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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에 북촌은 새판이 짜인다. 서울인구의 급격한 증가로 주택전문건설업체, 소위 집장사가 여러 곳에 한옥개발지구를 만든다. 가회동 31·33번지 도 그 중 하나. 북악을 집어삼킬 기세로 언덕바지까지 빼곡히 한옥이 들어섰다.
▲ 북촌의 새판, 가회동 한옥 1930년대에 북촌은 새판이 짜인다. 서울인구의 급격한 증가로 주택전문건설업체, 소위 집장사가 여러 곳에 한옥개발지구를 만든다. 가회동 31·33번지 도 그 중 하나. 북악을 집어삼킬 기세로 언덕바지까지 빼곡히 한옥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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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북촌 재동에 600년 묵은 백송이 한 그루 서 있다. 조선의 역사, 북촌과 함께한 나무다. 이 나무 그늘 아래 홍영식 집이 있었다. 우정총국 총판으로 갑신정변을 주도한 홍영식, 정변을 진압한 세력이 보면 정변의 주모자였다.

청군의 진압 과정에서 창덕궁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목숨만 잃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집 또한 온전치 못해 집터에 서양식 의료기관인 제중원이 들어섰다. 정변 때 제거 1순위로 뽑혀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던 민영익을 치료해준 알렌의 건의로 설립됐다. 세도가 무너지면 집도 함께 무너졌다. 이게 조선말 북촌의 일면이었다.

북촌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이렇게 없어진 집들이 수없이 많다. 맹사성, 성삼문, 박규수, 홍영식, 김옥균, 손병희, 이상재, 현상윤, 여운형, 민영환 집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공동묘지 비석마냥 집터 앞에 표지석만 놓였다. 표지석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역사의 칼날에 목 베인 사람은 표지석도 남아 있지 않다.

주택건설업자에 의해 새판 짜이는 북촌

조선 말 정치사회의 변화와 함께 찾아온 조선의 몰락과 일제강점 등 모진 세월을 북촌도 피해갈 수 없었다. 세상을 쥐락펴락한 실세의 동네인 만큼 변화도 컸다. 아전과 별궁이 헐리고 권력구조 개편에 따른 기득권 세력의 몰락과 함께 집은 쪼개졌다.

이 와중에 서울 인구는 계속 증가해 주택난을 불러왔고 하나의 대안으로 1920년대 후반부터 주택개발업자에 의해 도시한옥지구가 개발되었다. 이 때 북촌에 등장한 한옥지구가 가회동 1번지, 11번지, 31번지, 33번지, 삼청동 35번지 그리고 익선동 166번지였다. 낙원상가 곁에 있는 익선동 166번지는 서자 취급을 받지만 엄연히 북촌이다.

1930년 주택건설업체, 건양사에 의해 조성된 한옥지구로 서울에서 제일 오래되었다. 빌딩으로 둘러싸여 ‘한옥섬’처럼 보이는데 언제 개발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울지 모른다. 개발보다는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 익선동 166번지 한옥 1930년 주택건설업체, 건양사에 의해 조성된 한옥지구로 서울에서 제일 오래되었다. 빌딩으로 둘러싸여 ‘한옥섬’처럼 보이는데 언제 개발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울지 모른다. 개발보다는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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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들어선 한옥은 지붕경사가 전통 한옥보다 완만하고 처마에 연초록 함석을 달았다. 여러 한옥이 모이면 지붕이 잔물결 이는 바다처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유리와 함석을 건축자재로 사용하고 편의성을 높여 전통 한옥을 개량하였다. 이렇게 지어진 표준화된 한옥을 '개량한옥' 또는 '집장사 집'이라 하였다.

규격화된 평수에 다소곳한 지붕경사, 골목과 문간이 접해있고 유리와 함석을 새로운 건축자재로 사용했다. 집을 찍어내듯 표준화한 한옥으로 개량한옥, 도시한옥, 집장사집이라 불리었다. 새로 지어진 집들이 많이 생기고 편의에 맞게 고쳐 예전 모습을 잃기는 했다
▲ 표준화된 개량한옥 규격화된 평수에 다소곳한 지붕경사, 골목과 문간이 접해있고 유리와 함석을 새로운 건축자재로 사용했다. 집을 찍어내듯 표준화한 한옥으로 개량한옥, 도시한옥, 집장사집이라 불리었다. 새로 지어진 집들이 많이 생기고 편의에 맞게 고쳐 예전 모습을 잃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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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주도한 대표적인 주택전문건설업체는 건양사. 정세권이 사장으로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주택분양업자, 어딘지 석연치 않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의외로 후하다. 딱히 약력이 나오지 않아 국가보훈처에 들어가 보니 독립유공자로 등록되어 있었다. 이곳에 대략적인 활동내역이 나온다.

