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제막하는 투수 최동원의 동상. 한국에서 전현직 프로야구선수를 통틀어 동상이 만들어진 것은 그가 유일하다. 동상은 부산 사직구장 광장에 위치하고 있다.

14일 제막하는 투수 최동원의 동상. 한국에서 전현직 프로야구선수를 통틀어 동상이 만들어진 것은 그가 유일하다. 동상은 부산 사직구장 광장에 위치하고 있다. ⓒ 최동원기념사업회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이해 안 갈 문구처럼 야구가 세상에서 제일 쉬워보였던 사람이 있다. 그는 프로야구 투수로 여덟 해를 지내면서 103승을 챙겼다. 모두 248경기를 서는 동안 3경기 중 1경기 꼴인 80경기에서 완투했고, 15번을 완봉으로 승리를 낚아챘다. 그래서 32살을 맞은 한국프로야구에 그를 최고의 선수 중 한명으로 뽑는데 이견을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국 프로야구의 전설 최동원의 이야기다. 그런 최동원이 그토록 다시 서고 싶어했던 부산 사직구장에 다시 섰다. 2011년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그지만 그를 보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의 모습으로 동상을 빚어 마운드에 다시 올려놓았다. 공을 뿌리기 직전 마지막 힘을 짜내듯 입을 굳게 다문 그의 역투는 순간에서 영원이 됐다.

그가 53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은 그를 전설이라고 했지만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부터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경남고교 시절부터 남다른 실력을 뽐내온 그는 연세대와 실업야구 무대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뽐냈다. 그래서인지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도 그에게 눈독을 들였다. 여러 국내 사정이 아니었다면 그는 메이저리그의 전설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전설이 예고됐던 남자 최동원의 정점은 1984년 한국시리즈다. 그해 최동원은 51경기에 등판해서 27승 13패 6세이브를 기록한다. 그중 14번을 완투하며 절대 식지 않는 어깨를 자랑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1, 3, 5, 6, 7차전에 등판하며 홀로 4승을 쓸어 담았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롯데자이언츠는 그해 한국시리즈 컵을 들어올렸다.

신화가 된 '퍼펙트게임'과 예고되지 않은 추락

최동원과 선동렬 최동원과 선동렬은 한국프로야구 초창기의 영웅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야구팬들의 가슴을 울리는 이름들이다. 그런 이들을 '전설'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은 넘치는 일이 아니다.

최동원과 선동렬은 한국프로야구 초창기의 영웅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야구팬들의 가슴을 울리는 이름들이다. 그런 이들을 '전설'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은 넘치는 일이 아니다. ⓒ 한국야구위원회


이후로도 그는 두 자릿수 승리를 챙겨가며 롯데자이언츠의 에이스로 자리매김했다. 동시에 최동원과 항상 같이 언급되는 또 다른 전설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해태타이거즈)과의 맞대결에서도 1승 1무 1패라는 팽팽한 기록을 유지하며 경쟁 관계에 섰다.

그중 1987년 5월 16일 사직구장에서 펼쳐졌던 거인과 호랑이의 싸움은 다시 없을 명승부로 평가받는다. 두 전설은 연장 15회까지 한치도 물러나지 않고 격돌했고 각각 200개가 넘는 공을 던졌다. 결과는 2-2 무승부였다. 영화 같은 이야기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이 이야기는 2011년 영화 <퍼펙트게임>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는 공만 잘 던지는 배팅머신이 아니었다. 최동원은 지금의 프로야구선수협회의 모태가 된 선수회 창립을 주도했다. 결국 이 일로 그는 1988년 삼성라이언즈로 보복성 트레이드를 당했다. 믿었던 팀의 배신은 그에게 내리막길을 강요했다. 1990년 야구공을 내려놓기로 결정할 때 그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담담해져 있었다. 하지만 최동원기념사업회를 꾸려가고 있는 권기우 변호사는 최동원의 이런 점을 높이 샀다.

