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쓸쓸하고 역수는 차가운데, 장수는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
(風蕭蕭兮易水寒 / 壯士一去兮不復還) - 형가

 연극 <서안화차> 포스터

연극 <서안화차> 포스터 ⓒ Lim-AMC 제공


귀를 찌르는 기적 소리와 함께, 화차는 서안(西安)으로 달린다. 낡은 기차의 덜컹거림에 그대로 몸을 맡긴 상곤(박지일 분)은 고국을 등지고 역수(중국의 강 이름)를 건넌 형가처럼 자못 비장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의 얼굴에는 진시황의 무덤 속 토용이 짓고 있는 엄숙한 표정도 엿보인다. 상곤은 대체 어떤 사연을 품고 있기에, 그토록 복잡하고 생소한 감정들을 만면에 도색한 채 서안을 향하고 있는 것일까.

2003년 대학로설치극장 정미소에서 초연된 후 오랜 시간 사랑받아온 연극 <서안화차>(극단 물리, 한태숙 작·연출)는 주인공 상곤이 중국 서안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말하는 방식은 단순한 '조명'이 아닌 '폭로'에 가깝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상곤을 비롯해 그와 얽힌 모든 등장인물들의 내면, 그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그림자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한태숙 연출이 폭로하는 그림자는 도무지 바닥을 보일 생각을 않는 심연처럼 검고 깊기만 하다.

 연극 <서안화차>의 한 장면

연극 <서안화차>의 한 장면 ⓒ Lim-AMC 제공


2층으로 구성된 <서안화차>의 무대에는 여러 시공간들이 뒤섞여 있다. 삶과 죽음을 모두 정복하려는 의지가 담긴 2천년 전의 거대한 무덤, 가질 수 없는 것을 갈구하는 한 남자를 싣고 달리는 화차, 소년 시절의 두 남자가 손을 맞잡던 작은 방,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하고 싶던 남녀가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던 침대 위. 언뜻 이질적으로 보이는 이 모든 순간은 한 무대 위에서 별다른 경계선 없이 이어진 채 전시된다.

결과야 어찌 되든, 단지 서로 다른 이야기를 이어 붙이는 것이라면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곤이 품고 있던 기억의 편린들은 그렇게 간단히 조립되지 않은 듯하다. 조각과 조각 사이의 접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매끄럽게 흐르는 내러티브는 과연 장인의 솜씨라 할 만하다.

 연극 <서안화차>의 한 장면

연극 <서안화차>의 한 장면 ⓒ Lim-AMC 제공


입체적 구성이 전한 운명의 힘

<서안화차>는 상연 내내 무대 1층에서 산 자들이 입씨름을 벌이고 무대 2층에서 죽은 자들이 이를 주시하는 양을 보여 준다. 이때 짧게는 몇십년, 길게는 몇천년이나 벌어진 시간차는 공간 속에 박제된 채 의미를 잃는다. 죽은 자들은 죽지 않은 것처럼 묘혈을 박차고, 산 자들은 살아 있지 않은 것처럼 무덤을 소망한다. <서안화차>의 무대 위에서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를 가르는 경계는 힘을 빼앗긴다.

이처럼 기이하게 접붙여진 시공간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연출은 오싹하면서도 혼란스러운 극의 분위기를 조성하며 부조화가 만들어낸 조화를 유감없이 보여 준다. 그러나 동시에 관객들을 짙은 해무 한 가운데 떨어진다. 모든 것이 의외이기 때문에 더욱 충격적일 폭로의 가능성을 담고 있는 그 안개 속에서, 관객들은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맨손으로 더듬어 갈 수밖에 없다.

관객이 맨 먼저 본 상곤은 그저 직장을 그만 두고 중국 여행길을 오른 중년 남자고, 찬승은 정력적이고 허세 넘치는 사업가다. 그러나 극은 그들의 그림자를 집요하게 밟아 나가는 과정에 관객을 참여시키고, 숨겨진 이야기를 누설한다. 형가의 독 묻은 비수에 죽음을 맞을 뻔한 진시황의 절대 고독을 담담히 이야기하던 상곤은 사실 한 번도 누군가의 옆자리에 선 적이 없는 탓에 더욱 고독한 자였고, 위악의 가면에 자신을 숨겼던 찬승은 남들과 다른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두려운 연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맨발인 채로 서로의 눈을 들여다 보았던 상곤과 찬승의 학창 시절은 가장 순수하고 비밀스러운 행복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한다. 제일 사랑하는 찬승의 제일 아름다운 발을, 제일 잘 할 수 있는 그림으로 남기고 싶었던 상곤의 욕망은 천진했고 그래서 폭력적이었다. 그의 마음을 찬승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찬승은 어릴 적 촉진제를 맞는 바람에 장애를 갖게 된 형처럼 괴물로 여겨지지 않기 위해 '남자'로 있어야 했고, 여자를 사랑해야만 했다. 끝내 입을 맞추지 못하는 상곤과 찬승의 뒤로 두 토용이 얼굴을 맞대며, 그들의 사랑이 무덤 속에 갇혔음을 암시한다. 찬승은 애초에 <서안화차> 속 누구도 될 수 있으면서 또 아무도 아닌 토용이 되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거부하는 세상으로 돌아오고 싶어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연극 <서안화차>의 한 장면

