부에서는 어린이들이 원하는 정치 공약과 이유 등을 다루려고 한다. 이런 다큐멘터리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딩동댕 유치원 시청자인 어린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맞게 이 어려운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게 현재 고민이다."

- 어린이를 정치적 주체로 다루는 내용이 기대가 된다.

"기존 어린이 프로그램 방식에 문제가 있다. 기후위기를 예로 들면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서 북극곰이 죽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일회용품 쓰지 말아야 돼'라는 스토리로 쉽게 만든다. 기후위기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아이들이 아니지 않나.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의 화법이다. 물론 아이들이라도 실천을 잘 해주면 좋고 아예 필요가 없는 교육은 아니지만, 더 중요한 건 아이들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주체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그레타 툰베리 같은 사람들이다. 한국의 아이들은 하라는 대로 하는 모범생으로 살고 있다. 한국에서 툰베리 같은 사례를 찾아보려고 했는데 찾기 어려웠다. 어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게 어린이의 권리라는 말을 하고 싶다."

- 어린이를 바라보는 관점이 기존 프로그램과 달라 신선하다.

"저출생 문제를 다루는 프로그램을 만들 때 모 정부 부처에서 협찬을 받은 적이 있다. 해당 부처에서 다문화 가정에서 자란 '마리'가 부모에게 '동생을 낳아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을 넣으면 어떻겠냐고 해서 그건 못한다고 했다. 방송했으면 엄마들이 항의했을 것 같다. 동생을 책임져줄 수 있는 환경이 아닌데 낳아달라고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대한민국이 사라지는 이야기를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인구가 소멸되고 마지막 남은 한 명의 한국인이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는 거다. 그 한 명이 올림픽도 나가고 인공지능(AI)과 살면서 식물도 키우고 농사도 짓는 이야기를 그리는 식이다. 제도적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아이들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는 방식으로,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다뤄야 한다."

- 딩동댕 유치원에 나오는 선생님인 '딩동샘'을 보면 흔히 생각하는 선생님의 역할과 다르게 가르치거나 통제하지 않는다.

"개편 초기에 딩동샘의 역할 설정을 명확히 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게 꼭 정답은 아니니 스스로 잘못됐다고 판단하면 다시 이야기해보라고 한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다른 길로 가보고 이 길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깨지고, 자빠지고 돌아오면서 자랐다. 모범생으로 자라온 남편은 나에게 "그래서 지금 원하는 일을 알고 재미와 보람을 느끼고 사는 게 부럽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우당탕탕 다 경험해보게 하고 어땠는지 물어볼 수 있는 선생님이었으면 좋겠다."
 
이지현 EBS PD
 이지현 E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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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원칙이 있다면 소개해달라.

"현실적 캐릭터로 비현실적일 수 있는 이상을 지향한다. 다만 그 캐릭터들이 핸디캡이 있더라도 불쌍한 희생자로, 시혜적 위로의 대상으로 그리지 않으려 한다. 미화하지도 않아야 한다. 팩트에 기반한 이상적 모습이 무엇일지 고민한다. 사실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프로그램을 만든 게 아니다. 장애, 다문화 등에 대해 잘 모르면 그들을 하나의 덩어리로 정의하면서 개인의 차이를 보지 못한다. 그냥 어린이 개개인을 들여다보는 거다. 철수, 영희, 별이, 하늘이. 그러면 엄청나게 많은 스펙트럼이 발견된다. <어린이라는 세계>라는 책이 있듯이 그 한 명 한 명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각자의 서사와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결과적으로 다양성을 추구하게 된다."

- EBS 재정상황이 어렵다. EBS는 수신료 2500원 중 70원만 받아왔는데 최근 수신료 분리징수를 하면서 더 어려울 것 같다. 실적 고민이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

"EBS 상황이 안 좋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1주일에 5편을 풀로 제작하지 못한다. 지난해 가을부터 1주에 3편만 풀로 제작하고 2편은 재가공하는 형태로 방송하고 있다. PD도 5명에서 3명으로 줄었다. 그럼에도 EBS는 공영방송이다. EBS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딩동댕 유치원과 같이 상업성이 없는 프로그램은 지속하지 못했을 거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알고 이해하면 함께 할 수 있다. 지난 3월부터 8월까지 방송하는 딩동댕 유치원 화요일 프로그램 '마음보석 시리즈'는 사과, 용서, 존중, 감사, 회복탄력성, 정의, 친절, 용기, 가짜뉴스, 절약, 나눔 등의 내용을 다룬다. 생존을 위해 경쟁해야 한다고 믿지만 최근 연대해야 잘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어린이들의 선한 본성을 깨우고 마음을 들여다보는 내용이다. 그래서 연대하고 환대할 수 있는 아이들로 클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장애인·다문화 가정 등 다양한 사람에 대해 우리가 계속 환대할 준비가 된다면 미래에는 더 연대할 수 있지 않겠나. 이상적인 이야기 같지만 맞는 이야기라고 확신한다."

덧붙이는 글 | 글 장슬기 미디어오늘 기자, 사진 박상환. 이 글은 참여연대 소식지 〈월간참여사회〉 2024년 5월호에 실립니다. 참여연대 회원가입 02-723-4251


태그:#EBS, #딩동댕유치원, #어린이날, #어린이,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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