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의 무대 위로 암전이 덮일 때, 나는 가짜에 기웃거린다. 나는 그 공간이 좋다.

연극의 무대 위로 암전이 덮일 때, 나는 가짜에 기웃거린다. 나는 그 공간이 좋다. ⓒ 김민아


불이 꺼진다. 갑자기 한기가 든다. 두 손으로 양어깨를 쓰다듬어 본다. 순간보다는 긴 잠깐의 시간이 멈춘 듯하다. 세상도 멈춘 듯하다. 난 이 순간이 이유 없이 두렵다. 그럴 때마다 무엇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모든 게 보이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을 배우들의 모습을 그려본다. 갑자기 어둠에 익숙한 그들이 부러워진다. 그들의 바쁜 손끝에 온 마음을 의지한다. 불이 켜져라, 불이 켜져라, 불이 켜져라. 불이 켜진다.

정지된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고 무대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다행이다. 세상이 진짜 멈춘 건 아니라서. 또 다른 시간과 공간의 배경 속에 모든 게 살아 숨쉬기 시작한다. 주인공의 기억 속의 한순간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허구와 리얼리티의 간극... 나는 그 틈이 좋다

 연극 <만추>

연극 <만추>가 끝난 무대 위, 텅 빈 무대 위에 모래만 떨어지고 있다. ⓒ 곽우신


연극의 순간들은 허구다. 아무리 몰입해서 울고 웃고 해봐야 몽땅 가짜다. 게다가 주인공에게조차 현실이 아닌 주인공의 기억 속의 그 순간은 가짜의 가짜다. 순도 100% 가짜다. 이 순도 100% 가짜가 불이 꺼졌다 켜지면 눈앞에서 손에 잡힐 듯 펼쳐지는 리얼리티로 변모하는 모순. 그 가짜와 리얼리티의 간극이 너무 크다. 하지만 그 틈이 크면 클수록 내가 빠져들 공간도 커진다.

나는 그 공간이 아주 좋다. 그 공간 속에서는 가짜에 기웃거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짜가 내 머리 위를 휙휙 날며 순식간에 진짜로 변모한다. 그리고 내 의식은 아무런 나쁜 짓을 하지 않아도 순간순간 과거라 이름 지어져 저 멀리 달아나는 내 소중한 그 어느 날이 말랑말랑 다시 내 손 위에 만져지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방법은 간단하다. 나 역시 무대 위에 암전을 만드는 거다.

그 순간 진행되는 연극의 장면 위로 암전을 덮으면 내 기억은 무대를 몰래 바꾸는 배우가 된다.

마치 잠이 오지 않는 밤 식구들이 깨지 않게 어둠 속에서 몰래 우유를 꺼내 마시던 그날처럼 고양이 걸음을 걷듯 살금살금 조심조심 잔뜩 긴장하고 집중해서 내 의식을 움직인다. 그러다 냉장고가 손에 잡히면 휴, 안도 하고 냉장고 문을 열듯 내 머릿속에 불을 켠다. 그러면 그토록 돌아가고 싶은 그 순간이 펼쳐진다.

무대는 술집이다. 나와 회사 언니 그리고 회사 동료와 그가 있다. 원래는 나와 그 언니 둘이서 한잔 하려고 만든 자리다. 그런데 그가 우리 둘이 어디론가 향하는 뒷모습을 본 모양이다. 전화를 걸어온다. 난 애써 반가운 목소리를 감추고 오려면 오라고 한다. (그리운 그 목소리가 들린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무대를 바라보는 내 눈엔 금세 눈물이 맺힌다.)그는 또 한 명의 남자 동료와 함께 있다가 둘이 같이 합류한다.

그가 웃으며 들어서자 내 심장은 두근거린다. (숱이 많은 머리, 그리고 그만큼 많던 새치, 하얀 피부, 적당한 키에 긴 속눈썹과 짙은 눈썹, 동그란 코 모양의 구두, 웃으니까 살짝 위로 찢어지는 듯한 눈, 그다. 내가 아는 그의 모습이다) 여자 친구가 있으면서도 나에게 호감을 보이는 그가 미웠던 터라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심장은 제멋대로 움직인다. 조금씩 분위기가 무르익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 내가 참 많이 웃는다. 그도 즐거워 보인다. 나로 인해 웃는 그가 그 순간엔 그가 밉지 않은 것 같다.

그와 나는 집이 같은 방향이다. 이 자리가 끝나면 나는 그와 함께 가게 될 것이다. 그는 속마음을 말할지도 모른다. 나에게 흔들리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기대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순간 그에게 전화가 울린다. 그의 여자친구이다. 그는 갑자기 미안하다며 지갑 속의 지폐를 몽땅 꺼내놓고 서둘러 나간다. 난 아무렇지 않은 듯 술을 마신다. 그 여자친구가 너무 밉다. 그렇게 달려나가는 그가 밉다. 잠시라도 그를 미워하지 않은 내가 한심하다.

