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는 1985년 1월 겨울방학 때부터 헌혈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고양시 고양초등학교 체육주임으로 근무 중이었다. 어느날 '헌혈이 모자라서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고 헌혈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적십자중앙혈액원(당시에는 마포에 있었음)으로 직접 찾아갔다.

처음 하는 헌혈에 약간의 공포 같은 게 있었나 보다. 헌혈대에 눕기까지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이렇게 첫 헌혈을 한 뒤 나는 매년 두 번씩 방학 때마다 꼭 헌혈을 하자고 마음먹었다. 당시 나는 경기도 북부인 파주·고양·김포 등에서 근무를 했는데, 출퇴근에 3시간 이상 걸려 헌혈을 자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부득이 경기도교육청에 출장을 가는 날, 수원 역전 헌혈의 집에서 헌혈을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1999년까지 헌혈을 겨우 10번밖에 못했다.

이후 드문드문 헌혈을 잊지않고 하는 정도였다. 내가 2006년 2월 현직에서 정년퇴임할 때까지 겨우 21번의 헌혈을 했을 뿐이었다. 정년퇴임을 하고 나서 '백수'가 된 나는 남은 일생 이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게 됐다. '지금까지 나는 나와 내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지만, 이제는 연금수급자가 됐으니 일단 생계에 위협을 받지는 않을 수 있으니 사회를 위해 봉사하자'는 각오를 다졌다.

그리하여 2006년 2월 말 퇴직을 하고 3월에 교육을 받아서 4월부터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2007년에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서 해설사로도 활동해 두 곳을 교대로 다니며 자원봉사 시간을 늘려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잊고 있었던 헌혈을 다시 시작하게 됐다.

"노인의 피는 피도 아니냐!"

2007년 4월 19일, 나는 블로그에 '한 시간 시간 여유가 생긴다면 무엇을 할까?'라는 글을 올리면서 가장 보람있는 일은 헌혈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나는 바로 그 다음날부터 헌혈을 시작했다. 그때가 22번째 헌혈이었다. 헌혈 30회를 채우겠다는 결심으로 다시 헌혈대에 올랐다(물론 이런 결심을 블로그와 <오마이뉴스>에도 기고했다, 관련 기사 : 헌혈 22회... 30회를 꼭 채우고 싶다).

이후 나는 헌혈의 방법을 바꿨다. 지금까지 2개월마다 한 번씩 할 수 있는 전혈 헌혈을 해왔는데, 15일에 한 번씩 할 수 있는 성분헌혈(혈장)을 택했다. 나는 좀 더 많이 헌혈을 하고 싶어 헌혈 목표 횟수를 50회로 늘려잡았다. 그러나 그건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31회 헌혈을 했을 때, '64세가 되면 더 이상 헌혈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만 64세가 되는 날은 2008년 2월 27일이었는데, 2월 28일에 갔더니 안 된다고 하지 않던가.

헌혈이 불가하다는 말에 "본인이 하겠다는데 왜 안 된다는 것이냐, 노인의 피는 피도 아니라는 말이냐, 피가 모자라서 수입에 의존한다면서 안 받을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따져 물었다. 나는 결국 이를 적십자 혈액원 누리집과 <오마이뉴스>에 올렸다(관련 기사 : 내 생애 마지막 헌혈, 아직 난 '팔팔'한데...). 이 무렵이면 고된 노동 등 사회적 활동이 줄어들 때이므로 되레 헌혈을 하기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이곳 저곳에서 몰래 헌혈했던 사연

50회 헌혈을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헌혈 금장을 준다는 증서
▲ 헌혈금장증 50회 헌혈을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헌혈 금장을 준다는 증서
ⓒ 김선태

관련사진보기


그리고 꼭 1년이 지난 다음에야 '64세에서 70세까지 헌혈 연령을 연장한다'(다만 60세 이상의 연령에서 헌혈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에 한 한다)는 조건이 붙은 답신이 이메일로 도착했다. 이 반가운 소식을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보냈다.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다른 분들에게도 기회가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관련 기사 : 70세까지 헌혈 가능케 규정 바뀌어). 이렇게 해서 나는 다시 헌혈을 할 수 있게 됐다. 그 이후로는 헌혈 목표를 50회로 늘려 매월 두 차례 헌혈을 계속했다.

