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수정 : 26일 오후 9시 25분]

갑자기 추워진 날씨가 다소 풀린 주말. 어제(24일) 김장을 마친 홀가분함으로 독립영화관을 찾았다. 이곳은 일반 극장가에 특별히 볼만한 영화가 없을 때 발길을 돌려 자주 찾는 곳이다. 깨끗한 시설과 조용한 분위기도 좋지만 소문나지 않은, 뜻밖의 좋은 영화를 만나게 되는 행운이 따르기도 하는 곳이다.

오후 3시경에 찾은 영화관은 전에 없이 붐볐다. 상영시간이 20여 분이나 남았는데도 맨 앞줄의 겨우 몇 석이 남았을 뿐이었다. 단체 관람을 온 듯 무리지어 있는 사람들을 보고 혹시 우리만 모르는 유명한 영화인지 살펴봤지만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떤 시선>(차세대 한국영화 대표감독3인의 신작)이라는 옴니버스 영화였다. 소문난 영화도 아닌데 이처럼 관객이 많은 것은 뭔가 이유가 있겠지 싶은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영화 포스터

영화 포스터 ⓒ 영화사 진진


이 영화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획·제작한 인권 영화였다. 그동안 인권위는 주변의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크고 작은 인권 문제를 조명하는 영화를 제작해왔는데, 이번 <어떤 시선>은 열 번째로 제작된 영화라고 한다.

<어떤시선>은 세 편의 단편영화로 구성되어 있다. 장애와 가난을 소재로 한 <두한에게>, 노인 문제를 코믹하게 다룬 <봉구는 배달 중>, 그리고 양심적 병역거부를 전면에 내세운 <얼음강>. 세 번째 영화 <얼음강>을 보고서야 오늘 이 극장이 전에 없이 붐빈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자매님", "형제"로 부르며 아까 줄 서있던 그 젊은이들이 생각났다.

민용근 감독의 <얼음강>은 양심적 병역거부를 정면에서 다뤘다. 이런 소재의 영화로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이 민감한 소재를 인권의 문제로 다가간 감독의 시선은 신선했다.

아들의 신념은 존중하지만 감옥에 가는 것은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는 엄마. 남편에 이어 이미 자식 둘을 감옥에 보냈고 이제 남은 막내마저 감옥에 보낼 수 없어 가족과 별거까지 감수하는 애타는 엄마의 절절한 마음이 묻어났다.

논산 훈련소에서 돌아오며... 원망스러웠다

 얼음강 영화 스틸컷

얼음강 영화 스틸컷 ⓒ 영화사 진진


몇 년 전 '신념에 의한 병역거부'와 '대체복무' 문제가 공론화되었다. 그후 2007년 정부는 종교적 신념에 따른 병역 거부자들에 대해서 2년 후부터 대체복무를 허용할 방침이라고 발표하였다. 장소는 소록도의 한센병원이나 결핵원등이 고려되었고 복무기간은 현역병의 2배 정도로 정해졌었다. 하지만 지난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사실 일본 강점기 시절에도 여호와의 증인들은 일본의 징병에 응하지 않았다. 반전 사상을 퍼뜨린다고 해서 해방될 때까지 옥살이를 하고 그중 일부는 옥사를 했다. 또 인민군에 징집된 안식교 교인들이 집총을 거부했던 일까지, 신념에 의한 병역 거부는 그 역사가 깊다. 최근에는 꼭 특정 종교인뿐만 아니라 양심에 의한 병역 거부 등 그 양상이 다양해졌다고 한다.

하나의 여린 생명을 뱃속에 보듬고 낳아서 기른 어미 된 자라면 목숨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나 역시 그렇기 때문에 아들을 키우면서 장난감 총은 사주지 않았다. 생명을 살상하는 도구는 비록 장난감일 망정 접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역시 아들의 영장을 받았고, 이 땅의 모든 부모들처럼 아들을 논산 훈련소에 남겨두고 돌아오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왜 우리 세대에서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내 아들 세대에까지 한창 나이에 이런 식의 의무를 지우는가 싶어 원망스러웠다. 그놈의 '특수한 현실적 안보상황'은 왜 이리도 오래 지속되는가 말이다.

그리고 지금도 "아침에 입대해서 그날 저녁에 제대" 했다는 재주 좋은 모 정치인이 티비에 나올 때마다 그 뻔뻔한 얼굴을 보면 속이 뒤집힌다. 지난 정권부터 유독, 고위 공직자 물망에 오르는 자들은 한결같이 본인은 물론 자식까지 제대로 국방의 의무를 마친 자가 드물어 기가 막힌다.

병역 마치고 만기 제대하는 사람은 무능한 부모를 둔 2등 국민인 것 같은 위화감마저 생긴다. 그 '신의 아들'들은 어찌 그리 군 입대 신검만 받으려면 딱 그 때만 어디 연골이나 시력 등에 이상이 생기고 들어보지도 못한 희귀한 질환이 도지는지 참으로 신기한 노릇이다.

해빙의 날은 언제쯤 올까

 얼음강 영화 스틸 컷

얼음강 영화 스틸 컷 ⓒ 영화사 진진


2011년 병무청이 벌인 국민 설문조사에서 고위공직자 자녀 등의 병역이 불공정하다는 의견은 75.8%에 이르렀다. 병역 의무가 공정하게 이행되고 있는지에 대한 체감도는 64.9점(100점 만점)에 불과했다.

'양심에 의한 병역 거부자'는 그들과는 다른 경우라고 생각한다. 병역을 면제 받아 그 시간에 제 또래들보다 2년 여의 시간을 벌겠다는 것이거나 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더 힘든 조건, 더 긴 시간일지라도 죄다 감수하고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행동을 안 하려는 것이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감옥을 택할 수밖에 없는 젊은이들. 그러나 문제는 단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전과자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면서 직업 선택에 있어서도 크나큰 제약이 따른다. 이 사회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길이 막힌다는 의미다. 

여론조사기관 한국갤럽은 지난 4일부터 7일까지 전국의 성인 남녀 1211명을 대상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물은 결과 76%가 '이해할 수 없다'고 답했다고 19일 밝혔다. '이해할 수 있다'는 응답은 21%에 불과했다. 반면 '양심적 병역 거부자'를 징역형에 처하는 대신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하는 안에 대해서는 68%가 찬성했다. 반대 의견은 26%에 그쳤다.

전 세계 양심적 병역 거부로 인해 수감된 자 중의 90% 이상이 한국인이며, 매년 700명 이상의 청년이 군대 대신 감옥으로 향하고 있다. "이 나라에서는 군대 아니면 감옥 밖에 없다"는 영화 속 엄마의 절규처럼, 선택권을 박탈당한 젊은이들에게 사회는 꽁꽁 언 얼음강처럼 완고하다.

이제 우리 사회도 그런 정도의 관용이나 배려를 할 정도는 성숙하지 않았나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얼음강도 그 얼음 아래로는 물이 유유히 흐르듯이 말이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오며 삼삼오오 극장 밖을 나서는 아까 그 젊은이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착잡한 마음이었다. 얼마 전 자식을 외국에 유학 아닌 유학을 보낸 선배가 생각났다. 그들의 생이별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기를 빌었다.

우리에게 해빙의 날은 언제쯤 올까? 아니, 더 이상 이런 식의 병역 의무가 필요 없을 통일은 언제쯤 맞이하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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