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할머니와 할아버지, 제주도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 제주도에서
ⓒ 곽진성

관련사진보기


1945년 8월 15일 낮,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았다. 라디오를 통해 들려온 일왕의 항복 소식에 모두가 기쁨에 들떴다. 당시 충남 강경의 한 상업회사에서 출납계에 근무하던 외할머니(아래 할머니)에게도 해방은 가슴을 뛰게 만드는 일이었다. 내 나라, 내 땅에서 마음껏 기를 펼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감을 느꼈다.

한반도를 희망으로 물들인 광복 소식은, 우리 민중에게 꿈에 도전할 용기를 주는 근원이 됐다. 우리 할머니에게는 분명 그랬다. 우리 할머니의 꿈은 우편국 직원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치하에서 먹고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꿈을 놓았다. 한 상업회사에 취업해 꿈을 잊고 살았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우리 외할머니
 내가 가장 존경하는 우리 외할머니
ⓒ 곽진성

관련사진보기

그런 할머니가 광복날 오후 자신의 오랜 꿈을 떠올렸다. 내 나라를 찾은 날, 할머니는 자신의 오랜 꿈에 도전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오후 4시, 할머니는 긴장된 모습으로 회사 부지배인실로 찾아갔다. 입은 바짝바짝 말랐다. 여러 걱정이 스쳤다.

'부지배인을 설득해 추천서를 받을 수 있을까? 괜히 미움만 사서 쫓겨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꿈을 가진 이는 때론 과감한 용기를 낸다. 할머니는 부지배인 앞에서 자신의 꿈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우편국에 가고 싶어요. 추천서를 써주세요"라고 말을 꺼냈다.

평소 고분고분했던 직원의 당돌한 행동에 부지배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금방이라도 불호령이 떨어질 기세였다. 부지배인과 마주한 시간이 천년만년 길게 느껴졌다. 할머니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할머니, 나이팅게일을 꿈꾸다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8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 할머니의 성함은 이원길. 부여의 한 화목한 가정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하지만 화목함도 잠시, 증조할아버지(할머니의 아버지)가 소에 부딪쳐 돌아가시는 비극이 발생한다.

졸지에 남편을 잃은 증조할머니. 장례가 끝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증조할머니의 가족들은 "험난한 시대에 여자 혼자 자식을 데리고 살 수 없다"며 딸을 외가에 두고 재혼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증조할머니는 딸(할머니)을 '부모 없는 아이'로 만들 생각이 없었다. 딸과 함께 살길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셨다. 홀로 한산모시 장사를 하는 등 억척같이 생활력을 발휘하셨다. 할머니는 당시 증조할머니의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해줬다.

"어머니(증조할머니)가 일제의 허락을 받지 않고 장사(한산모시 장사)를 해, 한번은 일제 순경에 끌려갈 뻔한 상황에 놓이기도 했지. 기지를 발휘해 감옥에 갇히는 일은 면하셨지만 이후 어머니는 가족들 손에 이끌려 재혼자리를 찾아야 했지. 다행히 자녀가 있는 사실을 너그럽게 이해한 양아버지(양증조할아버지)를 만나 강경에 새 터전을 잡으셨어."

증조할머니 사진, 할머니는 증조할머니 사진이 하나도 없다며 속상하 하셨는데, 내가 인터뷰를 위해 앨범을 뒤적이다가 찾아냈다. 증조할머니 사진을 보여드리니 할머니가 어디서 찾았냐며 무척 좋아하셨다.
 증조할머니 사진, 할머니는 증조할머니 사진이 하나도 없다며 속상하 하셨는데, 내가 인터뷰를 위해 앨범을 뒤적이다가 찾아냈다. 증조할머니 사진을 보여드리니 할머니가 어디서 찾았냐며 무척 좋아하셨다.
ⓒ 곽진성

