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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시아리에서 인도 네팔 국경 북인도 다르줄라 가는 길. 시골 버스나 다름없는 택시가 짐을 싣고 느릿느릿 다리를 건너고 있는 나귀를 기다리고 있다.
 문시아리에서 인도 네팔 국경 북인도 다르줄라 가는 길. 시골 버스나 다름없는 택시가 짐을 싣고 느릿느릿 다리를 건너고 있는 나귀를 기다리고 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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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5시 30분. 문시아리에서 인도와 네팔 국경인 다르출라(Dharchula)로 향하는 택시, 지프차가 출발했다. 인도에서의 택시는 한국에서의 택시 개념과 다르다. 시골 버스와 다름없다. 중간 중간 손님들을 태우고 먼지 풀풀 날리는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달린다.

문시아리를 벗어나자 히말라야 설산, 시바산 옆구리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이 고리강을 따라 얼마쯤 달리자 다리가 나왔다. 지프차가 잠시 멈춰 한숨을 돌린다. 등짝에 짐을 매단 나귀들이 느릿느릿 비좁은 다리를 다 건널 때까지 기다린다.

중간에 내리고 타고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지프차가 만원이 되었다. 운전석 옆자리에는 두 명이 앉았고 세 명이 앉을 수 있는 가운데 좌석에 나를 포함해 네 명이 밀착자세로 앉았다. 짐 칸 역시 가득 차 있다.

중간좌석에 앉아 있는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한쪽 어깨를 포갠 자세로 앉아 두 손을 무릎 사이에 끼워 넣고 있다. 덜컹거리는 차내에서 손으로 중심 잡을 곳이 없기 때문에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최대한의 자세다. 마치 수갑을 차고 감옥으로 이송되는 죄수처럼 꼼짝없이 앉아 있다.

세 명 앉는 비좁은 자리에 네 명이 죄수처럼 앉아...

세 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에 네 명이 밀착해서 앉아 죄수처럼 가야 했다.
 세 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에 네 명이 밀착해서 앉아 죄수처럼 가야 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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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릎 통증을 잊고 이런 자세가 너무 재미있어 사진기를 꺼내 몸을 최대한 뒤로 재껴 사진을 찍었다. 옆 사람들이 일제히 쳐다본다. 이런 모습이 우습지 않는냐는 표정으로 낄낄거리며 말했다.

"나는 행복한 죄수입니다."

내 말 뜻을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다들 따라 웃는다. 비좁은 지프차 안이 '해피'해졌다. 거기다가 인도 특유의 경쾌한 음악이 문시아리에서 출발할 때부터 끊임없이 해피하게 흘러나온다. 시트 비닐 포장조차 벗기지 않은 신형 지프차이다보니 음향 상태가 좋다. 운전기사는 다양한 음악을 제공한다. "해피! 해피!"로 시작하는 노래가 반복해서 흘러나오고 있다.

우리는 그 "해피 해피" 음악에 몸을 떠맡긴다. 두 손을 무릎사이에 끼워놓고 지프차가 흔들리는 대로 몸을 떠맡긴다. 비포장도로에 흔들리는 지프차와 음악 소리가 하나가 되어 몸이 흔들린다. 흔들흔들 목을 까닥까닥 흔들어 대는 인형처럼 몸을 흔들리는 지프차에 맡긴다. 마음조차 음악에 맡긴다. 감정 실린 노래 소리에 따라 목적 없는 나의 여행길처럼 신나면 신나는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떠맡긴다.

차장 너머의 풍경조차 평화롭다. 밭에서 소 쟁기질을 하면서 핸드폰으로 통화하는 사람이 보이고 논두렁에 우두커니 서서 신작로를 달리는 지프차를 바라보고 있는 꼬마 녀석이 보인다. 저 아이의 모습은 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를 달리는 버스를 바라보며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나는 흙먼지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버스, 신작로 끝 어딘가에 있을 너른 세계로 하염없이 떠나고 싶었다.

