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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난, 두 아이의 엄마다. 며칠 후 둘째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다.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온 지난 20여 년 동안 아이들을 키우며 힘들 때마다 떠오르곤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 덕분에 부모로서 힘을 얻을 수 있어서 여간 큰 축복이 아니란 생각을 셀 수 없이 해왔다. 그 존재가 남이라 더 소중하게 여겨지곤 한다.

최근에는 천장을 보고 분만대에 누워 눈부신 불빛 아래 출산을 해야 하는 정신적인 고통 때문에 조산원을 선택하거나, 조산사를 집으로 불러 아이를 낳는 산모들이 늘고 있단다. 게다가 자연 분만 시 산도가 10cm 가량 열리면 회음부 일정 부분을 절개함으로써 출산이 원활해지도록 돕던 것과 달리 회음부 절개를 전혀 하지 않는 병원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요즘 산모들은 모유를 먹이지 않으면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자책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심지어는 최근 몇 년 새 산모들의 필수품이 되다시피 한 유축기로 모유를 짜 젖병에 담아 먹이는 것조차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 나머지 출산 후의 몸은 돌보지 않고 직수(직접 젖을 물리는)를 고집하는 엄마들도 많단다.

1990년대, 자연분만보다 제왕절개를 권장하던 시절

요즘의 이런 산모들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어처구니없는 상황. 그러니까 제왕절개가 바람직한 출산 방법으로 공공연하게 권장되고, 분유가 모유보다 아기 성장에 더 좋다고 권장되는 때가 있었다. 내가 두 아이를 낳던 1990년대가 그랬다.

모든 산부인과 의사들과 병원들이 다 그러지 않았지만, 그 때는 자연분만에 비해 몇 곱절의 출산비용이 드는 제왕절개를 많이 했다. '출산 시 그곳이 느슨해져 부부생활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제왕절개가 바람직하다고 권하는 의사들이 많았다. 자연분만을 고집하는 사람을 세상살이에 좀 둔감한 인간 취급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당시 자연분만을 고집했던 내가 제왕절개로 아기를 이미 낳은 주변사람들이나 친구들로부터 받은 느낌이 그랬다.

우리 부부의 금실을 위한 조언이라고 세세하게 설명하며 노골적으로 권하는 지인까지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생명에 관한 것은 가장 자연적인 것이 좋다는 주의였던 난 자연분만을 고집했다. 그런데 나도 그만 출산 직전까지 고집했던 자연분만을 못하고 제왕절개를 할 뻔했다. 그것도 더 이상 고통을 참지 못해 의사에게 내 스스로 먼저 요청해서 말이다.

새벽 4시 반쯤에 첫 진통을 느끼기 시작, 오전 11시 24분에 출산을 했다. 그러니 비교적 순조롭게 출산한 축에 속한다. 하지만 출산을 할 당시에는 몰랐다. 매우 순조롭고 빠른 출산이라는 것을 말이다.

규칙적인 진통을 느끼기 시작, 입원 수속 후 분만 대기실서 겪는 고통은 너무 엄청났다. 어떻게든지 출산의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는 굳은 각오는 이미 까마득하게 잊고 말았다. 어디가 아픈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부서지는 고통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어떻게든 겪어내야만 하는 고통도 고통이지만, '이렇게 진통이 길어지면서 아이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닌가?'하는 불안감도 컸다. 고통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면서도 '팔 하나 없이 태어나면 어쩌나?'와 같은 어리석은 불안감이 끊임없이 들고 들었다. 매우 어리석은 생각이란 것을 두 아이를 낳아 키우는 동안 비로소 알게 됐는데, 아마도 대부분의 산모들이 겪는 불안 중 하나인 것 같다. 이때의 불안을 이야기하면 출산을 한 엄마들 대부분 공감하고 웃는 것을 보면 말이다.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동안 해왔던 각오나 엄마로서의 숭고한 사명 그런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디가 딱히 아프지 않고 온몸이 부서지는 고통에 이런 불안이 겹쳐져 촉진제나 무통주사와 같은 약물의 도움을 받고서라도, 아니 수술을 해서라도 어서 출산을 끝내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출산 진행 상태를 진찰하러 온 의사에게 제발 통증을 줄여줄, 아기를 빨리 낳을 수 있는 주사 좀 놔달라고, 제발 수술해 달라고 애원, 또 애원했다. 새벽 6시부터 분만대기실에서 3시간 넘게 진통을 겪으며, 이미 남편과 친정엄마와 함께 의견을 모은 끝에 선택한 것이었다.

