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의 남편찾기가 마지막에서야 그 윤곽을 제대로 갖췄다. 저돌적인 고백과 키스신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미래의 덕선을 연기하는 이미연이 남편을 두고 '공인'이라는 단어까지 사용했다. 파일럿이 공인일리는 없으니, 바둑기사로 유명한 최택(박보검 분)이 남편일 매우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

남편이 누구냐는 문제를 놓고 수차례 저울질을 해 시청자들의 원성을 샀던 남편찾기의 결론이 드러나고 있지만, 원성이 사그러들기는 커녕 증폭됐다. 문제는 택이가 남편이라는 사실 자체에 있지 않다. 남편은 누가 되든지 사실 큰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응팔>이 남편찾기에 반전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결국은 개연성마저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캐릭터의 붕괴

 결국 밝혀진 남편의 정체, 시청자들을 만족시켰을까?

결국 밝혀진 남편의 정체, 시청자들을 만족시켰을까? ⓒ cj e&m


'남편 찾기'가 전작 <응답하라 1997>과 <응답하라 1994>에서 이어져온 터라 이미 시청자들이 식상함을 느낄 거라 의식한 제작진은 초반 남편 찾기를 한 번 더 꼬아두는 묘수를 생각해낸다. 선우(고경표 분)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한 덕선(혜리 분)은 선우를 좋아하게 된다. 그러나 선우의 마음이 덕선의 언니인 보라(류혜영 분)에게 가있는 것을 알게 된 덕선은 첫사랑을 그렇게 떠나보낸다. 그리고 이야기의 중반, 실제로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던 정환(류준열)의 마음을 어렴풋이 알아채게 되자 덕선은 또 정환에게 마음이 기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택이 마음을 고백하고 키스를 하자 덕선은 이번에도 역시 그의 마음을 허락한다.

4명의 소꼽친구 중 무려 세명을 좋아한 덕선은 현실에서라면 쉽사리 이해하기 힘든 캐릭터다. 누군가 자신을 좋아한다고만 하면 그대로 그에게 마음을 주는 것처럼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선우에 대한 마음을 제외하고 나머지 두명에 대해 덕선의 감정선이 충분히 표현이 안됐다. 정환에 대한 감정은 어떻게 정리를 한 것인지, 택이에게 왜 마음이 더 쏠린 것인지에 대한 시청자들의 공감대가 없으니 덕선의 행동에 지지를 보내기 힘들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 과정에서 남성 캐릭터들의 붕괴역시 피할 수 없었다. 초반 정환의 감정선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풀린 탓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정환 캐릭터는 중반 이후 현저히 줄어들며 의아함을 자아냈다. 버스신이나 고백신으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흔든 <응팔>의 1등 공신 캐릭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얽힌 에피소드들은 지나치게 축소되거나 생략되었다. 자신의 마음을 가장 먼저 깨닫고 가장 먼저 시청자들의 공감을 산 캐릭터이기에 이런 홀대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가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정리하고 덕선을 떠나게 되는지가 포인트임에도, 그 포인트가 생략되자 그 캐릭터는 주인공에서 갑자기 분량 없는 조연 수준으로 전락했다.

택이 캐릭터 역시 이 과정에서 붕괴됐다. 우정을 위해 사랑을 포기하는 형태로 그려진 정환과는 달리 사랑을 쟁취하는 캐릭터로서의 매력이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군인인 정환이 근무하는 사천까지 찾아가 "덕선이를 잡으라"는 말을 정환으로부터 듣고야 마는 택이는 잔인해 보이기까지 했다. 정환의 마음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그에게서 그 말을 들었어야 했을까? 이후 아무 껄끄러움 없이 덕선에게 하는 기습 키스는 전혀 로맨틱해 보이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미래 남편인 김주혁의 캐릭터 역시 붕괴됐다. 초반에는 장난기 많고 유쾌한 성격으로 그려지던 그는 갑작스레 방향을 선회해 진중하고 순한 성격의 인물로 변질됐다. 낚시를 위한 포석이라고는 하나, 캐릭터가 가진 기본 성격을 180도로 뒤집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덕선과 살면서 성격이 바뀐 택이라고 하는 편이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었다.

