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왕가의 비극이야 한둘이 아니겠으나,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그중에서도 비극성과 잔혹성의 측면에서 타의 주종을 불허합니다. 왕인 아버지가 자신의 대를 이어 왕이 될 예정이었던 아들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무더운 날 뒤주에 가두어서 말이죠.

이 비평을 쓰기 전 도움이 될까 싶어 사도세자의 이야기에 대해 인터넷을 뒤져보니, '뒤주에 사람을 가두면 왜, 어떻게 죽는가', '참수나 사약 형보다 특별히 더 가혹하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궁금해하는 누리꾼들이 여럿 보이더군요.

생매장을 생각하시면 이해가 빠를 겁니다. 밀폐, 음식의 차단, 가열까지. 그리고 영조가 택한 '뒤주 처형'은 거기에 '전시'의 기능을 추가합니다. 사람을 산채로 말려 죽이면서, 사람들이 그것을 지켜보도록 하는 효과까지 얻는 것이죠.

촉망받는 배우인 유아인이 사도세자 역을 맡은 영화가 나온다는 소식에 기대를 하고 극장을 찾은 관객들이 가장 기대했을 장면도,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의 정신적 공황과 육체적 고통의 묘사였을 겁니다. 어쩌다 세자가 그런 참혹한 형을 받게 됐는지야 이미 국사 시간에 다 졸면서 배운 내용이죠.

영화의 예고편도, 작품 대부분을 차지하는 '어쩌다 사도세자가 그렇게 됐는가'에 대한 설명보다 '언제부터 나를 세자로 생각했느냐'며 절규하는 유아인의 연기를 보여주는 데 좀 더 비중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뒤주'를 먼저 보여주는 구성, 문제는 묘사

영화는 이러한 유료 관객들의 수요를 정확히 읽고 있습니다.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시작하자마자 뭐라도 하나 때려 부수고 이야기를 시작해 관객들의 몰입도를 끌어올리듯, 영화 시작과 거의 동시에 뒤주가 등장해요. 영화 시작 후 15분, 세자가 용포를 벗고 결국 뒤주 안에 몸을 완전히 담은 후에야, 상황이 거기까지 가게 된 이런저런 정황들을 하나씩 풀어두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이 뒤주 묘사가, 너무 '약하다'는 겁니다. 앞서 '왜 뒤주에 사람을 가두는 게 다른 처형보다 특히 더 가혹한 것인가'를 궁금해하는 누리꾼들의 글이 인터넷 여기저기에 보였다는 말을 했는데, 그 질문들 대부분은 이미 영화 <사도>를 보고, 영화에 묘사된 뒤주 처형 장면을 보고 난 후에 올라온 것이었습니다. 보고도 그 잔혹성에 공감할 수 없었단 얘기는 영화 속 묘사가 정서적으로 와 닿을만큼 강렬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생각해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단순히 '덜 잔인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도> 속 뒤주 처형의 묘사가 실제 사도세자가 겪었을 상황보다 훨씬 순화돼있는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하지만 정말 문제는 그 안에 갇힌 사도세자와 그 바깥에서 그 상황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여러 인물 '정서 묘사'의 평면성에 있어요.

생각해 봅시다. 사도세자가 저 꼴로 죽으면 내 목숨이 달아나게 생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세자의 폐위를 애타게 원하면서도 '저건 아니다' 생각한 인물들도 있습니다. 궁 안엔, 사도세자를 낳은 이도 있습니다. 이들 모두 언급은 되지만 궁궐 한가운데 놓인 뒤주를 중심으로 그저 맴돌기만 할 뿐 제대로 된 감정의 깊이를 보여주는 이들이 없어요.