학교에 가는 것이 싫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첫날부터 학교 주변을 설명하는 선생으로부터 호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오줌이 마려워 꼼지락 거리는 내게 선생이 움직이지 말고 자세를 바르게 하라 경고장을 날렸던 것이다. 해질녘까지 산과 들을 산토끼처럼 뛰어 다니던 녀석이 입학첫날부터 부동자세로 배워야 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의 제제처럼 혼자서 하늘과 나무와 땅과 대화하는 버릇이 생겼다. 억압적인 학교에서 벗어나 일요일이 되면 홀로 갱변(어린 시절 냇가를 갱변으로 불렀다.)에 나가 해질녘까지 고기를 잡아가며 백사장에서 놀았다. 용돈이 모아지면 혼자서 영화를 보러 다니고 종착에서 종점까지 버스를 타는 것을 즐겼다.

갱변 모래사장에 누워 노래를 부르는 어린 내가 보인다. 어느 여가수의 "선 데이 먼 데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렇게 나는 학교에 가기 싫어 일요일을 기다리는 인생이 되었다. 선생들에게 억압당하는 학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나를 만끽하고 싶었다.

하루라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먼지 풀풀 날리는 버스를 타고 냇물을 따라 너른 강으로 나서고 싶었다. 그 너른 강 끝에 있다는 바다로 나가고 싶었다. 너른 바다로 나서면 무엇인가 갈증을 채워줄 자유로운 세상이 열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너른 바다로 나서고 있는 나는 더 심한 갈증을 앓고 있다.

논두렁에 우두커니 서 있는 아이가 멀어지고 있다. 내 오래전의 과거처럼 먼지 속에 사라지고 있다. 아이와 멀어지고 있는 지프차 안에서 나는 지금 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자유로운 세계를 향해 떠나고 있는 것일까 라는 물음 앞에서 여전히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외줄 타고 강을 건너는 여성을 기다리는 택시 운전기사
 외줄 타고 강을 건너는 여성을 기다리는 택시 운전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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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프차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이 뒤바뀐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그 힘겨운 지프차 안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스스럼없이 주고받으며 미소를 나눈다. 더 이상 앉을 자리가 없으면 차장은 차량 뒤편에 매달려오기도 한다.

지프차가 강가에 한참을 서 있다. 뭔 일인가 싶어 밖으로 나와 보니 한 인디언 여성이 외줄을 타고 강을 건너고 있다. "해피 해피"한 인도 노래처럼 웃음이 많은 운전기사가 그 여성이 강을 다 건널 때까지 무한정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강을 건너는 모습을 사진을 담고 돌아서자 운전기사가 핸드폰을 들고 나와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한다. 차장도 따라 나선다.

지프차는 강을 건너온 인디언 여성을 태우고 한 시간쯤 더 달렸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공무원이라는 젊은 인도 친구가 내가 말한다.

"다르줄라 가려면 여기서 내려야 합니다."
"이 차가 다르줄라 까지 가지 않나요?"
"여기서 다른 지프차로 갈아타야 합니다."

문시아리에서 지프차로 4시간 거리에 있는 조르지비라는 곳에서 내리자 다들 내게 아쉬운 손짓을 보낸다. 문시아리에서부터 동행해온 공무원과 운전기사와 차장 모두가 내게 고맙게 손을 흔들어 준다. 조르지비에서 다르줄라로 가려면 지프차로 갈아타야 한다. 그 길목에 작은 검문소가 있었고 거기에 어리숙하게 생긴 경찰 둘이 서 있었다.

"다르줄라로 가려 하는데 여권을 제시해야 합니까?"
"노 프라브럼!"
"네팔 국경을 넘어가려 합니다. 다르줄라에 보더 오피스(국경 사무소)가 있습니까?"
"비자가 필요 없습니다. 그냥 가면 됩니다."

다르줄라에서 네팔로 가는데 비자가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인도에 6개월 여행비자로 왔다. 여행비자로 인도에서의 체류기간은 90일에 한정되어 있다. 네팔 비자를 발급받아 네팔에서 한 달 쯤 머물다가 다시 인도로 되돌아오면 90일을 더 머물 수 있다.

따라서 내게는 네팔 국경을 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인도 체류기간을 연장할 수 있는 국경 사무소가 있어야 했다. 문시아리에서 다르줄라로 출발하기 전날 밤 인도주재 한국대사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다르줄라 국경요? 모르겠네요."

전화를 받은 여성 담당자는 네팔로 들어가는 루트가 꼴까타의 다르질링, 고락푸르의 소나울리가 전부라고 했다. 그 두 곳은 인도 여행자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알고 있다.