관련사진보기


증조할머니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충청남도 강경에 새 터전을 잡았다. 할머니가 거주하는 강경 남교동 집 앞에는 큰 양조장이 있었다. 유년시절 할머니는 그 곳에서 술을 빚는 노인의 심부름을 도와 간간이 맛있는 음식을 얻었다. 하지만 배고파도 그 자리에서 음식을 혼자 먹지 않았다. 남겨두었다가 부모님께 갖다 드리곤 했다. 효심이 남달랐다. 할머니는 효심만큼 꿈도 특별했다. 유년 시절, 할머니는 나이팅게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유년 시절에 책에서 나이팅게일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어. 여성으로서 참 의미있게 사는 사람 같아서, 나도 그런 간호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어."

하지만 할머니는 한 번 일제 병원을 다녀온 후, 간호사의 꿈을 일찌감치 포기하셨다고 한다. 소독약 냄새가 너무 독해서였다. 이상하게 그 냄새가 싫었다고 한다. 왜였을까. 할머니는 일제시대를 "암울하고 감시받는 시대"라 기억한다. 어쩌면 할머니가 꿈을 포기할 만큼 역하다 한 그것은, 시대의 음울한 냄새는 아니었을까.

일본 부부에게 양녀 제안 받았지만.... 

우리 할머니(왼쪽에서 네번째), 1960~70년대에 친구분들과 찍은 사진
 우리 할머니(왼쪽에서 네번째), 1960~70년대에 친구분들과 찍은 사진
ⓒ 곽진성

관련사진보기


할머니는 학교에 다니고 싶어했다. 하지만 빠듯한 살림에 학교에 다니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양아버지(양증조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여동생을 학교에 입학시켰다. 할머니는 그때 처음으로, "내가 양아버지 친자식이 아니기 때문에"라는 서운함을 느꼈다고 한다. 그 마음을 눈치 챈 증조할머니는 딸의 손을 붙잡고 간이 학교 면접을 보게 했다.

증조할머니는 딸의 소망인 학교를 보내고 싶은 마음에 "만약 선생이 아버지 직업을 물으면 장사를 한다고 해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조금이라도 멋스럽게 보이기 위해서였다. 증조할머니의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학교 선생은 할머니에게 아버지 직업에 대해 물었다. 할머니는 당시 상황에 대해 전했다.

"그때 아버지 직업을 묻는 질문에 나는 솔직하게 아버지가 '말을 끌어요.'라고 답했어. 어렸지만 거짓말하기 싫었거든, 그런데 어머니(증조할머니)가 그 이야기를 듣더니 '아이고 어쩌냐, 너 이제 떨어졌어. 그렇게 학교 가고싶다더니 왜 그렇게 천치같은 행동을 했니?'라고 속상해 하셨지. 그래도 솔직함을 좋게 봐줬는지 합격해 학교에 가게 됐어. 13,14살 즈음이었어."

늦은 나이의 입학. 간이학교에서 할머니는 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다. 2학년 때, 전교에서 1명 주는 도지사 상도 탔다. 본 학교에서 간이학교 2학년 학생에게 상을 주는 게 말이 안 된다는 반대도 있었지만, 학교 선생님들의 추천으로 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 명석함 때문이었을까. 할머니는 학창 시절, 일본에 양녀로 갈 뻔한 일도 있었다.

당시 소학교에 다니던 한 일본인 아이의 부모가, 할머니를 눈 여겨 보고 "일본에 양녀로 와서 자기 딸과 같이 공부해 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암울했던 시절, 가난한 이들에게 출세의 길은 공부였다. 할머니도 자연히 공부에 대한 욕심이 났을 법했다.

"어머니(증조할머니)는 그 일본 부부의 제안을 완고히 거절했단다. 어머니 말씀이 '지금은 널 좋게 보지만, 나중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이었어.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지만, 어머니 말씀이 맞다고 생각해 (일본에 양녀로) 가지 않았어."

