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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한 번 가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아내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둘째 복동이(태명) 때문이었다. 복동이는 출산일이 그 달 중순께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녀석은 하순 무렵이 될 때까지 기척도 보이지 않았다. 아내가 몸을 풀기 위해 광주 처가에 간 것은 거의 한 달 전쯤이었다. 무작정 진통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일 마치고 곧장 출발할게. 내일 토요일이니까 병원에 가 봅시다."

아내는 계속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조금 지나서야 내려올 때 운전 조심하라는 얘기를 했다. 그 사이에 살짝 한숨을 내쉬었을까. 마음이 불안했다.

첫째 난 지 4년 만에 갖는 둘째였다. 그 사이에 우리 부부는 다 큰 아이를 유산했다. 거의 8개월째에 든 아들이었다. 태명은 오공이. 꿈에 손오공을 봐서 지은 이름이었다. 첫째가 딸이어서 우리 부부는 내심 기대가 컸다. 재주 많고 씩씩하며 용감한 아들이 나기를 바랐다. 그런 기대를 잔뜩 받으며 오공이는 제 엄마 배 속에서 무럭무럭 자랐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산부인과를 찾았다. 정기 검진이 있는 날이었다. 나는 딸과 함께 병원 복도에서 아내를 기다렸다. 아내는 한참이 지나서야 담당 과장실에서 나왔다. 얼굴이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여보, 무슨 일이야?"
"오빠, 오공이가···."

아내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펑펑 울음을 쏟아냈다. 아내를 부축하며 따라 나온 간호사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었다. 오공이가 움직임이 전혀 없어 정밀 검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며칠 전까지 엄마 뱃속에서 잘 놀던 아이였다. 그런데 움직임이 없다니.

간호사는 일단 검사를 받아 봐야 확실한 결과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었지만 으레 그렇게 말해 주는 듯한 투였다. 아내는 이미 간호사의 부축을 받으며 검사실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휘청거리며 걷는 아내의 뒷모습을 망연히 지켜보았다.

오공이는 결국 싸늘한 몸으로 세상에 나왔다. 거의 다 자랐을 때라 여느 아기들 태어날 때와 똑같은 과정을 거쳤다. '머리카락도 시커맸는데···' 오공이와 떨어져 회복실로 들어선 아내는 꺽꺽 울음을 토해내며 말을 잇지 못했다. 다섯 살 먹은 큰딸이 그런 제 엄마 등을 하염없이 두드려 주었다.

복동이는 그 슬픔의 끝자락에서 생긴 아이였다. 그야말로 '복(福)둥이'였다. 복동이는 태몽도 참 좋았다. 꿈 속의 어느 과수원. 나는 친한 친구 갑식이(가명)와 과수원을 걸었다. 친구 갑식이는 아이가 생기지 않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혼한 지 1년이 지나갈 즈음이었다. 갑식이는 남성 병원에 가 볼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었다.

어느 순간, 우리는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생긴 거대한 복분자 나무 덩굴에 이르렀다. 그 앞에는 덩굴 꼭대기까지 가 닿아 있는 커다란 사다리가 서 있었다. 우리는 말 없이 함께 사다리를 올랐다. 덩굴에는 탐스럽기 그지 없는 복분자 열매 송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나는 갑식이에게 먼저 복분자 송이를 따라고 말했다. 그러나 갑식이는 가타부타 대꾸가 없었다. 반대편에서는 누군가가 연신 커다란 복분자 송이를 따고 있었다. 그에게 복분자를 모두 빼앗길 것 같았다. 맨 꼭대기 쪽을 향해 사다리를 올랐다. 그곳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크기의 복분자 송이가 달려 있었다. 주저하지 않고 따 가슴에 품었다.

