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 류중일 감독은 지난해 이승엽의 기용문제로 적지않게 마음고생을 해야했다. 이승엽은 지난해 타율 2할5푼3리 13홈런 69타점으로 이름값에 비하여 다소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한국시리즈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만일 삼성이 지난해 우승에 실패했다면, 부진한 이승엽에 대한 미련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류중일 감독도 결과에 대한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류중일 감독은 흔들리지 않았다. 삼성은 한국시리즈에서 7차전까지 가는 혈전 끝에 두산에 4승 3패로 역전승을 거두며 통합 3연패에 성공했다. 이승엽은 마지막 경기까지도 6번 지명타자로 출전하여 적시타를 기록하며 류중일 감독의 기대에 부응했다.

류 감독의 이승엽에 대한 신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류 감독은 올시즌을 앞두고 일찌감치 이승엽의 부활을 예고하며 올해도 변함없이 중용할 의지를 내비쳤다. 어느덧 39세가 된 이승엽은 전성기가 지난 게 아니냐는 우려를 비웃듯, 올시즌 다시 한 번 야구인생의 불꽃을 태우고 있다.

류중일 감독 트레이드 마크, '믿음의 야구'

 삼성 라이온즈 이승엽 선수

삼성 라이온즈 이승엽 선수 ⓒ 연합뉴스

14일까지 10경기에 모두 출전해 타율 3할3푼3리(39타수 13안타)에 1홈런 6타점.

물론 전성기와는 비교하기 어렵지만 불혹을 바라보는 베테랑으로서는 충분히 빼어난 활약이다. 최근 9경기 연속 안타 행진을 이어갈 만큼 꾸준한 타격감이 인상적이다.

나이를 속일 수 없듯 장타력은 예전보다 저조해 보이지만, 세월이 주는 노련함과 팀배팅으로 여전히 자기 몫을 해주고 있는 모습이 돋보인다.

이승엽은 일본 시절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감독들 때문에 여러 번 벤치와 2군을 들락거리며 마음고생을 해야했다. 감독이 선수를 신뢰하지 않으면 선수 입장에서는 조급해지고 그러다 더욱 페이스를 잃게 되는 악순환이 이어지기 쉽다.

하지만 이승엽이 불혹의 나이에도 삼성에서는 여전히 팀에 중요한 선수로 건재할 수 있는 건, 이승엽의 가치와 베테랑의 역할을 이해하는 류중일 감독의 배려 때문이다.

류중일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는 흔히 '믿음의 야구'로 유명하다. 한 번 믿음을 준 선수에게는 여간해서는 그 믿음을 거두지 않는다. 2011년 사령탑에 첫 데뷔한 류 감독이 당시 외국인 타자 라이언 가코를 두고 "나는 믿을 거야, 가코 믿을 거야"라고 말한 데서 유래된 '나믿가믿'은 이후 류 감독의 지도철학을 상징하는 유행어가 됐다.

류 감독은 지난해 이승엽이 부진으로 마음고생을 할 때도 공개적으로 비판을 하거나 스트레스를 준 일이 없었다. "이승엽은 베테랑이다. 스스로 알아서 할 줄 아는 선수"라는게 류감독의 한결같은 태도였다. 올해는 중심 타선에서 6번으로 타순을 조정하여 이승엽의 부담감을 덜어주고, 대신 오히려 하위 타선까지 강화하는 일거양득을 누렸다.

하지만 류중일 감독이라고 해서 특정선수만 편애하거나, 아니면 무조건적으로 선수를 믿기만한 것은 아니다. 그만한 실적과 검증을 거친 선수들만 류 감독의 믿음을 얻을수 있다. 류 감독은 이승엽이 풋풋하던 유망주 시절부터 최고의 선수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현장에서 함께 쭉 지켜본 인물이다.

류 감독은 이승엽의 야구에 대한 열정과 노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개인의 기량뿐아니라 매사 솔선수범하는 이승엽의 존재감이 후배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기에, 류 감독 역시 이승엽을 존중하는 것이다.