연극 <서안화차>의 한 장면 ⓒ Lim-AMC 제공


진시황릉 축조 현장에 존재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거대한 가상 현실 속에 생매장될 수밖에 없던 먼 과거의 노무자들처럼, 끝까지 자신의 그림자를 은폐하지 못한 이들은 서로를 붙잡은 채 무덤으로 향한다. <서안화차>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서안으로 가기 위해 상곤이 앉았던 화차 안 좌석에 한 번씩 몸을 기댄다. 때때로 그 좌석은 상곤의 어머니(지영란 분)가 생존을 위해 홍가(신현종 분)에게 몸을 허락하려 하는 육욕의 붉은 장막으로 가려지기도 하고, 정선(박수진 분)이 상곤에게 동류의식을 느꼈음을 고백하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어떤 모양을 하고 있든지, 그곳에서 공유된 모든 비밀은 인물 사이의 차이를 메우고 그들을 토용의 길로 이끈다.

<서안화차>의 백미는 상곤과 찬승의 마음 속 그림자 중 하나인 장애인 형과 관련된 사연을 회상하는 장면이다. 살아 움직이는 토용들, 거세당한 여산릉의 일꾼들, 신체의 일부분이 결여된 조각상들, 그리고 상곤은 기괴한 신음과 몸짓을 하며 한데 얽힌다. 그리고 찬승은 이 광경을 관망하는 것으로 그들과 거리를 두려 한다. 그러나 이미 <서안화차> 안 모든 인물을 투영하는 거울이 된 토용은 상곤을 유린했던 형의 음성을 내며 가장 수치스러운 진실과 찬승을 대면시킨다. 그리고 드디어 걷힌 안개 속에서, 상곤은 찬승 역시 위악의 가면을 벗고 자신을 봐 주기를 갈급한다. 그렇게 끝으로, 무덤 속에 존재하는 그들만의 세상으로 내달리는 감정은 보는 사람이 탈력할 정도로 압도적인 에너지를 뿜어 낸다.

 연극 <서안화차>의 한 장면

연극 <서안화차>의 한 장면 ⓒ Lim-AMC 제공


화차의 차창 밖으로 먼동이 터 오는 것이 보인다. 상곤은 서안에 당도했다. 사랑하는 찬승의 세상에서 언제나 이방인이었던 그에게 서안은 유토피아였을까, 디스토피아였을까. 그리고 상곤은 여산릉에 늘어선 토용들을 바라본다. 낯익은 얼굴들이 토용의 그림자를 밟고 서 있다. 모든 것이 빛에 폭로된 후 딱 존재의 크기만큼 남은 그 그림자는 눈물이 솟을 만큼 가련하다. 그리고 다시금 화차의 기적 소리가 울려 퍼지지만, 상곤은 여산릉을 떠나지 못한 채 토용과 함께 먼 곳을 바라본다. 그 그리움 가득한 시선의 끝에는 상곤의 작업실에서 영생과 자유를 얻은 찬승의 미소가 있으리라. 마치 평행세계같은 여산릉과 작업실에서, 상곤과 찬승은 끝내 '나만의 너'를 가지고야 말았을 것이다.

이태섭의 무대미술과 김창기의 조명은 <서안화차>의 음울하고 고독한 분위기를 완성했다. 이는 전통 타악기 그룹 '공명'이 만들어낸 소리와 임옥상의 인상적인 조각들이 조력한 덕택이기도 하다. 연극계 최고의 스태프들이 보여 준 협업의 결과물은 그 자체로도 개연성이다. 특히 한태숙의 재기 넘치는 연출은 이 훌륭한 재료들을 빈틈 없는 한 덩어리로 만드는 아교와도 같았다.

지난해 방영된 KBS 1TV <정도전>에서 이색으로 분하며 안방 극장에서도 왕성하게 활동 중인 박지일과 <내 심장을 쏴라>, <관상> 등 영화에서도 인상적 연기를 펼쳐 온 이찬영이 연극 무대에서 보여 준 앙상블은 치명적인 관계의 끝에서 느껴지는 처연함을 극대화했다. 신현종과 지영란의 능청스러운 대화는 무거운 극 분위기 속에서도 기분 좋게 터지는 웃음을 선사한다. 또 다양한 인간 군상을 무감정의 토용 안에 담아낸 박종태와 최순진은 물론, 무덤으로 가라앉는 일상을 탈출하려는 정선으로 분한 박수진도 서안으로 달려가는 화차의 원동력이 됐다. 5월 31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상연한다.

서안화차 한태숙 박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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