5월 23일, 아침을 서둘러 챙겨 먹고 아내와 함께 길을 나섰다. 병원에 가기 위해서였다. 그 전날, 나는 광주로 내려오는 길 내내 오공이가 떠올랐다. 몇 주 전에 아내가 병원 계단에서 구른 일도 생각났다. 진료를 마치고 1층 현관으로 내려서는 야트막한 계단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다행히 발을 헛디던 지점은 층계가 서너 개밖에 남아 있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모른다. 빈혈 수치가 높게 나와 힘들어하던 아내의 모습도 떨쳐지지 않았다.

나는 이런저런 불안감을 잔뜩 안은 채 차에 올랐다. 시동을 켰다. 출발한 지 5분이나 되었을까. 라디오에서 긴급 뉴스 한 토막이 전해졌다.

"긴급 속보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투신', '자살', '병원 입원' 등의 말이 어지럽게 오갔다. 얼마 전까지 동네 주민들과 막걸리 잔을 기울이던 그가 아닌가. 밀짚모자를 쓴 채 손녀를 자전거에 태우고 가는 '노짱'의 모습은 얼마나 흐뭇했던가. 나는 우리나라도 신동엽이 <산문시 1>에서 그린, 딸과 함께 백화점에 칫솔 사러 나온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을 갖게 되었다며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자살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두방망이질하는 가슴을 억누를 수 없었다.

지금도 나는 속보를 들은 뒤부터의 상황이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는다. 병원에 도착해 맨 먼저 무엇을 했는지, 복동이가 무사하다는 말을 들었는지 어쨌는지가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둘째가 몇 시에 태어났어?"

이 글을 쓰기 전에 아내에게 넌지시 물었다. 복동이가 난 게 저녁 무렵이었는지 늦은 오후였는지 확실치가 않아서였다.

"아들이 언제 태어났는지도 몰라요?"

쏘아대며 방으로 들어간 아내가 수첩 하나를 꺼내왔다. 오후 4시 25분이었다. 수첩을 보자 그때 기억이 조금 되살아났다. 나는 진통이 시작된 아내 곁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손으로 아내 배를 쓸어주고 있었으나, 그것은 마치 기계의 움직임 같았다. 아내는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노짱 때문에 그러지요?"
"아니야. 차라리 편한 곳으로 잘 가셨지. 모질고 무지막지한 이들이 얼마나 많은 곳이야."

내 말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성의 없는 내 마사지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일고여덟 시간여만에 복동이를 낳았다. 진통이 15시간이나 이어진 첫째 때와는 영 딴판이었다. 복동이는 머리카락도 새카맣고 눈썹도 짙었다. 기뻤다. 불안했던 긴 여정 끝에 낳은 둘째였지 않은가. 정말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또 슬펐다. 노짱이 끝까지 행복한 '석양 대통령'으로 생을 보내기를 바랐다. 밀짚 모자를 쓴 채 논두렁에서 동네 사람들과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손녀를 자전거에 태워 강둑길을 한가로이 달리기를 원했다. 그렇게 소박하게 살아가고 싶어했던 노짱이 아니었던가.

나는 아내와 장모님을 피해 병원 밖으로 나왔다. 한동안 입에 대지 않던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하늘로 오르는 담배 연기를 보았다. 문득 하늘로 오르던 노짱이 우리 둘째 복동이를 지상으로 내려보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난데없이 우리 둘째를 노짱이 이 지상에 내려보낸 선물로 여기게 되었다.

다다음 날 아침, 광주 금남로 옛 도청 광장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았다. 오월 말의 뜨거운 햇살이 30여년 전의 그날처럼 처연하게 내리비치고 있었다. 광장으로 통하는 길은 통제되고 있었다. 수많은 조문 인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멀찌감치서 차를 세운 나는 천천히 광장을 향해 걸었다. 분향소가 점점 눈앞으로 다가왔다. 활짝 웃고 있는 노짱의 얼굴이 보였다. 땀이 흐르는 뜨거운 내 뺨 위로 눈물 한 줄기가 소리없이 떨어졌다.

덧붙이는 글 | '출산, 그 아름다운 이야기' 공모



태그:#출산, #둘째 복동이, #노무현 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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