1894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조선물산장려회에 적극 참여했고 신간회 서울지부에서도 활약했다. 1935년 조선어학회가 어려움에 처하자 화동에 있는 2층 건물과 부속 대지를 기부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경제 분야에 식견이 밝아 조선물산장려회에서는 경리부상무이사를 지냈고 신간회에서는 재정부원으로 활동하였다.

활동내역 중에 1935년이 눈에 띈다. 정세권이 주택분양사업으로 벌어들인 돈을 조선어학회에 기부한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집장사 업자가 아니었다. 1937년 <동아일보>기사에는 이재민에게 구제복을 지원했다는 기사도 나온다.

1935년 건양사 사장, 정세권이 조선어학회에 기부한 터로 윤보선 집 바로 북쪽에 있다. 그는 개발 수익만 노리는 주택분양업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조선어학회 터 1935년 건양사 사장, 정세권이 조선어학회에 기부한 터로 윤보선 집 바로 북쪽에 있다. 그는 개발 수익만 노리는 주택분양업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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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회동 31·33번지, 익선동 166번지 개발에 나선 건양사

1930년 건양사는 제일 먼저 익선동 166번지에 '한옥타운'을 조성했다. 주로 중산층 이하 서민을 대상으로 흔히 말하는 '전용면적 25.7평 이하', 중소형 한옥을 공급했다. 우리나라 요정 1호, 오진암 자리에 들어선 이비스앰배서더 호텔을 비롯하여 하나둘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빌딩들 틈바구니에서 용케 살아남았다. 80년이 훌쩍 넘어 서울 최고(最古)의 한옥지구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166번지를 살짝 벗어나면 돈화로로 이어지는 피맛골. 말을 타고 다니는 고위 관료들에게 인사하기 싫어서 혹은 꼴 사나워 말을 피해 다니던 길이라 하여 '피마(避馬)'골이다. 빌딩숲을 피하여 웅크리고 있는 166번지 마을, 왠지 피맛골과 어울린다.

1931년 일제가 창덕궁과 종묘를 동강내 율곡로를 만들면서 율곡로 북쪽을 북촌으로 여기게 되었지만 익선동도 엄연히 북촌이다. 정갈하지 않지만 전깃줄마저 이웃을 이어주는 탯줄처럼 보여 정이 가는 동네다
▲ 익선동 166번지 골목 1931년 일제가 창덕궁과 종묘를 동강내 율곡로를 만들면서 율곡로 북쪽을 북촌으로 여기게 되었지만 익선동도 엄연히 북촌이다. 정갈하지 않지만 전깃줄마저 이웃을 이어주는 탯줄처럼 보여 정이 가는 동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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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가치가 충분한데 재개발 시름에 잠겨 있다. 대형 빌딩 사이에 움푹 파인 듯 들어선 한옥들, 탐욕스런 개발업자가 보면 노른자 땅으로 보일 것이고, 개발만능주의자의 눈으로 보면 '알박기'한 한옥으로 보일 것이다. 개발은 한 번이면 족하다. 이제 무자비한 개발이 아니라 주민들의 의사가 반영된 합리적인 개선이 필요하다.   

익선동 166번지가 시범사업이라도 된 걸까? 자신감을 얻은 건양사는 가회동 31번지와 33번지를 건드린다. 33번지는 1933년부터 1934년에, 31번지는 1936년에서 1939년에 걸쳐 개발되었다. 