김성근 감독 '베테랑의 역할은 고비 때 빛을 발한다'

최근 메이저리그 도전을 접고 국내로 복귀한 임창용의 사례도 비슷하다. 아무래도 국내무대에서는 공백기가 있었던 데다 불혹을 바라보는 임창용의 첫 등판에 대한 일말의 우려라도 있을 법했지만, 류중일 감독은 대수롭지 않게 "임창용이 초짜인가?"라며 세간의 시각을 일축했다.

심지어 류중일 감독은 7년 만의 복귀전에서 1사만루의 위기 상황에 임창용을 등판시키는 배짱을 보였다. 임창용은 1.2이닝간 다섯 타자를 범타 처리했고 팀의 역전승으로 승리 투수에까지 이름을 올리며 류중일 감독의 기대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프로의 세계에서는 가끔 베테랑의 가치를 저평가하거나 홀대하는 지도자들도 분명히 있다. 기록상 활약이 예전보다 저조하거나, 혹은 젊은 선수들에게 더 기회를 줘야한다는 명목으로 베테랑을 희생양 삼는 경우가 많다.

만일 팀내에서 감독보다 더 영향력 있는 고참 선수나 프랜차이즈 스타의 존재는 감독 입장에서 다루기 부담스럽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는 십중팔구 감독과 선수가 갈등 관계로 치닫기 쉽다. 선수는 나이를 먹고 전성기가 다소 지났다고 한물간 선수로 취급하는 것이 야속하고, 감독은 감독대로 개인보다 전체 팀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원칙과 경쟁이라는 잣대를 적용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하지만 베테랑의 역할과 가치는 단지 눈에 보이는 성적만으로 모두 평가할 수 없다. 야신으로 유명한 김성근 고양 원더스 감독은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베테랑의 역할은 고비 때 빛을 발한다. 베테랑이 1년 내내 모든 경기에서 활약해주길 기대하면 안 된다. 1년에 승부처는 30게임 정도인데 그 고비를 넘겨내는 힘이 바로 베테랑의 경험에서 나온다. 단 한 경기라고 해도 팀을 위하여 중요한 순간에서 해준다면 1년치 연봉 값을 해내는 것이다. 그런 경험은 돈으로도 살 수 없다.'

김성근 감독은 지도자 생활 내내 고참 선수라고 특별 대우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연습과 경쟁의 기회는 서열과 상관없이 동등하게 적용했다. 다만 선수마다 분명하게 고유의 역할을 제시하고 상황에 맞게 중용했다. 매일 경기에 나오지 않아도, 매일 좋은 활약을 펼치지 못해도 중요한 순간에 베테랑 선수들만이 해줄 수 있는 역할이 있다는 것을 김성근 감독은 잘 알고 있었다.

삼성은 이승엽이 일본에 진출한 이후 꾸준히 세대교체를 추진해왔다. 2012년 이승엽이 국내 복귀를 선택했을 때에도 이미 전시즌 우승을 차지한 삼성 입장에서는 이승엽의 포지션이 전력보강상 반드시 필요한 자리는 아니었다.

만일 류중일 감독이 아니었다면 이승엽은 2년 전 삼성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승엽이 가세한 이후 삼성은 두 번의 우승을 더 차지했고, 그 과정에서 팀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어준 이승엽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었다. 삼성을 진정 강하게 만든 것은 세대교체를 바로 넘어선 '신구 조화'였다.

강팀이 되려면 젊은 선수들의 재능도 중요하지만, 풍부한 경험을 갖춘 베테랑들의 관록 또한 조화가 필요하다. 흘러간 세월에 자연스럽게 적응해가며 팀을 위하여 헌신할 줄 아는 베테랑과, 그런 베테랑의 가치를 존중해주는 지도자간의 끈끈한 신뢰는 우리가 흔히 과소평가하기 쉬운 세상의 선입견에 대하여 돌아보게 한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야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