내가 출산을 하던 그 몇 달 전 연극배우 최정원씨가 수중분만을 해 화제가 되었었다. 통증이 훨씬 줄어든다는 분만 방법이었다. 진통 와중에 방송을 통해 본 수중분만 모습이 부럽도록 떠오르는 한편, 남들 다 하는 제왕절개를 선택하지 않았음이 그저 후회될 뿐. 그래서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   

3일된 신생아.
 3일된 신생아.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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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이 정도로 수술을 시켜달라고 해요" 싸늘했던 의사

"그런 마음 상태로 엄마가 될 생각을 했어요? 이제 시작에 불과한데, 앞으로 아기 키우면서 흘릴 눈물과 참아야 할 고통들이 얼마나 많은데, 겨우 이 정도로 수술을 시켜 달라고 해요. 얼마든지 낳을 수 있는데. 다른 산모들에 비해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데, 겨우 이정도 고통도 못 이겨 스스로 낳을 수 있는 출산의 축복을 포기를 하겠다는 겁니까?"

하지만 의사는 싸늘한 표정으로 이처럼 매몰차게 말했다. 고통을 겪는 산모에게 이처럼 말하다니! 솔직히 너무 야속했다. 자기가 뭔데 환자가 수술을 원하는데 못해주겠다는 건지 어이없었다. 그래서 도무지 참지 못할 정도로 아파 그러는 것이니 제발 수술 좀 시켜달라고 애원하고 애원했다. 의사의 태도가 얼마나 매몰 차고 확고한지 옆에 있던 친정 엄마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의사는 우리의 제의는 이미 까맣게 잊은 듯, 30분 간격으로 오가며 출산 진행 상태를 체크했고, 우리는 두 번 다시 말도 꺼내지 못한 채 고통을 참으며 출산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시간 반쯤 지난 11시 24분에 출산을 했다.

얼마나 순조롭게 출산을 했는지, 아기를 낳는 순간 시계 바늘이 24분에서 25분으로 넘어가는 것도 봤고, 출산 후 나온 태반도 봤다. 아기를 씻기는 모습이나, 배냇저고리를 입히던 모습까지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을 정도로 순조로운 출산이었다.

"건강한 아들입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것 보세요. 조금만 참으면 이렇게 쉽게 낳을 수 있잖아요. 첫 출산 치고 정말 빨리 낳은 경우입니다. 처음 낳는 거라 많이 힘들었지요. 작은 산모가 아기도 야무지게 잘 낳아 아기도 잘 키울 것 같습니다. 아기 잘 키우세요. 6월에 태어나는 아기들은 여름이 시작되는 태양을 듬뿍 받고 태어나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매우 총명하고 건강하다고 합니다. 아기 키우려면 힘들 때가 많을 겁니다. 그러나 아기 때문에 행복할 때가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겁니다."

분만대기실서 그토록 냉정했던 할아버지 의사는, 친정아버지처럼 밝게 웃으며 출산을 축하해줬다. 그리고 이런 덕담과 격려를 해줬다. 의사의 격려와 칭찬에 몇 시간 동안 참고 참아야만 했던 출산의 고통과 불안으로 인한 서러운 눈물이 왈칵 솟았다. 그런데 감동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환자와 의사로 만났을 뿐인데... 고마운 인연

큰 교통사고와 화재로 유산을 한 후 1년쯤 되었을 때 들어선 아기인지라 출산 당시 형편이 어려웠다. 그래서 친정 가까이에 있는 전북 전주의 모 산부인과에서 출산을 한 후 친정에서 몸조리를 했다. 아기를 낳았던 6월 13일은 모내기를 막 끝낸 직후인 데다가, 과수원일(당시 친정은 복숭아 과수원을 했다)도 많지 않을 때였다.

교통사고 후유증이 조금 남아 있던 와중에 아이를 가졌고 출산을 해서, 친정 부모님과 남편은 2~3일 더 병원에 입원해 몸에 좋은 영양 주사를 맞으며 몸을 추스르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했다. 이런 우리의 뜻을 먼저 거부해 버린 것은 이번에도 의사.

