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틸 앨리스> 포스터

영화 <스틸 앨리스> 포스터 ⓒ 소니 픽처스 클래식?스


* 이 기사에는 영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알츠하이머병. 각종 콘텐츠의 '단골손님'이다. 2004년 정우성·손예진 주연의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 같은 해 같은 달에 개봉해 진검승부를 벌였던 영화 <노트북>, 2013년 김영하 작가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그리고 2014년 장예모와 공리의 재결합 <5일의 마중>까지. 이밖에도 셀 수 없을 정도다. 그만큼 '기억의 소멸'은 그 자체로도 깊은 슬픔을 안겨준다.

알츠하이머병 못지 않게 루게릭병 또한 각종 콘텐츠에 자주 등장하곤 한다. 알츠하이머병이 기억이 쇠퇴해 소멸되는 것이라면, 루게릭병은 육체적으로 세포가 쇠퇴해 소멸하는 질환이다. 20세기 공전의 베스트셀러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 대표적이다.

'기억의 소멸'과 '육체의 소멸'. 병의 중함에는 차이가 없겠지만, 내 생각에는 기억의 소멸이 더욱 치명적일 것 같다. 내가 더 이상 나일 수 없다는 것은 무척 끔찍한 일이다. 지난 4월 29일 개봉한 영화 <스틸 앨리스>가 그리는 알츠하이머병은 어떨까.

과장되지 않게... 편하면서도 빛나는 연기

 영화 <스틸 앨리스>의 한 장면

영화 <스틸 앨리스>의 한 장면 ⓒ 소니 픽처스 클래식?스


영화 속 주인공 앨리스(줄리안 무어 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언어학자다. 콜럼비아 대학교 교수인 그녀는 이제 50대에 진입해 절정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갑자기 찾아온 불행. 다름 아닌 희소성 질환 알츠하이머병. 누구보다도 똑똑한 언어학자가 서서히 언어를 잃어버리게 된다. 믿을 수 없지만 받아들여야 하고, 그녀는 미래의 '나'에게 메시지를 남긴다.

그녀에게는 듬직한 남편과 4남매가 있지만, 일찍이 10대 때 떠나보낸 엄마와 여동생을 그리워한다. 그 기억은 그녀를 지탱해주는 힘이다. 한편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지워버렸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죽었다. 앨리스와는 달리 아버지는 일찍이 아내와 딸을 보내고 남은 세월을 술에 의지했을 것이다. 기억의 파편들이 그녀를 괴롭힌다.

영화는 앨리스 역을 맡은 줄리안 무어에 의해 흘러간다. 세계 3대 영화제인 칸,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를 모두 석권하고 아카데미까지 접수한 그녀, 지난해 말 개봉한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의 '줄리엣 비노쉬'를 생각나게 한다. 명성과 실력으로 영화를 거의 혼자 이끌고 가다시피 하는 원톱 여자배우로서, 과장되지 않게 편하면서도 빛나는 연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 둘의 옆에 있던 '크리스틴 스튜어트'. 그녀는 <트와일라잇> 시리즈 등으로 2013년 최악의 여우주연상을 탈 때와는 다른 연기를 선보인다. 1990년생,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핫한 여배우인 그녀가 마치 지난 날의 방종을 뉘우치고 다시 태어나고자 대배우들에게 사사를 받는 느낌이 든다.

끝까지 놓지 않은 엄마와 여동생에 대한 기억

 영화 <스틸 앨리스>의 한 장면

영화 <스틸 앨리스>의 한 장면 ⓒ 소니 픽처스 클래식?스


앨리스는 알츠하이머병 확진이라는 믿기 힘든 사실에 더해 그녀가 앓는 병이 희소하게도 가족력이 있어 자식과 그 자식들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말고 또다시 좌절한다. 자식들에게 알릴 수밖에 없는 그녀는 자신을 꾸짖는다. 기억을 잃어가는 것도 모자라 가족에게도 영향을 끼치다니... 그녀는 남편에게 이런 말도 서슴지 않는다.

"차라리 암이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부끄럽지는 않잖아."

그녀는 점점 기억을 잃어가고 언어 능력이 쇠퇴하는 도중 담당의사의 주선으로 알츠하이머 환자들을 대신해 연설을 하기도 한다. 길지 않은 원고를 작성하는 데만 3일이 걸렸다는 그녀. 아마 이 작업은 그녀가 그녀일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최후의 일일 것이다. 이 연설은 영화의 끝에 나옴직 하지만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한다.

영화에서 앨리스는 크게 보아 세 단계에 걸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초반의 똑똑하고 지적인 언어학자이자 교수로서의 모습. 이후 알츠하이머병으로 기억이 쇠퇴하고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게 된 중반의 모습. 그리고 모든 기억을 잃고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된 환자의 모습이 마지막이다. 무엇보다 눈빛의 변화가 완벽하다.

하지만, 100분의 짧은 듯한 러닝타임이 조금 애매했다. 의도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앨리스의 알츠하이머병 기간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지나치듯 말하는 대사로 유추할 뿐이다. 대략 몇 년의 시간이 지난 것으로 나오는데, 체감상 몇 개월 지나지 않은 듯하다. 영화 자체가 연기와 분위기 표현에 치우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놓친, 혹은 포기한 부분이리라.

영화는 반전없이 예상한 대로 흘러간다. 앨리스는 점차 기억을 잃어 가면서도 옛날 엄마와 여동생이 살아 있을 당시는 끝까지 잊지 않는다. 오랫동안 남편(알렉 본드윈 분)이 그녀를 간호했지만, 일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떠나게 됐고, 그 자리를 막내딸 리디아(크리스틴 스튜어트 분)가 대신한다. 그녀는 엄마 앨리스가 제일 걱정하고 또 제일 못 미더운 딸이었는데, 아이러니다.

사랑 그리고 가족

이 영화는 결국 '사랑'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최고의 언어학자지만 다른 무엇보다 사랑한 가족들의 기억을 끝까지 끌어안고자 했다. 사랑하는 가족들만이 끝까지 그녀가 그녀일 수 있게 해줬으며, 끝까지 옆을 지켰다. 그녀는 기억을 모두 잃고서도 '사랑'을 느꼈을까?

리디아는 앨리스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글을 읽어준다. 그리고 앨리스에게 묻는다. 이 글이 무엇에 대한 것이냐고. 앨리스는 답한다. '사랑'. 모든 걸 잊어도 사랑은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앨리스의 연설 중 한 소절을 전해드리고자 한다. 영화에서는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나오는데, 그중 한 부분이 위에서 언급한 "차라리 암이었으면 좋겠어"라는 대사고, 다른 한 부분이 바로 이 연설이다.

"우린 우스꽝스럽고, 무능하고, 웃겨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병일 뿐이지요. 저는 살아 있습니다. 사는 동안 하고 싶은 일도 있습니다. 저는 아직 인생에 행복한 날들과 즐거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제가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억은 사라질 거예요. 내일이면 잊을지 몰라요.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제게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의사소통에 매료되어 굉장히 열정적이었던 옛날의 제 자신처럼요."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singenv.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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