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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본색'은 정치부 기자들이 쓰는 '取중眞담'으로 '새로운 정보'가 있는 기자 칼럼을 지향합니다. [편집자말]
3월 중순께 정치권 안팎에서는 흥미로운 소문이 나돌았다. 청와대에서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조작 사건을 수습할 방안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 수습방안으로는 청와대 유감 표명, 국정원장-법무부장관 대국민 사과, 일부 관련자 기소 등이 제시됐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남재준 국정원장 거취문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소문이긴 하지만 여권 안에서 '남재준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하는 일화다. '남재준의 힘'은 그동안 청와대가 이 사건에 어떻게 대응해왔는지를 돌아봐도 금방 증명된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 "아는 바 없고, 논평할 게 아니다"

국가정보원의 간첩 증거조작 사건과 관련해 여당 내부에서 조차 남재준 국정원장 사퇴촉구 목소리가 불거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12월 국회 국정원개혁특위에 출석한 남재준 국정원장.
▲ 사퇴 압박받는 남재준 국정원장 국가정보원의 간첩 증거조작 사건과 관련해 여당 내부에서 조차 남재준 국정원장 사퇴촉구 목소리가 불거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12월 국회 국정원개혁특위에 출석한 남재준 국정원장.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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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4일 주한 중국대사관이 법원에 "국정원과 검찰이 법원에 낸 중국 공문서 3건은 모두 위조됐다"라고 회신한 내용이 폭로됐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의 핵심 증거들이 모두 위조됐다는 것이다. 국정원과 검찰을 뒤흔드는 '폭탄급' 사안이었다. 하지만 국정원은 이를 부인했고, 청와대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증거 조작' 사실이 폭로된 지 3주가 지난 3월 7일 오전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기자들과 한 질의-응답에서 "우리가 논평할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 국정원 사건에 대해선?
"아는 바 없고, 우리가 논평할 것이 아니다."

- 청와대가 논평해야 하는 것 아닌가? (자살을 시도한 국정원 협력자가) 국정원을 개혁하라고 했고, 남재준 원장 체제에서 불거진 사건인데.
"이 사안 말고 전체적인 (국정원) 개혁 줄기에서 얘기해야 한다는 말인가?"

- 현 정부 일이니까.
"국정원에서 반응이 나오겠죠."

전형적인 '갈등회피형' 태도다. "아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직무유기이고, "우리가 논평할 게 아니다"라면 책임회피다.  

사흘 뒤에도 민경욱 대변인은 "국정원 관련해서 청와대 의견이 궁금하다는 분이 있는데 수사 중인 사안이므로 청와대에서는 일체 말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3월 10일). 그런데 같은 날 박근혜 대통령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오전 10시 집현실에서 열린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회의'에서였다.

"현재 재판이 진행중인 서울시 공무원의 국가보안법 위반혐의 사건과 관련 증거자료에 위조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일과 관련한 실체적 진실을 정확히, 조속히 밝혀서 더 이상 국민적 의혹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검찰은 이번 사건에서 한점 의혹도 남기지 않도록 철저히 수사하고 국정원은 검찰조사에 적극 협조해야 할 것입니다. 수사결과 문제가 드러나면 반드시 바로잡을 것입니다."

'철저한 수사'라는 원칙론을 언급한 것이지만 "수사결과 문제가 드러나면 반드시 바로잡을 것이다"라고 언급한 대목만은 눈길을 끈다. 증거조작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책임자를 문책하겠다는 발언으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청와대 고위인사 "아무 일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없어"

박 대통령이 문책론을 시사하는 발언을 내놓자 새누리당 안에서도 남재준 용퇴론이 확산됐다. "국정원장이 사퇴하는 것이 대통령의 유감표명에 상응하는 처사"(이재오 의원, 3월 10일), "자진사퇴하지 않고 이 문제가 수습될까요?"(김용태 의원, 3월 11일) 등 남재준 원장의 용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계속 침묵으로 대응했다. 청와대 안에서도 남재준 원장 경질론이 나오고 있다는 일부 언론보도와 관련, 민경욱 대변인은 지난 3월 12일 기자들과 한 질의-응답에서 "제가 아는 흐름과 다르기에 언급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청와대는 남재준 원장을 경질할 계획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이었다.