그런데 매번 집으로 배달되는 헌혈결과통보서를 아내가 봐버렸다. 아내는 내가 다니던 광화문 헌혈의집에 전화를 걸어 엄포를 놨다.

"나이 60이 넘은 노친네에게 피를 뽑아서 어떡하자는 것이냐? 앞으로는 헌혈을 하러 오더라도 받지 말아라. 만약에 헌혈을 한 것이 확인이 되면 내가 쫓아가서 한바탕 휘저어 놓겠다."

이런 사정을 모르고 헌혈을 하러 갔더니 광화문 헌혈의 집은 아내의 이야기를 전해줬다. 하는 수 없이 그냥 돌아온 나는 한동안 내가 한 일이 정말 잘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경희대 입구에서 모임이 있어서 가다 보니 헌혈의 집이 눈에 들어왔다.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그곳에 들러 헌혈을 했다. 아내 몰래 헌혈을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 다음번에는 종로 헌혈의 집을 찾기도 했다.

헌혈로 목숨까지 구했습니다

복근의 상태를 알수 있는데
▲ 윗몸일으키기 복근의 상태를 알수 있는데
ⓒ 김선태

관련사진보기


그러다 헌혈 덕분에 목숨을 구한 일이 생겼다. 2010년 7월부터 나는 헬스센터에서 운동을 했는데, 운동을 너무 열심히 했나 보다. 헌혈을 하고 결과통지서를 받았는데, 간 효소수치(ALT) 수치가 124였다. 과도한 운동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받고 5개월동안 서너 번의 검진을 받아가며 운동량을 절반으로, 다시 반의 반으로 줄였다. 그제서야 간신히 정상(0~20)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관련 글 : 헌혈로 구한 목숨).

만약에 내가 헌혈을 하지 않았더라면, 무리해 운동을 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운동을 지속했다면 간이 망가질 정도로 큰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욕심 부려서 운동을 하다가 쓰러지는 경우를 내가 겪을 뻔했던 것이다. 내게 헌혈은 생명의 은인인 셈이다.

헌혈 50회 달성을 기념하여 금메달이 주어진다.
▲ 헌혈금장 메달 헌혈 50회 달성을 기념하여 금메달이 주어진다.
ⓒ 김선태

관련사진보기

이렇게 옮겨 다니면서 헌혈을 몇 번이나 한 뒤에 다시 광화문 헌혈의 집으로 옮겼다. 다른 곳에서 한 기록도 함께 옮겨졌다. 2011년 2월, 내가 목표로 했던 헌혈 50회를 달성했고 나는 이 기쁨을 블로그와 <오마이뉴스>에 알렸다(관련 기사 : 만 67세인 내가 드디어 50회 헌혈 달성).

이제 나는 헌혈 횟수 목표를 70회로 늘려잡고 꾸준히 헌혈을 계속했다. 이렇게 헌혈을 하는 동안 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봉사는 자신의 몸을 나눠주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됐다. 헌혈에 이어 '각막과 장기기증'을 약속했고, 지난해에는 '조직기증'까지 서약했다. 나는 내 사후 내 몸의 일부분을 떼어내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데 쓸 수 있도록 만들었다.

헌혈 연령이 조정된 덕분에 나는 내 인생의 헌혈 횟수를 75회로 잡았다. 지난 1월에 74회째 헌혈을 했고, 내가 만 70세가 되기 전날(2월 26일)에 마지막으로 75회째 헌혈을 하기 위해 헌혈대에 누울 계획이다. 나 자신이 이 세상에 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선물이자 인공으로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귀중한 생명줄인 '피'를 나눠주기 위해서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 기사 공모 <내 나이가 어때서> 응모작-



태그:#헌혈, #금장, #70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 한국아동문학회 상임고문 한글학회 정회원 노년유니온 위원장, 국가브랜드위원회 문화멘토, ***한겨레<주주통신원>,국가인권위원회 노인인권지킴이,꼼꼼한 서울씨 어르신커뮤니티 초대 대표, 전자출판디지털문학 대표, 파워블로거<맨발로 뒷걸음질 쳐온 인생>,문화유산해설사, 서울시인재뱅크 등록강사등으로 활발한 사화 활동 중임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