"그 두 곳은 나도 알고 있습니다. 또 다른 네팔 국경은 없습니까?"
"그 두 곳이 전부라고 알고 있습니다. 네팔 비자가 있습니까?"
"이제 네팔로 들어가려 하고 있으니 당연히 없지요. 저는 지금 다르줄라에서 네팔 비자를 발급 받을 수 있는 국경 사무소가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다르줄라는 잘 모르겠고요. 네팔로 들어가려면 다르질링이나 소나울리로 가야 할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다르질링과 소나울리에서만 비자 발급이 가능하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하여 나는 코사니에서 알게 된, 다르줄라에 네팔로 들어가는 국경이 있다는 정보에 따라 무작정 지프차를 잡아탔던 것이다.

"당신 아파 보이는데, 이걸 끓여먹으면 좋을 겁니다"

조르지비에서 다르줄라 국경 가는 험한 절벽 길
 조르지비에서 다르줄라 국경 가는 험한 절벽 길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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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지비에서 다르줄라 국경을 향하는 택시, 지프차를 쉽게 잡아탔다. 네팔과 인도의 국경을 가로지르고 있는 갈리강변 길을 따라 달리는 이 지프차 역시 마을버스나 다름없었다.

꼬사니와 문시아리가 산악도로라면 다르줄라 가는 길은 강변도로다. 아슬아슬하게 들어서 있는 강변도로 곳곳의 도로가 유실되어 있다. 그 밑은 까마득한 절벽이다. 앞차와 마주치면 아슬아슬 통과해야 한다.

가파른 절벽 길을 달리며 중간 중간 손님들이 내리고 타기를 반복하다가 갑자기 바퀴가 펑크났다. 다행히도 펑크 난 지점이 넓은 도로다. 승객들은 별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펑크 난 지프차를 바라보며 싱글싱글 웃기까지 한다.

몸집이 큰 지프차 기사는 바퀴를 갈아 낄 생각도 없이 담배를 꺼내 물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20여 분 해찰을 부리다가 전화를 받고 나서 승객들의 도움으로 차제를 받쳐 놓는 자키 대신 커다란 돌멩이를 펑크 난 바퀴 옆에 받쳐놓는다. 그리고는 차량 위에서 예비 바퀴를 내려 비지땀을 흘려가며 타이어를 갈아 끼운다.

승객들은 별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펑크 난 지프차를 바라보며 싱글싱글 웃고 있다.
 승객들은 별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펑크 난 지프차를 바라보며 싱글싱글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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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를 갈아 끼우기 위해 차제를 받쳐 놓는 자키 대신 커다란 돌멩이를 받쳐놓고 있다.
 바퀴를 갈아 끼우기 위해 차제를 받쳐 놓는 자키 대신 커다란 돌멩이를 받쳐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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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멩이로 자동차 한쪽 면을 아슬아슬하게 떠받쳐 놓은 상태로 바퀴를 갈아 끼우고 있음에도 그 바로 윗 좌석에서 젊은 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그 사이에 몇몇 사람들은 지프차를 등지고 걸어가거나 손전화기로 누군가를 불러내 오토바이를 타고 떠났다. 그 누구도 환불을 요구하거나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이 없다.

바퀴를 갈아 끼우고 나서 다시 운전대를 잡은 기사는 펑크 난 바퀴로 인해 소비한 시간을 만회하겠다는 듯 고불고불한 산길을 속도를 줄이지 않고 내달린다.

구글 지도로 본 다르줄라. 히말라야 산맥과 인접해 있는 다르줄라는 인도와 네팔, 중국의 티베트 자치주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구글 지도로 본 다르줄라. 히말라야 산맥과 인접해 있는 다르줄라는 인도와 네팔, 중국의 티베트 자치주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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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줄라는 요새처럼 높다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인도와 네팔 그리고 히말라야 산맥 너머 지금은 중국의 자치구로 되어 있는 옛 티베트와 인접해 있다. 하여 다르줄라 출입구 주변은 국경도시임을 실감케 하는 너른 연병장과 막사들이 줄지어 있는 군부대가 들어서 있다. 군부대를 지나 안으로 깊숙이 들어서면 여느 인도의 도시처럼 혼잡하다. 비좁은 골목과 낡은 건물들로 즐비하다.

