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연출의 영화 <베테랑>.

류승완 연출의 영화 <베테랑>. ⓒ 영화 홈페이지

때로 현실은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영화는 인간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구현되는 예술 장르의 하나. 그런데,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가 인간 상상력의 범주를 훌쩍 벗어나 있다면... 영화감독 하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자신의 권리를 되찾으려 피켓을 들고 '1인 시위'을 하던 운전기사를 대기업 경영자가 사무실로 불러 야구방망이로 두드려 팬다.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그리고는 '맷값'으로 2천만 원을 던져준다. 영화 속 이야기냐고? 아니다. 불과 5년 전 실제 일어난 사건이다.

전직 고위관료의 손자와 재벌의 아들이 고급 승용차를 타고 강남 거리를 달렸다. 그런데, '건방지게도' 소형차 하나가 그들의 차 앞으로 끼어들었다. 시비 끝에 소형차 탑승객은 집단폭행 당해 뇌출혈을 일으켰고 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것도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다. 1994년 현실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물론, 범죄는 부자만 저지르는 게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죄를 짓는다. 그러나, 생계형 범죄와 오만방자는 구분돼야 한다.

가진 자들이 돈과 권력을 무기로 전횡을 일삼는 건 한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중국에선 범죄를 저지르고도 거액을 제공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혐의를 덮어씌운 파렴치한 부자가 언론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이 역시 영화나 소설 속 스토리가 아닌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다.

현실과 비현실의 공간을 속도감 있게 오가는 영화

<암살>과 함께 2015년 여름 한국영화계를 쌍끌이하고 있는 류승완 연출의 <베테랑>은 앞서 언급한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현실'을 재료로 만들어졌다. 약간의 관심을 가지고 신문 사회면 기사를 읽어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 그때 저런 사건이 있었지'라며 기억을 소급할 장면이 <베테랑> 속엔 넘쳐난다.

현실과 비현실(영화)의 공간을 종횡하며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베테랑>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惡)을 자신의 캐릭터 속에 품은 이는 배우 유아인(재벌3세 조태오 역). 평상시엔 추잡하고, 때로는 교활하며, 상황에 따라선 광기까지 드러내는 다중인격을 제대로 연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터. 그럼에도 <베테랑>에서 보여주는 유아인의 연기는 발군이다.

특히 애증이 교차하는 자신의 아버지가 사촌형을 구타할 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번들거리는 눈빛은 <아메리칸 사이코>에서 크리스찬 베일이 선보인 연기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인상적이다. 인간 안에 실재하는 유전자 중 악마적인 것만을 선택적으로 물려받은 조태오. 그는 <베테랑>의 절반을 담당하는 '악의 축'이다.

 영화 <베테랑>에서 만인의 손가락질을 받는 '악의 축' 조태오를 연기한 배우 유아인.

영화 <베테랑>에서 만인의 손가락질을 받는 '악의 축' 조태오를 연기한 배우 유아인. ⓒ 영화 홈페이지


현실에선 존재하기 힘든 '완벽한 경찰'을 그려내지만...

그렇다면 영화의 나머지 절반, 즉 '정의의 축'은 누가 담당했을까. 광역수사대 경찰 나도철(황정민 분)이다. 강직하고, 불의에 분노할 줄 알며, 심지어 유머 감각까지 갖춘 완벽에 가까운 인간.

한국사회의 특이성 때문일까? 현대사의 상당 부분을 음습한 그림자 속에서 신음하게 한 정치 군인과 독재자들. 그들이 장악한 권력의 말단에서 정권의 이익을 위해 본래의 역할인 '민중의 지팡이'이기를 포기한 지난 시절 경찰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그리 크지 않은 게 사실이다.

'경찰' 이근안과 문귀동 등은 저항할 수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고문이란 극악한 방식으로 괴롭혔고, 몇몇 '경찰'은 단속의 대상이어야 할 범죄집단이 운영하는 고급 술집에서 접대를 받고, 용돈을 얻어 쓰는 파렴치함을 보여 사람들의 끌탕을 불렀다. 이 역시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닌 엄연한 현실.

그런 까닭에 서도철을 포함한 광역수사대 경찰들에 관한 영화 속 묘사는 여러 부분이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현실에서의 존재 가능성이 제로(0)에 가까운 경찰의 모습만을 그리고 있다'는 비판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가 영화 <베테랑>의 본질은 아니니 접어두고.

 '정의의 축'으로 분한 배우 황정민. 영화 <베테랑> 중 한 장면.

'정의의 축'으로 분한 배우 황정민. 영화 <베테랑> 중 한 장면. ⓒ 영화 홈페이지


'현실적인' 악과 '비현실적인' 정의의 피 튀기는 전장으로

누군가 "<베테랑>을 한 줄로 요약해보라"고 요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절대악(조태오)과 절대정의(나도철)가 현실과 비현실의 공간을 오가며 맞붙는 혈투(실제로 두 배우는 영화에서 많은 피를 흘리기도 한다)'라고.

사실 류승완은 자신이 만든 이전 영화들 속에서도 이런 단순구조의 설정을 즐겼고, 명료한 선악의 구도 속에서 조금은 싱거울 수도 있는 결말이나 답변을 보여준 감독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한 방식이 옳은가, 그른가의 관한 가치평가는 관객이 결정할 몫이기에 여기에선 유보해도 좋을 듯하다.

누군가가 <베테랑>을 '아주 잘 만든 영화'라고 말한다면 그것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정의의 승리'라는 뻔한 결말을 향해 서둘러 달리다 보니 복선과 트릭은 약하고, 지나치게 많은 에피소드를 담으려는 욕심 때문인지 짜임새 역시 촘촘하지 못하고 성글다. 편집 또한 엉성한 부분이 가끔 눈에 띈다.

그럼에도 이것 하나는 부정할 수 없다. <베테랑>은 관객들에게 통쾌함을 선물한다는 것. 현실적 힘을 가지지 못한 '정의의 경찰'이 현실적 힘을 독점한 '악당 재벌3세'에게 겁 없이 달려드는 모습은 영화에서만 가능한 '가슴 속이 후련해지는' 장면이다.

치고, 부수고, 부러뜨리고, 질주하고, 결국엔 피투성이로 쓰러지면서도 기어이 '악의 축' 조태오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는 '정의의 축' 나도철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 열광했던 <로보트 태권 V>를 떠올리며 나 역시 통쾌함과 시원함을 느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 감정들은 '현실에선 절대 영화와 같은 비현실적인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걸 이미 알아버린 서글픔에서 연유한 것이 아닐까. 이걸 두고 '당신의 세계관은 지나치게 비극적'이라 힐난할 사람이 있을지.

그건 그렇다 치고. 언제쯤 우리는 영화 <베테랑>이 묘사한 것처럼 '힘이 정의가 아닌 정의가 힘이 되는 세상'에서 살아볼 수 있을까.

베테랑 유아인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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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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