- 흐름과 다르다고?
"언급하지 않겠다."

- 흐름과 다르다는 것은 경질론이 확산되고 있지만 (남재준 원장을) 경질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거기에 대답하면 언급하는 것이 된다. 언급하지 않겠다."

그런데 같은 날 오후 청와대의 한 고위인사가 주목할 만한 발언을 내놓았다. 대통령이 두텁게 신임하는 이 인사는 "국정원의 특수성, 애로사항이 있지만 지금 드러난 게 사실이라면 문제가 있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드러난 사실로 보면,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 내용을 아무 일 없었던 것으로 할 수는 없다. 국정원도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어야 한다."

다만 이 인사는 "미국 등 다른 나라 정보기관을 보면 쉽게 (정보기관 책임자를) 문책하는 일이 많지 않다"라며 "우리나라 정보기관의 역사에 아름답지 못한 역사가 많긴 하지만 (정보기관의 특수성 때문에) 일방적으로 (문책)하기는 그렇다"라고 덧붙였다. 증거조작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남재준 원장을 바로 경질하기도 어렵다는 깊은 고민의 일단을 내비친 것이다.

최경환의 '책임소재' 발언, 남재준 퇴진론 재점화시키나? 

그런데 검찰수사를 통해 국정원 대공수사국에서 증거조작을 주도했다는 사실이 매우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증거를 조작하는 대가로 돈을 지급한 사실도 나왔다. '대공수사팀 과장-대공수사처장-대공수사단장-대공수사국장-2차장(서천호)-원장(남재준)'으로 이어지는 지휘라인에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김아무개 대공수사팀 과장과 국정원 협력자 김아무개씨만 구속기소됐다. 이로 인해 대형사건 때마다 등장했던 '꼬리자르기 의혹'이 다시 나온다. 청와대의 침묵도 여전하다. 

그런 가운데 친박 핵심인물인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어제(1일) 국회 교섭단체대표연설에서 '책임소재'를 언급했다. 최경환 원내대표는 "국정원의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증거조작 의혹은 가히 충격적이라며, 국정원의 신뢰는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국민의 생명과 안보를 위협하는 간첩,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합법적이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의 안보 기반을 흔들 뿐입니다. 이번 사건은 이를 여실히 증명합니다. (중략) 국정원의 신뢰 재건을 위해서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철저히 파헤치고 책임소재를 명확히 해서 재발 방지책을 세워야 합니다."

"책임소재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최경환 원내대표의 발언은 '문책론'으로 해석된다. 이것이 여권 내부의 '남재준 퇴진론'에 다시 불을 붙일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하지만 새누리당이 '국정원의 대북정보 능력과 대테러 대응능력 제고'라는 명분을 내세워 휴대폰 감청을 합법화하는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을 4월 임시국회에서 통과하려고 하는 대목에 이르면 최 원내대표가 제기한 '책임론'도 한낱 수사에 불과하다는 의심을 떨치기 어렵다.

이것은 단순한 증거조작 사건이 아니다. 외교문제로까지 비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법체제의 기반까지 위협한 사건이다. 검찰수사를 통해 국정원이 주도해 증거를 조작한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지 않았나. 그러니 20여 일 전 청와대 고위인사가 언급했던 것처럼 "아무 일 없었던 것으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남재준 원장을 그토록 신임한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미 훼손되어버린 '남재준 파워'를 이번에는 내려놓아야 한다.      


태그:#남재준, #박근혜,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조작 사건, #최경환, #새누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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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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