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안녕, 헤이즐 국내 메인 포스터

▲ 안녕, 헤이즐 국내 메인 포스터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시한부 암환자들의 사랑이야기. 더없이 건조한 한 문장으로 요약 가능한 이 영화는 그러나 흔치않게 풍성하고 매혹적이며 아름다운 작품이다.

산소통에 부착된 호흡기를 생명줄처럼 달고 다니는 소녀 헤이즐, 삶을 즐기는 또래의 아이들과는 달리 거듭되는 항암치료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그녀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어느날 그녀는 가족들의 성화에 못이겨 암환자들의 모임에 나가게 되고 그곳에서 매력적인 소년 어거스터스를 만난다.

긍정적이고 유머러스한 어거스터스는 헤이즐과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어린 나이부터 암과 싸우며 많은 것을 잃었던 두 남녀가 나누는 애절한 사랑은 보는 이를 절로 숙연케 한다.

떠나보내는 이의 슬픔과 떠나가는 이의 우려가 안쓰럽게 교차하고 죽음과 대면해 무너지는 인간의 모습이 아프면서도 진실하게 담겼다.

영화의 원작은 미국의 재능있는 소설가 존 그린의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다.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아마존닷컴 등 영향력 있는 여러 매체로부터 2012년 최고의 소설 가운데 하나로 꼽힌 이 작품은 얼마 남지 않은 삶 속에서 진실한 관계를 맺고 가치있는 고민을 하며 무엇보다 서로를 사랑한 남녀의 이야기를 그려내어 많은 사랑을 받은 바 있다.

조쉬 분 감독은 소설의 매력적이고 위트있는 대사를 그대로 옮겨오고 헤이즐과 어거스터스의 캐릭터를 입체적이면서도 매력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해 까다로울 수 있는 소설의 영화화 작업을 순조롭게 해냈다.

당찬 소녀 헤이즐과 그의 어거스터스는 헐리웃의 떠오르는 기대주 쉐일린 우들리와 안셀 엘고트가 맡았다. 올 봄 개봉한 블록버스터 <다이버전트>에도 주연과 조연으로 함께 출연한 바 있는 두 배우는 이 영화에서 남녀 주인공을 맡아 각자의 필모그래피에 의미있는 작품을 새겨넣었다.

안녕, 헤이즐 근래 보기 힘든 조화를 보여줬던 헤이즐(쉐일린 우들리 분)과 어거스터스(안셀 엘고트 분)

▲ 안녕, 헤이즐 근래 보기 힘든 조화를 보여줬던 헤이즐(쉐일린 우들리 분)과 어거스터스(안셀 엘고트 분)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하이틴 멜로와 진지한 드라마의 결합

영화 속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사건은 헤이즐이 감명깊게 읽은 소설의 작가와 만나는 암스테르담에서의 에피소드일 것이다. 날이 갈수록 병세가 악화되어 가던 헤이즐은 어거스터스 덕분에 작가와 만남을 갖게 되는데 이 과정의 전환은 정말이지 흥미롭다.

이전까지의 전개가 산뜻하고 경쾌한 하이틴 멜로에 가까웠다면 이후의 이야기는 죽음과 현실이 영화의 전면에 드러나며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드라마로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영화를 하이틴 멜로물에서 진지한 사랑영화로 뒤바꾸기에 충분하다.

윌렘 데포가 연기한 괴팍한 작가 피터 반 하우튼은 영화의 주제를 수면 위로 부상시키는 중요한 인물이다. 헤이즐과 어거스터스에게 그는 결말을 분명히 하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면 흠잡을 데 없는 존경스런 작가이며 그들을 암스테르담으로 초대하고 환상적인 식사를 대비한 친절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를 직접 대면하기 전까지는.

하지만 암스테르담의 그의 집에서 이뤄진 짧은 면담은 헤이즐과 어거스터스는 물론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에게도 충격적이기 짝이 없다. 그의 집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팬레터가 개봉도 되지 않은 채 버려지듯 쌓여있었고 그는 자신을 찾아온 헤이즐과 어거스터스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메일을 통해 그들의 사연에 답한 건 반 하우튼의 비서였고 작가는 멀리서 자신을 찾아온 두 젊은이를 괴팍하고 무례하게 대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남겨진 자의 고통

헤이즐과 어거스터스에겐 못된 늙은이였지만 반 하우튼은 아픈 과거로 고통받고 있는 불행한 인긴이기도 했다. 그는 병으로 딸을 잃은 아버지로 죽은 딸을 모델로 한 책을 썼지만 그 아픔을 극복하지 못한 채 알콜중독에 빠져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는 끝없이 고통 속에 살아가는 반 하우튼의 모습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남겨진 자의 고통을 전면에 드러낸다. 이는 곧 헤이즐과 그 가족의 관계, 헤이즐과 어거스터스의 관계와 대비되기에 이르고 영화는 헤이즐과 친구들이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상실감을 극복해내는가를 보여준다.

안녕, 헤이즐 비현실적으로 여겨질 만큼 매력적인 주인공 어거스터스(안셀 엘고트 분)

▲ 안녕, 헤이즐 비현실적으로 여겨질 만큼 매력적인 주인공 어거스터스(안셀 엘고트 분)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그 과정에서 인상적으로 그려지는 장면은 어거스터스의 장례식이다. 암이 재발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직감한 어거스터스는 헤이즐과 친구 이삭에게 자신의 장례식을 직접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들은 빈 교회에서 오직 그들만을 위한 장례식을 시작한다.

이 자리에서 헤이즐이 읊은 어거스터스의 추도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사랑 이야기를 할 수는 없으니까 수학 이야기를 할게요. 전 수학자가 아니지만, 이건 알아요. 0과 1 사이에는 무한대의 숫자들이 있습니다. 0.1도 있고 0.12도 있고 0.112도 있고 그 외에 무한대의 숫자들이 있죠. 물론 0과 2 사이라든지 0과 백만 사이에는 더 '큰' 무한대의 숫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무한대는 다른 무한대보다 더 커요.

저희가 예전에 좋아했던 작가가 이걸 가르쳐줬죠. 제가 가진 무한대의 나날의 크기에 화를 내는 날도 꽤 많이 있습니다. 전 제가 가질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숫자를 원하고, 아, 어거스터스 워터스에게도 그가 가졌던 것보다 더 많은 숫자가 있었기를 바라요.

하지만, 내 사랑 거스, 우리의 작은 무한대에 대해 내가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로 다할 수가 없어. 난 이걸 세상을 다 준다 해도 바꾸지 않을 거야. 넌 나한테 한정된 나날 속에서 영원을 줬고, 난 거기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

헤이즐의 추도사는 어거스터스와 헤이즐의 삶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보다 짧았지만 그들의 삶 역시 무한대의 가치가 있었음을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무한대가 다른 이들의 무한대보다 작음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서로의 무한대가 더 크기를 바랐던 두 남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안녕, 헤이즐>은 별처럼 맑고 아련한 그런 영화였다.

안녕 헤이즐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조쉬 분 쉐일린 우들리 안셀 엘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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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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