"프로야구 선수들이 겉은 화려하지만 미래가 없다. 지금도 1군에서는 3천만 원도 못 받고 뛰는 선수들이 있는데 그에 비해 당시 최동원은 스타였고, 에이스였음에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선수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선수회를 만들었다. 그것이 밑거름이 돼서 지금처럼 선수협회가 양성화되고 공인받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야구판을 떠나 정치판이 뛰어든 최동원의 꿈은 '새 정치'

 14일 별세한 고 최동원 감독은 1991년 실시된 부산광역시의원 선거에서 '꼬마민주당'으로 부산 서구에 출마해 낙선했다. 사진은 선거 홍보물.

고 최동원 감독은 1991년 실시된 부산광역시의원 선거에서 '꼬마민주당'으로 부산 서구에 출마해 낙선했다. 사진은 선거 홍보물. ⓒ 사람사는세상


그렇게 야구판를 떠난 최동원이 찾은 곳은 뜻밖에도 정치판이었다. 1991년 지방선거에서 최동원은 집권 민자당이 아닌 이른바 노무현의 '꼬마 민주당'으로 부산 서구 선거에 나섰다. 그저 대단한 야구선수로 알려졌던 그였지만 그는 누구보다 한국 정치에 지역주의를 심어준 3당 합당에 반대했다. 그가 들고 나온 선거 슬로건은 야구선수다웠다. '건강한 사회를 향한 새 정치의 강속구'. 그가 꿈꾼 것은 건강하고 새로운 정치였다.

"내 생각으로, 최동원 선수가 단순한 야구 영웅에서 진정한 인생의 영웅으로 거듭난 것은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가 당시 민자당을 선택했다면 지금쯤 몇 선 의원이 되어있거나, 야구계에서 큰소리 칠 수 있는 지위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그걸 마다했다. 내가 최동원을 '진정한 영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런 까닭이다." - 2011년 9월 16일 김정길 전 장관이 <오마이뉴스>에 쓴 '민자당 거부하고 '꼬마 민주당' 선택한 최동원' 일부

당시 최동원, 노무현 전 대통령 등과 함께 민주당에 남았던 김정길 전 행정자치부 장관이 기억하는 '영웅' 최동원의 모습이다. 이 때문인지 일부에서는 그에게서 반골의 기질을 찾기도 한다. 정치판에서 성공을 맛보지 못했던 그는 프로야구 해설과 방송 일을 병행하며 다른 인생을 찾아 나섰다. 그러면서도 그는 떠나온 그라운드를 잊지못했다.

롯데자이언츠에 부름을 기다렸지만 그를 먼저 찾아온 것은 한화이글스였다. 2001년부터 그는 코치로 시작해 이후 3년간 이글스의 2군 감독을 역임했다.  그러던 중 그는 대장암을 선고받았다. 2007년의 일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오길 바랐고, 그런 마음이 전해졌는지 2009년에는 한국야구위원회 경기감독관으로 그라운드를 다시 밟았다.

23년만에 찾은 11번, 최동원 투수상 제정 움직임도

최동원 최동원은 단순한 ‘당대최고’가 아니라 ‘당대가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보여준’ 투수였다.

최동원은 단순한 '당대최고'가 아니라 '당대가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보여준' 투수였다. ⓒ 롯데 자이언츠


하지만 그 믿음과 기대도 잠시였다. 2011년 9월 그는 세상을 떠났다. 한때 그를 떠나보냈지만 그가 돌아오고 싶어 했던 롯데자이언츠는 최동원의 등번호 1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23년만에 되찾은 롯데의 11번이었다. 그의 영구결번식이 있었던 2011년 9월 30일 경기에서 후배 선수들은 84년 롯데가 우승 당시 입었던 푸른색 유니폼을 입었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 대신 마운드에 올라 시구를 했다.

이후로도 최동원을 잇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를 기억해내려 애썼다. 그의 동상을 만들기 위한 모금 운동이 시작됐다.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닌 민간의 자발적인 후원이었다. 1억 원을 내놓은 롯데자이언츠에서부터 1만 원을 후원한 시민까지 십시일반 낸 돈이 쌓여 동상이 만들어졌다. 높이 2.4m, 가로 0.97m, 세로 2.25m의 동상은 그렇게 사직구장 한켠에 자리를 잡게됐다.