우리할머니가 친구분들과 함께 찍은 사진, 영화 포스터의 한 장면 같다
 우리할머니가 친구분들과 함께 찍은 사진, 영화 포스터의 한 장면 같다
ⓒ 곽진성

관련사진보기


얼마 후 양녀 제안을 했던 일본인 부부는 일본으로 떠났다. 할머니는 우리 땅에서 평범한 민중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이후, 할머니는 계속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돈을 벌어야 했다. 할머니는 학교 졸업 후, 강경에 있는 한 상업회사에 취직했다.

하지만 출납계 근무 생활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상사들 커피를 타주고, 잡무를 보는 생활에 능률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이 맡은 일이기에 재미가 없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업무를 했다, 그런 할머니에게 동경의 직업이 있었다. 우편국 직원이 되는 것이었다. 사람들끼리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우편, 통신 업무가 할머니에게는 신기한 무엇으로 다가왔다.

1945년 8.15일에 우편국 직원이 된 우리 할머니

하지만 일제 시절, 꿈은 그저 꿈일 뿐이었다. 우편국에 가기 위해서는 회사 높은 사람의 추천서가 필요했다. 그들이 자기 회사의 직원을 다른 곳에 옮기는 것을 달가워 할리 없었다. 할머니는 혹여 회사 고위직의 눈 밖에 날까, 추천서 얘기는 입 밖에 내지도 못했다.

우리할머니(뒷줄 왼쪽 세번째), 1973년도에 증조할머니 친구분들과 함께 찍은 사진
 우리할머니(뒷줄 왼쪽 세번째), 1973년도에 증조할머니 친구분들과 함께 찍은 사진
ⓒ 곽진성

관련사진보기

그러던 1945년 8월 14일, 해방의 기운이 한반도에 물들고 있었다. 할머니도 회사 일을 하며 어쩌면 일제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한 일제 군인이 친일파로 알려진 회사 지배인과 나눈 대화를 우연히 들은 것이다. 그 군인은 "우리는 계속 싸우고 싶은데, (일왕이) 항복하려 한다"라고 말을 했다. 할머니는 군인이 헛소문을 말하나 싶었다. 하지만 뜬소문이 아니었다.

15일 낮, 일제가 정말 항복을 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해방, 역사의 고고한 물결 광복이 찾아옴을 의미했다. 일제에 신음받던 아시아, 한반도 그리고 충청남도 강경, 할머니가 근무하던 강경의 상업회사에는 직원들의 웃음소리와 "독립만세" 소리가 이어졌다. 회사 지배인은 직원들 사이에 친일파로 불리는 사람이었지만, 회사 직원들은 더 이상 그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반도를 희망으로 물들인 광복 소식은 민중 한 명 한 명에게도 꿈에 도전할 용기를 주는 근원이 됐다. 우리 할머니도 광복 소식에 힘을 받았다. 이날 오후, 할머니는 용기내서 회사 부지배인실로 찾아갔다. 그리고 부지배인에게 '우편국 추천서'를 부탁했다.

"부지배인은 처음에는 우리 직원을 다른 데 보낼 수 없다면 펄쩍 뛰셨어. 하지만 부지배인 역시 광복 소식에 기뻤나봐. 그리고 내가 평소에 일을 열심히 해서 좋게 봐준 것 같아. 잠시 고민하는 눈치를 보이다가 추천서를 써줬어. 그때가 오후 4시였어. 우편국 문닫을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추천서에 기입한 한자가 틀려 한바탕 부산스러웠지. 그래도 얼추 완성된 추천서를 들고가 우편국에 전달했어. 추천서를 본 우편국 담당자가 다음날부터 출근하라고 했지."

그렇게 할머니의 1945년 8월15일 우편국 입사는 이뤄졌다. 나라를 되찾아 우리 민중의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된 첫 날, 우편국 직원이 된 것이다.