뿌려진 떡밥 회수 실패

 캐릭터의 붕괴로 스토리도 무너지고 만 <응팔>

캐릭터의 붕괴로 스토리도 무너지고 만 <응팔> ⓒ cj e&m


제작진은 남편찾기가 화제가 되자 "남편을 정해두지 않았다"고 밝혔지만, 사실 어느 정도 비중을 두고 한 캐릭터를 서포트 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단 김주혁의 캐릭터가 정환과 많이 닮아있다는 것도 그렇지만, 미래의 인터뷰에서 나오는 이미연과 김주혁의 대화 속에서도 일명 '떡밥'을 상당히 뿌렸다. 그 중 '어차피 남편은 류준열'이라는 말을 탄생시킬 만큼 강력한 것들도 있었다.

일단 덕선이 선우를 좋아했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정환이라는 점이다. 미래의 인터뷰에서 김주혁은 "눈 오는 날 가장 생각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덕선이 선우에게 차인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런 대답은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나오기 힘든 질문이다. 물론 이 사실을 덕선의 일기장에서 봤거나 우연히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에게 들었다는 식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말에는 뉘앙스라는 것이 있다. '눈이 오는 날' 생각나려면 눈이 오는 장면과 덕선이 선우에게 차이는 장면이 매치가 되어야 되는데, 단순히 일기장 속의 분위기나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로 그 상황을 상상하여 대답했다는 것은 어색하다. 직접 보았기 때문에 그 모습이 더욱 강렬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이런 발언은 "결혼 전 만난 여자"에 관한 이야기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미연이 김주혁을 두고 "결혼 전 여자를 많이 만났다"고 말하는 장면은 앞 뒤 맥락으로 판단해 볼 때 '대학 때' 이야기인 것 같은 뉘앙스를 주었다. 그러나 택은 대학에 가지 않았다.

백번 양보해 '일기장'이나 '결혼 전'이라는 단어들로 이 상황들을 무마시킨다고 하더라도 결정적인 '수학여행'에 관한 대화가 있다. 이미연이 수학여행 이야기를 꺼내자 김주혁은 "나도 거기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택은 중학교 중퇴로, 그 이전부터 바둑 영재로 집중 관리를 받은 캐릭터다. 수학여행 같은 것을 갔을리가 만무하다. 도대체 이런 디테일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뿐만이 아니다. 정환에게 덕선이 선물한 핑크색 셔츠에 관한 이야기의 마무리나 정환이 덕선에게 고백하며 꺼내놓은 피앙새 반지에 대한 이야기도 '시간상 못하는' 꼴이 되고야 말았다. 반전을 만들려다가 앞에서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는가 하는 부분마저 망각한 모양새다.

남편찾기가 그리 중요했던 걸까?... 탄식할 일

결국 스토리는 용두사미가 되었다. 초반 가족과 우정에 대한 이야기로 마음을 따듯하게 만든 <응팔>은 어느 순간 짜증스러운 남편찾기에만 몰두하는 드라마가 됐고, 그 로맨스는 설득력을 잃었으며, 그 설득력을 잃은 로맨스의 결말마저 시청자들의 원성을 사고야 만 것이다.

남편찾기가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뻔히 결말을 알고 있는 로맨스라도 과정을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재미있고 신선할 수 있다. 그러나 남편찾기와 반전이라는 두가지 사안에 얽매여 <응팔>이 내놓은 결말은 참으로 황당하다. 이럴 바엔 차라리 뻔하더라도 '어남류'가 나았다. 캐릭터를 붕괴시키고 스토리를 망가뜨리면서까지 남편찾기에 집착한 결과는 초반의 엄청난 호응을 생각해 보았을 때 안타깝기만 하다.

단순히 택이가 남편이라서가 아니다. 이야기 구조 자체가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은 <응팔>의 크나큰 실책이다. 시청자의 반응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스토리를 바꾸며 중심을 잃어버리는 한국 드라마의 고질적인 병폐를 다시 한번 확인할 뿐이다. 웰메이드가 될 수 있었던 드라마가 이런 결과를 얻은 것은 탄식할만한 일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응답하라 1988 혜리 류준열 박보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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