북촌 4·5·6·7경은 주택건설업자 건양사의 '작품'

비탈 따라 늘어선 한옥이 북촌5·6경을 낳았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경치를 5경(위 사진), 서울시내와 함께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를 6경이라 부른다. 모두 관광객을 위해 임의로 붙인 이름이다.
▲ 가회동 31번지 골목 비탈 따라 늘어선 한옥이 북촌5·6경을 낳았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경치를 5경(위 사진), 서울시내와 함께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를 6경이라 부른다. 모두 관광객을 위해 임의로 붙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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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회동 31번지 비탈진 골목길에 밀집 한옥 지붕이 힘 겨루며 서 있다. 정갈하여 익선동 166번지와 사뭇 다른 느낌이다. 집 규모도 커졌다. 이 골목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위로 보는 경치와 아래로 보는 경치를 따로 불러 각각 '북촌 5경, 북촌6경'이라 했을까?

더 말하면 쓸데없는 잔소리요, 군더더기다. 다만 사람이 들끓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이게 싫다면 맹사성집터 쪽 골목을 배회해도 좋고 북촌 5·6경 옆 골목을 한가하게 걸어도 좋다. 여기서 인왕산을 보는 맛도 산뜻하다. 31번지 언덕배기에서 어슬렁어슬렁 소걸음으로 보는 경치를 '북촌 7경'이라 한다.

31번지 언덕에서 어슬렁거리며 이쪽저쪽 보는 경치를 북촌7경이라 이름 붙였다
▲ 가회동 31번지 언덕배기에서 본 인왕산 31번지 언덕에서 어슬렁거리며 이쪽저쪽 보는 경치를 북촌7경이라 이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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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회동 33번지는 31번지와 번지수만 틀릴 뿐, 붙어 있는 한 동네다. 지대가 높아 31번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여기서 보는 경치를 '북촌 4경'이라 부른다. 촘촘히 붙어 있는 지붕들, 잔물결 이는 '지붕바다' 같다.

어깨와 어깨를 맞댄 지붕이 잔물결을 일으키는 바다와 같다. 흔히 북촌4경이라 부른다
▲ 가회동 33번지에서 본 ‘지붕바다’ 어깨와 어깨를 맞댄 지붕이 잔물결을 일으키는 바다와 같다. 흔히 북촌4경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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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회동 11번지도 규모만 작지 한옥개발지구다. 가회동성당 맞은편 언덕에 있다. 자료를 찾지 못하였으나 1935년 전후에 개발된 것으로 보인다. 가회동 31·33번지마냥 경사면에 한옥골목이 형성되어 있어 '북촌 3경'이라 부른다.

31·33번지와 마찬가지로 한옥지구로 개발된 곳이다. 간간이 높은 거물이 들어서 예전 모습이 사라졌지만 아직 가회어린이집 골목 안은 군집 한옥이 남아 있다.  사진 속에 북촌 3경이 숨어 있다.
▲ 가회동 11번지 정경 31·33번지와 마찬가지로 한옥지구로 개발된 곳이다. 간간이 높은 거물이 들어서 예전 모습이 사라졌지만 아직 가회어린이집 골목 안은 군집 한옥이 남아 있다. 사진 속에 북촌 3경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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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개발지구 중 가장 많이 변한 곳이 가회동 1번지다. 가회동 31번지 동쪽에 붙어 있는 동네로 1935년, 한옥 전문시공업체인 건남사가 개발에 참여했다. 1960년대부터 이곳에 살았던 한화그룹 회장 집을 중심으로 한화건설 소유, '한옥형 빌라'가 성처럼 싸고 있다. 그룹회장과 일가, 한화그룹사가 이 지역의 한옥을 잠식해 가회동 1번지는 '한화타운'이 되었다.

1940년 건남사가 개발한 한옥지구였으나 가회동길 도로변에 몇 채 남아있을 뿐, 예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한화그룹회장과 일가, 그룹사 소유 집들이 들어서 한화타운이 되었다
▲ 가회동 1번지 정경 1940년 건남사가 개발한 한옥지구였으나 가회동길 도로변에 몇 채 남아있을 뿐, 예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한화그룹회장과 일가, 그룹사 소유 집들이 들어서 한화타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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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화를 비롯해 유수홀딩스(구 한진해운홀딩스), 롯데그룹, 동국제강, 동아원, 리움미술관 등 그룹회장과 일가, 일부 자산가들이 북촌에 살거나 집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시장 공관도 들어올 예정이다. 조선의 역사와 함께 한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북촌. 요즘 권력지도가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북촌에 들어오는 면면을 보고 거꾸로 유추해볼 일이다. 


태그:#가회동31·33번지, #가회동11번지, #북촌 4·5·6·7경, #북촌3경, #북촌4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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