혼잡한 도심 중심에 도착하자 기사는 내가 몇 차례 부탁했던 국경 사무소라는 곳에 내려준다. 기사가 말한 국경사무소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외국인 배낭객은 눈을 씻고 찾아 볼 수 없는 곳에서 이 사람 저 사람 현지인들에게 짧은 영어로 물었다.

"네팔 국경선을 넘어가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합니까?"
"모르겠습니다."

대부분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거나 국경사무소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했지만 서두를 일이 없다. 내게는 남아도는 게 시간이다. 칸칸이 나눠져 있는 사무실 앞에 앉아 있는데 네팔 사람으로 보이는 사내가 친절한 미소로 다가온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국경 사무소를 찾고 있습니다."
"저를 따라 오세요."

그는 사무소 건물(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이곳은 다르줄라 시민들의 민원 업무를 처리하는 시청과 같은 곳이었다.) 밖으로 나와 손짓하며 말한다.

"저 쪽으로 가면 우체국이 있을 것입니다."
"우체국이 아닌 국경 사무소 혹은 출입국 사무소를 찾고 있습니다."

그는 '보더 오피스'(Border Office)를 포스트 오피스(post Office)로 알아들었던 것이다. 나는 다시 출입국 사무소(lmmigration Office)라는 영어로 말했다.

"이곳에는 국경사무소나 출입국 사무소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국경 사무소에서 출국 신고를 해야 합니다."

네팔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인도 출입국 사무소에서 출국 신고서를 작성하고 여권에 출국 도장을 받아야 한다. 국경을 통과하면 네팔 출입국 사무소에서 다시 네팔 입국 신고서를 작성하고 입국 도장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먼 길을 달려와 땀 범벅이로 무거운 배낭까지 짊어지고 있어 다친 무릎에 통증이 몰려왔다. 일단 숙소를 잡아 놓고 한숨을 돌리기로 했다. 인상 좋은 네팔 사내가 가까운 곳에 숙소를 안내해 줬다. 하지만 숙소는 침침했다. 시설에 비해 방값도 만만치 않았고 시장 한복판에 자리한 게스트하우스라서 소란스러웠다.

혼잡한 다르줄라 거리. 네팔쪽 다르줄라 고산지대에서 채취한 동충하초가 인도 쪽 다르줄라 시장으로 흘러 나오고 있다고 한다.
 혼잡한 다르줄라 거리. 네팔쪽 다르줄라 고산지대에서 채취한 동충하초가 인도 쪽 다르줄라 시장으로 흘러 나오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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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하게 안내해 준 네팔 사내에게 미안하고 고마워 점심을 사겠다고 했더니 금방 먹었다며 '노 땡큐'로 정중하게 거절한다. 다시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그가 알려준 네팔 국경 쪽으로 무조건 걸었다. 국경 근처에 숙소를 잡기 위해 네팔 국경을 건너는 다리가 있다는 골목길을 힘겹게 걸어가는데 길거리에 좌판을 펼쳐놓고 있는 인도청년이 내 발길을 잡아끈다.

"헤이, 당신 많이 아파 보입니다."

그는 내 무릎의 압박 밴드와 눈 밑에 짙은 다크 서클을 지적하며 몸이 아주 좋지 않다며 좌판에 펼쳐 놓고 있는 약재를 소개한다. 절룩거리는 걸음걸이며 내 눈가를 통해 대충 병색을 파악할 수 있었겠지만 참 신통하기도 하다.

"예, 무릎을 심하게 다쳐 몸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이 '코리셉스'를 차로 끓여 먹으면 당신의 몸에 아주 좋을 것입니다."

그가 벌레를 빠삭 말려놓은 것 같은 연필 굵기 만한 약재를 들어 보인다. 나는 그의 말에 믿음이 가질 않았다. 관광 상품 따위를 호객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내가 권하는 약재를 구입하지 않을 것이기에 차마 사진기를 들이대지 못하고 그냥 물었다.

"코리셉스가 무엇을 뜻하는가요?"
"코리셉스 몰라요?"
"예. 그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거듭해서 '코리셉스가 당신의 아픈 몸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약재'라고 재차 권하는 그의 손길을 미안하다는 말로 뿌리쳤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그가 권했던 것은 동충하초였다. 나는 그가 영어로 말한 cordyceps(동충하초)라는 단어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곳 다르줄라는 네팔 쪽, 특히 다르줄라 고산지대에서 나오는 동충하초로 유명한 곳이었다.