그 장면은 그렇게 끝이 나지만 나는 또 한 번의 암전을 만든 후 다시 수정 장면을 올린다. 무대는 그 술집 밖 거리로 바뀌었다. 나는 그를 따라 나간다. "여기에 혹시 나를 보러 온 거야?"라고 묻는다. 그가 머뭇대며 "어"라고 말한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또 말한다. "그럼 가지 마! 가지 말라고!" 그는 당황한다. 그리곤 갑자기 표정을 바꾸며 "다시 그럼 오빠랑 뭐하게?"라며 장난 섞인 미소를 짓는다. 난 화가 난 얼굴로 "뭐야, 미쳤어 미쳤어 가버려!"라고 소리치고 돌아선다.

연극만으로는 부족한 시간, 나는 계속 암전을 만든다

 24일,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연극 <렛미인>이 끝나고 난 후 텅 빈 무대에 가로등 하나만 켜져 있다.

24일,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연극 <렛미인>이 끝나고 배우가 떠난 무대에 가로등 하나만 켜져 있다. ⓒ 곽우신


극이 펼쳐지는 순간 난 정말 그 인물이 되어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연극 속 가짜의 나는 이미 내 암전을 통해 진짜 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는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의 기억에 자리 잡을 수 있는 말을 한 것 같아 나는 진짜 나 자신이 기특해지고 속이 다 시원해짐을 느낀다.

잠시 후 무대는 원래의 극 장면들로 회귀하고 조금 전의 진짜가 가짜였음을 인지한다. 나는 속이 시원해진 만큼 정돈된 마음으로 처음보다 더 원래의 극에 더 집중한다. 내용을 놓친 부분이 있어 맥이 끊기는 부분이 있지만, 마음이 즐거우니 좋다. 그럴 때면 한참을 울고 난 것처럼, 꿈을 꾸다 깬 것처럼 나른하고 몽롱한 기분이 든다. 연극이 끝이 나도 쉽게 일어서지지 않는다.

연극이 끝나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참 상쾌하다. 마치 현실로 돌아오라며 주위를 환기하러 불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 바람에 눈물이 맺힌다. 친구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애쓴다. 나만의 연극을 보지 못한 친구에게 우는 난 이상해 보일 테니까. 이 순간들이 너무 허전하고 허무하다. 왜 지나간 순간을 잡을 수는 없는 걸까? 왜 지나간 순간은 기억 속에서만 살아있어야 할까? 연극이 끝나면 왜 난 돌아가고 싶은 순간들로 돌아갈 수 없을까?

연극만으로는 안 된다. 두세 시간의 짧은 시간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제 나는 연극 밖에서도 암전을 만든다. 난 자꾸만 눈을 감는다. 눈을 뜨면 그가 진짜로 눈앞에 있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 암전이 아프게 좋다. 바보 같은, 몽상가 같은 생각에 빠진 건 지금 어디에선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웃고 있을 마흔 살이 다 된 그와 어딘가에서 우연히 재회하고 미련하게 감춰둔 속마음을 말로 하게 되는 일보다 어쩌면 과거의 한순간에 실제인 듯 닿는 게 실현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거스르는 것 보다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는 게 더 힘든 일일지도 모르니. 그렇게라도 그를 만나야겠으니.

언젠가부터 암전을 만드는 순간이 많아진다. 그리고 너무 아프고 무겁지 않게 그를 만난다. 예전보다 조금은 더 자신 있는 여자가 되어 그를 당황하게 하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는 그에게 한없이 애교 많고 따뜻한 여자가 되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그가 장난처럼 내게 관심을 보이면, 나도 장난처럼 진심을 담아 관심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나에게 흔들린다고 고백하는 그의 말도 듣게 된다.

그리고 예전의 나와 지금 극 속에 만든 내가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 본다. 지금 내가 만든 나는 그때의 나보다 훨씬 더 사랑에 능동적이다. 그 사람의 말 한마디, 작은 손길 하나, 그리고 숨결 하나까지, 다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것이 되어버렸을 때 그 모든 것이 얼마나 큰 아픔으로 다가오는지를 아는 나는 그때와는 전혀 다른 나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암전을 반복해도 극 중의 나는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건 내가 만든 극 중에서도 그는 아직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건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다. 그때의 그 느낌과 너무 먼 극을 만들어 버리면 그 극 속의 나는 진짜 나로 분할 수 없게 될 테니까.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은 남자에게 먼저 사랑한다고 말하는 일은 그때도 지금도 내겐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생이 연극이면 얼마나 좋을까? 암전이 지나면 돌아가고 싶은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극작가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가상의 이야기가 그 어떤 것도 통과하지 않고 눈앞에 펼쳐진다는 현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배경을 바꾸는 암전. 그래서 연극은 내 현실감각을 뒤흔들고 내 눈을 감긴다. 그 횟수는 점점 더해간다. 언젠가 하루 반은 잠을 자고, 하루 반은 눈을 감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아, 이러다 아예 눈이 멀어버리는 건 아닐까?

연극 추억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