3일된 신생아
 3일된 신생아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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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모도 아기도 모두 건강한데 뭐 하러 돈 들이며 입원을 하려고 하세요. 퇴원해도 되니 오전 중에 입원수속을 해 퇴원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기를 낳은 날 오후 진료를 온 의사는 하루 더 입원하겠다는 우리에게 이처럼 딱 잘라 말하며 퇴원을 권했다. "그럼 영양제라도 맞고 나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친정엄마의 말에 "산모가 건강하니 맞을 필요가 없다"며 단호하게 퇴원을 권했다. 아니 명령에 가까웠다.

이미 분만 과정에서 의사의 단호함을 겪었던 터라, 우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출산 다음날 오전 일찍 퇴원을 했다. 그날 나온 출산 비용은 5만900원. 정말 터무니없이 싼, 상상조차 못했던 병원비였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당시 출산한 주변의 이야기를 좀 덧붙이면. 친구 하나가 은평구 연신내에 있는 모 종합병원에서 나보다 15개월 전에 출산을 했다. 축하하러 간 내게 친구의 시어머니가 "10cm까지 열려 아기 머리가 새까맣게 보이는데도 제왕절개를 해 분통하다"며 병원을 욕했다. 당시 친구가 지불한 출산 비용은 150만 원 정도로 기억한다.

그리고 아기를 낳으러 친정에 가보니 한 동네에 사는 사촌언니가 20여 일 전에 출산을 한 상태였다. 내가 출산한 산부인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전주의 모 대학병원에서. 그 언니는 나처럼 자연분만을 했다.

그러나 살던 지역의 대학병원서 상당한 비용을 들여 산전 종합 검진을 했고 임신 중 아무런 이상이 없었음에도 출산한 대학병원에서 다시 종합검진을 했다고 했다. 당시로선 매우 큰 돈이라고 할 수 있는(내 기억이 맞다면 당시 공업사나 작은 업체에 근무하는 가장들의 월급이 50만 원 내외였다) 12만 원을 들여서 말이다.

언니의 말에 나도 처음부터 산모 종합검진을 해야 하나 싶어 주머니 사정이 부담됐다. 그러나 출산예정일 일 주일 가량을 앞두고 찾은 이 병원에선 사촌 언니가 했다는 종합검진 자체를 요구하지 않았다. 당시 제왕절개와 함께 붐이 일기 시작한 초음파 검사조차 권하지 산모 수첩을 참고한 내진으로 산전 진찰을 끝냈다. 당시 3천 원의 진찰료를 낸 것 같다.

내가 첫 출산을 할 때만 해도 제왕절개로 첫째를 낳게 되면 둘째도 제왕절개를 해야만 했다. 그런데 출산 3년 후쯤, 임산부들 사이에 첫째를 제왕절개 했으나 둘째를 자연 분만할 수 있는 병원을 찾아다니는 임산부들이 많았다. 요즘에는 이걸 '브이(V)백'이라 부르고, 성공률도 높다는데, 당시 10cm나 열렸음에도 얼떨결에 수술을 해야만 했던 내 친구와 친정 동생도 브이백이 가능한 병원을 수소문해 출산했지만 결국 수술을 하고 말았다.

돈벌이가 좋은 제왕절개가 보편적이던 그 때. 우리의 요청을 받아들여 수술을 했다면 나 역시 내 친구나 동생처럼 후회를 하며 두 번 수술 하지 않으려고 둘째는 자연분만을 하고 싶어 병원을 찾아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 둘처럼 수술을 해야만 했을지도 모르리.

그러니 내게 여간 고마운 분이 아닌 것이다. 환자와 의사로 만났을 뿐인데 돈벌이를 우선하지 않고 귀한 아들을 얻게 해준 그 의사 선생님 덕분에 둘째 역시 자연분만으로 무난하게 출산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 의사선생님의 꾸짖음 덕분에 비로소 부모의 마음이 갖춰졌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두 아이가 건강한 성년으로 자랐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음 그 어느 정도는 그 의사 선생님 덕분이란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아이들 때문에 힘들 때 떠올리곤 했던 의사 생님의 부모로서의 마음준비 부족에 대한 꾸짖음과 격려가 힘이 되었고, 아이들에게 부모의 잣대에 불과한 기대를 하지 않도록 반성하거나 돌아보도록 하곤 했기 때문이다. 여하간 그 의사선생님은 출산, 그 소중함과 함께 가장 많이 생각나곤 하는 아름답고 소중한 인연이다.

덧붙이는 글 | 출산, 그 아름다운 이야기



태그:#출산, #제왕절개, #산부인과, #의사, #자연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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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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