여름에 균사가 곤충의 몸으로 들어가 그 영양분으로 겨울을 나고 이듬해 여름, 버섯으로 자라난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동충하초(冬蟲夏草). 진시황과 양귀비가 애용했다는 버섯으로도 알려진 동충하초는 항암효과, 면역력 강화, 피로회복, 기력회복, 혈압, 혈당 조절, 중추신경계통 작용 등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몸 상태가 형편없었던 내가 만약 인도 청년이 권한 약재가 동충하초였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한국에서는 고가라서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을 구입해 차로 끓여 먹었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은 눈앞에 보물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이 내게 해당되는 말이었다.

히말라야 설산에서 내려온 갈리강 줄기. 인도와 네팔의 국경선을 이루고 있다.
 히말라야 설산에서 내려온 갈리강 줄기. 인도와 네팔의 국경선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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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줄라 국경. 인도 네팔 사람들은 비자는 물론이고 여권도 필요 없이 이 다리를 통해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다.
 다르줄라 국경. 인도 네팔 사람들은 비자는 물론이고 여권도 필요 없이 이 다리를 통해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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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을 빠져 나오자 강줄기와 작은 다리가 보였다. 다리 앞에 자동소총을 꿩총처럼 걸쳐 멘 군인들이 보인다. 저 작은 다리를 건너면 네팔 땅이다. 다르줄라는 한반도의 강원도 고성이 남북한에 걸쳐 있듯이 인도와 네팔에 걸쳐 있다. 눈앞에 빤히 보이는 그 폭이 오십미터 정도에 불과한 다리 건너의 네팔 땅 역시 다르줄라로 불리우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의 남북한과 다른 점은 인도 네팔 사람들은 언제 어느때고 저 다리를 통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민족도 아니면서 인도와 네팔 사람들은 비자나 여권 따위도 없이 이웃집 마실가듯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다르줄라의 국경처럼, 한반도의 비무장 지대를 자유롭게 오고갈 수 있는 장벽 없는 국경으로 만들어 동물과 사람이 한데 어울릴 수 있는 세계적인 생태 평화공원으로 꾸미면 어떨까 싶은 부질없는 생각이 들었다.

초소 가까이 다가가 사진기를 들이대자 꿩총을 멘 군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여기는 사진 촬영 금지구역입니다."
"죄송합니다. 출입국 사무소가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는 비자나 여권이 필요 없습니다."

"출국 신고서나 출국 도장을 어디서 받아야 하나요?"
"당신은 네팔이나 인도 사람이 아닙니까?"
"예, 한국에서 왔습니다."

'나는 인도에서 5개월 이상을 머물 예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도에서 네팔로 가는 출국 도장을 받아야 한다'고 몇 차례 강조했지만 다르줄라에는 그런 곳이 없다고 한다. 그들은 이곳 국경에서 외국인을 처음 만난 사람들처럼 내게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려 하는가 등등의 질문을 던지며 호기심을 보인다. 그리고는 비자나 여권이 필요 없다는 말을 재차 강조하며 다리를 건너가라고 한다.

잠시 갈등이 생겼다. 이대로 네팔로 들어갈까. 며칠 정도 네팔에서 머물다가 다시 되돌아 나와 출입국 사무소가 있는 또 다른 국경으로 이동하면 될 것이었다. 그래 좋다, 무작정 가보는 거다 식으로 다리를 반쯤 건널 무렵 뒤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불렀다. 초소 안에 있던 여군이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왜요?"
"당신은 네팔로 갈 수 없습니다."

외국인은 이곳 다르줄라 국경에서 네팔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인도 출입국사무소를 통해 알아보던 도중에 외국인 출입금지 지역이라는 사실을 그들도 처음 알게 된 것이다. 그만큼 그동안 외국인이 다르줄라를 통해 네팔로 건너간 사례가 거의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네팔로 건너가는 다리에서 되돌아오면서 한반도의 비무장 지대 앞에서 되돌아서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무작정 인도 네팔의 국경 다르줄라에 온 것은 오고 갈 수 없는 땅,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 조국의 아픈 현실을 되돌아보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태그:#인도 택시, #다르줄라 가는 길, #국경 사무소, #인도네팔 국경, #한반도 국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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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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