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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두더지>의 한 장면

영화 <두더지>의 한 장면 ⓒ (주)수키픽쳐스


소노 시온의 영화 <두더지>는 <이나중 탁구부> 등의 작품으로 국내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후루야 미노루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다.

각색 과정에서 원작의 캐릭터와 플롯을 상당 부분 취하였지만, 영화는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의 일본사회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원작과의 차이를 결정적으로 드러낸다. 대다수의 일본인들에게 깊은 상흔을 남긴 동일본대지진·후쿠시마 원전 사태는 <두더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정서를 관통하고 있으며 아직 애티를 벗어나지 못한 소년 스미다(소메타니 쇼타 분)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근원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10대 소년 스미다는 허름한 보트 대여점을 운영하는 어머니와 함께 산다. 아직 부모의 보호 아래 자랄 법한 나이지만, 그의 부모는 정상적인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거부한 채 스미다를 방관하는 편에 가깝다. 어머니는 낯선 남자를 집으로 끌어들이다 급기야 스미다를 버려둔 채 집을 떠나는데, 그런 속사정을 모르는 아버지는 때때로 집을 찾아와 돈을 내놓으라며 스미다를 폭행하기 일쑤다.

이렇듯 부모에 의지할 길 없는 스미다의 곁으로 부모와 엇비슷한 또래의 어른들이 하나 둘 찾아온다. 그들은 대지진의 여파로 인해 가족과 집, 사업체를 고스란히 잃은 이들로서 언제부턴가 보트 대여점 앞마당에 허름한 텐트촌을 차리고 살기 시작한다. 스미다의 고립된 세계 안으로 스며든 또 다른 인물은 그와 같은 학교를 다니는 차자와(니카이도 후미 분)라는 소녀다. 학교 내 부적응자에 속하는 스미다의 범상치 않은 풍모에 끌린 그는 스미다의 언행에 깊은 관심을 드러내며 흠모에 가까운 감정을 드러낸다.

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의 행태에 일찌감치 환멸을 느낀 스미다는 스스로 '쓰레기'에 가까운 존재로 규정한 어른들의 삶을 따르지 않겠다는 신념을 숨기지 않는다. 이는 학교선생의 훈시에 대한 반감으로도 드러난다. 대지진의 여파로 좌절에 빠진 일본 사회가 언젠가 반드시 고난을 극복하고 다시금 도약할 수 있게 되리라는 교사의 격정적인 가르침은 지극히 염세적인 스미다의 비웃음을 살 뿐이다. 길지 않은 삶을 산 이 소년에게 있어 희망이라는 긍정적 가치는 공교육 내에서나 박제화된 배부른 관념에 불과해 보인다.

 영화 <두더지>의 한 장면

영화 <두더지>의 한 장면 ⓒ (주)수키픽쳐스


보트 대여점에 모여든 어른들은 어찌된 일인지 어린 소년에 불과한 스미다를 떠받들며 그의 언행에 귀를 기울인다. 아버지가 진 막대한 빚을 갚아야 할 처지로 내몰린 스미다를 돕고자 강도질을 자행하여 돈을 구한 요루노(와타나베 테츠 분)의 행동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다. 영화에 등장하는 어른들의 이기적이고 미숙한 일면은 스미다·차자와의 생물학적 나이와 대비되어 한층 더 노골적으로 그려지는데, 이러한 어른들의 가치관은 스미다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로 인해 각기 이질적인 면을 드러내고 있다.

요루노를 비롯한 보트 대여점의 어른들은 대지진과 함께 자신들의 삶이 매몰돼 버렸음을 확신한다. 이는 곧 자신들이 현재가 아닌 과거에 속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태도와 매한가지라 할 수 있다. 물에 잠긴 마을의 수면 위로 어슴푸레 떠오른 옛집의 지붕을 바라보며 회한에 젖은 중년남자는 자신의 삶이 2011년 3월 11일을 기점으로 끝나버렸음을 의심치 않는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 스미다란 소년은 자신들의 희망이자, 나아가 일본사회의 미래에 다름 아니다. 그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어른으로 살고자 하는 이 소년을 향한 동경어린 시선에서는, 현재의 일본사회가 다시는 일상적이고 평온한 시간으로 회귀할 수 없음을 시사하는 지독히 절망적인 함의마저 느껴진다.

스미다에 대한 태도에서 이들과 상반된 모습을 보이는 인물은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다. 아버지로서의 일말의 책임감이나 애정조차 지니고 있지 못한 그는 스미다에게 갖은 폭언과 폭행을 일삼는가 하면,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바란다는 말을 주저함 없이 늘어놓기 일쑤다. 구렁텅이 같은 삶의 계보가 자신의 대에서 끊어지기를 바라는 못난 아버지의 바람과, 부친살해의 끔찍한 유혹에 시달리는 아들의 고뇌. 서로를 향한 부자지간의 증오와 갈등은 혈연을 매개로 한 전통적 친족관계의 종언을 고한다.

스미다를 품으려는 요루노와, 그를 버리려는 아버지.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현생에 관한 희망을 일찌감치 접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으며 소노 시온 감독이 규정한 일본 기성계층의 유형에 걸맞다고 할 수 있겠지만, 스미다로 대변되는 후대-미래에 관한 관점에서는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한치 앞의 미래도 섣불리 낙관할 수 없이 절망적인 폐허 가운데서 살아가는 스미다, 그러한 그를 지탱하거나 끌어내리려는 과거의 망령들. <두더지>에서 그려진 신경쇠약 직전의 일본 사회는 이렇듯 힘겨운 줄다리기를 이어가며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오늘을 살아간다.

두더지 소노 시온 이나중 탁구부 일본 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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