해방 이후 질곡진 삶... 어머니라는 이름 달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혼례 사진
 할머니와 할아버지 혼례 사진
ⓒ 곽진성

관련사진보기


할머니는 1945년 8월15일에 우편국에 추천서를 내고 들어갔다. 이후, 우편국에서 우체국으로 이름이 바뀐 1949년 8월, 우리 할머니도 그 특별한 역사의 자리에 우체국 직원으로 계셨다. 왠지 가슴이 뿌듯한 일이다. 할머니는 우체국 생활 중 미국에 갈 뻔한 일도 있었다.

한 여성 인사가 미국에 공부하러 갈 여성들을 뽑는데 할머니도 자격이 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증조할머니가 막았다. 그런데 증조할머니의 반대는 예전처럼 논리적이지 않았다. 연로하신 증조할머니는 그저 '내 딸이 나를 버리고 가네!'라고 엉엉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그런 어머니를 두고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국행을 포기한 할머니는 이후, 경찰인 할아버지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셨다.

할머니의 해방 이후 삶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1950년 6.25 전쟁때는 경찰인 할아버지와 잠시 떨어져야 했다. 할머니는 전쟁 통에 갓난아이였던 큰삼촌과 증조할머니를 모시고 타 지역으로 피난을 갔다. 그 시절 평범한 민중이 겪었던 질곡진 삶이었다. 할머니는 험난했던 전쟁이 끝난 후 어머니의 역할에 충실하셨다.

할머니는 늘 증조할머니의 말에 순종했다. 일본인의 양녀 제안도, 미국행도 할머니의 뜻을 따라 가지 않았다. 그런 할머니가 딱 한번 증조할머니의 뜻을 거스르고 다툰 일이 있다. 우리 어머니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는 어린 시절 몸이 약했다. 하루는 어머니가 몸이 안 좋아 위험한 상태에 놓였다. 할머니의 친구는 어머니의 눈을 보고 "이대로 가면 위험할 수도 있다"고 걱정을 했다.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으로 강경의 대천약국이라는 곳으로 뛰어갔지. 비싼 '마이싱' 약을 사서 마시게 했어. 겨울이었고, 논두렁에 오물도 많았지만 그런 것 생각할 겨를 없이 맨발로 뛰어갔어. 그렇게 약을 사다 먹였는데 다행히 생기가 조금씩 살아났어."

할아버지 경찰 퇴임식에 가신 할머니
 할아버지 경찰 퇴임식에 가신 할머니
ⓒ 곽진성

관련사진보기


할머니는 몸이 약한 딸의 건강이 염려돼, 틈이 날 때면 유명 한약방에 딸을 데리고 다녔다. 하지만 그 모습이 증조할머니에게 좋게 보일리 없었다. 증조할머니는 할머니가 고생하는 게 싫었다. 그래서 하루는 "왜 약한 딸을 낳아서 그러니? 몰래 다니지 말고, 당당히 딸 한약방에 데리고 다녀라"라고 핀잔을 주셨다. 그 말에 속이 상한 할머니도 처음으로 증조할머니에게 말대꾸를 했다.

"어머니, 없는 자식 낳으려 하지 말고, 있는 자식 잘 키우랬어요."

할머니의 말대꾸. 증조 할머니는 그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고 며칠 가출(?)을 하셨다. 결국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손발이 닳도록 빌은 끝에야 다시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래도 할머니가 증조할머니와 맞선 덕분에 변화가 생겼다. 증조할머니의 '손녀 미움'이 조금은 덜해진 것이다.

우리 할머니는 그렇게 증조할머니의 착한 딸로, 할아버지에게는 힘이 되는 아내로, 그리고 3남 2녀 자녀들에게는 든든한 어머니로 무겁고 힘든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건너오셨다. 거친 풍파를 견뎌온 우리 할머니. 나는 할머니의 삶이 참 존경스럽다.

덧붙이는 글 | '가족이야기(가족인터뷰)' 공모 응모글입니다.



특별기획-여행박사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하는 '가족이야기' 공모전
태그:#할머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잊지말아요. 내일은 어제보다 나을 거라는 믿음. 그래서 저널리스트는 오늘과 함께 뜁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