그나마 사도세자의 아들은 감정 묘사도 분명하고 그 분량도 상당한데 그마저도 별 의미가 없고, 차라리 없었으면 더 좋았을 영화의 에필로그 탓에 그 감흥이 도리어 흐지부지되는 느낌이더군요. 더 큰 문제는, 뒤주부터 보여주고 영화의 '이야기'는 그 뒤로 하나씩 꺼내 보이는 극의 구조상 그 '축'이 되어야 할 뒤주 장면 묘사가 이토록 덜컹거리다 보니, 나머지도 흐지부지 되더란 겁니다.

임오화변을 아는 관객이든, 아니면 전혀 모르는 외국인 관객이든 (영화는 아카데미 영화제 외국어영화상 부문에 출품됐습니다) 일단 아버지인 왕이 세자를 뒤주에 가둬버리는 정신 나간 상황이 영화 첫 장면에 등장했으면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 대한 궁금증이 자연스레 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일단 '궁금했던' 장면이 밋밋하게 묘사된 것을 목격한 후의 실망감은 '이제 남은 두 시간은 결국 국사책 복습이겠구나' 하는 생각만 들게 합니다.

'신선한 시각' 확보에 실패했다

물론 21세기에 만들어진 사극인 만큼, 국사책의 영상화를 넘어설 시도를 하기는 합니다. 그중 가장 큰 것이 이 이야기를 국사책 어느 한구석의 이야기가 아닌 그냥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로 그리려는 시도죠. 이는 이 작품의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합니다.

송강호가 연기한 영조가 직접 대사로 드러내고 있죠. "이건 나라의 일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일"이라고요. 그리곤, 사도세자가 느꼈을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만성적 결핍과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 등을 꼼꼼히 묘사합니다. 어떤 증상인지 명백하진 않지만, 그가 어떤 정신과적인 문제를 겪고 있다는 이야기도 하고요.

영조 역시 '나쁜 말'을 들으면 귀를 씻고, 자식을 마음대로 기대했다 또 무자비하게 비하하기를 반복하는 한편 충신마저 '좋고 싫음이 지나치게 분명한데 또 그것을 너무 자주 오가 본심을 알 수가 없다'는 말을 할 만큼 강박증, 조울증 등 다양한 정신과 증상의 기전이 관찰되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은 사도세자와 영조를 국사책에서 꺼내와 더 생생하게 묘사하고 우리가 익히 아는 임오화변에 대한 '신선한 시각'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합니다. 그저 '꺼내 왔을' 뿐이에요. 아니, 심지어 그들 부자를 국사책에서 꺼내다가 정신의학이나 심리학 서적 어딘가에 도로 가둬버린 느낌마저 듭니다.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의 묘사대로, 아버지의 가혹한 기대는 아들을 미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비록 영조가 거의 '악역'에 가깝게 묘사가 되긴 했지만 영조 역시 그럴 만한 심리적 이유가 다 있다는 '암시'가 영화의 후반부에 드러나지요.

하지만 관객들이 원하는 건 송강호가 연기하는 영조와 유아인이 연기하는 사도세자가 일으키는 감정의 불꽃과 극적 감동이지 영조와 사도세자의 정신과 진단서는 아닙니다. 왜, 영조가 그랬고, 또 왜 사도세자가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충분히 이해는 갑니다만, 그뿐입니다. 영화의 야심도 정확히 거기에 멈추어 있는 것 같고요.

결국 남는 것은 아쉬움입니다. 왕세자가 산 채로 죽어가는 과정을 그저 바라만 보아야 하는 것도 그랬습니다. 또한 궁궐 안 다양한 인물들의 다양한 입장은 극에 훨씬 더 깊은 입체감을 줄 수 있었고, 종종 미치광이처럼 보이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은 아주 훌륭한 오페라가 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결과물은 그냥 사도세자 이야기를 다룬 수많은 다른 작품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보입니다. 픽션이었던 <왕의 남자>로 이 영화가 놓친 모든 것들을 다 보여주었던 이준익 감독이기에, 이 사실은 더 아이러니하게 다가옵니다.

사도 영조 사도세자 유아인 송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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