동상을 만드는 시민운동을 주도했던 최동원기념사업회는 동상 건립 뿐 아니라 최동원상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의 사이영상이나 일본의 사와무리상 같은 최고 투수상 이름에 최동원을 붙이겠다는 목표다. 공감하는 사람들도 하나 둘 늘고 있다.

14일에는 최동원이 그리운 사람들이 모여 그의 동상 제막식을 연다. 유가족과 최동원기념사업회, 허남식 부산시장, 한국야구위원회, 프로야구선수협회 관계자 뿐 아니라 많은 팬들이 그의 새로운 등판을 지켜보기 위해 모인다. 금테 안경과 식지 않는 뜨거운 어깨, 그보다 불타올랐던 인생을 살았던 최동원.

이날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꼭 2년째 되는 날이다.

"이렇게나마 그에게 빚진 우리의 마음을 알리고 싶었다"
[인터뷰] 최동원기념사업회 이사장 권기우 변호사

 최동원기념사업회 권기우 이사장

최동원기념사업회 권기우 이사장 ⓒ 권기우


- 최동원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진 이유가 궁금하다.
"최동원 선수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거나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최동원 선수가 나보다 2살 어린데, 최 선수가 구덕구장에서 야구를 할 때 나는 동아대에서 공부를 했다. 이후 신혼집도 구덕야구장 주변에 살면서 야구를 봤다. 특히 84년을 잊지 못한다. 최동원 선수가 한국시리즈에 5번 등판하는데 요즘 같으면 아무도 못할 일 아닌가. 선수 생명 줄여가면서 자기 몸 불사르며 공을 던지는데 정말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작고하고 나니 말로만 전설이니, 영웅이니 그러더라. 그래서 내가 동상이라도 세우자고 지역 언론에 기고를 했다. 그게 활발하게 논의가 되면서 지금의 최동원기념사업회까지 꾸려졌다."

- 투수상 제정 노력은 어떤 의미에서 하고있는건가?
"투수상은 아직 기안단계다. 사실 올해는 동상을 세우면서 행정적이나 재정적으로 어려웠다. 기획재정부 인가를 받고 부산시의 인허가를 받는 등 행정 인허가만 10개쯤 받은 듯하다. 그래서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투수상을 제정하려한다. 한국 프로야구가 30년이 넘었는데 사이영상이나 사와무라상같은 상이 없다. 야구 꿈나무와 스포츠를 하는 사람들에게 비전을 제시하는 상을 만들었으면 하는 생각을 기념회 사람들이 갖고 있다. 재원이 확보되고 막강한 선발위원회가 구성돼 상의 권위가 서도록 상 제정을 추진할 생각이다. 일부에서는 최동원 투수가 사이영이나 사와무라같은 콘텐츠가 있느냐고하는 부정적 시선이 있지만 저희들이 잘 연구해서 좋은 스폰서도 구하겠다."

- 동상을 만들면서 어려움은 없었나?
"행정적 지원이 없고, 예산이 없다. 그 중 제일 어려운 게 재원조달이고 다음이 행정적 절차였다. 그래도 롯데자이언츠가 1억 원을 기부하고, 부산은행이 5천만 원, 대선주조가 2천만 원을 기부하는 등 지역 기업들의 기부가 이어졌다. 시민들도 1만 원에서부터 5천만 원까지 기금을 보탰다."

- 동상에는 '무쇠팔 최동원'이란 이름이 붙어있다. 어떤 의미인가?
"정말이지 최동원의 팔은 사람 팔이 아니다. 한국 뿐 아니라 메이저리그에도 연투 능력 만큼은 최동원 만한 사람이 없다. 한국시리즈 7경기 중 5경기 출전이 가능하겠는가? 정말이지 불꽃같이 살다간 스타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 마음의 빚을 지고있는 셈이다. 이렇게나마 그에게 빚진 우리의 마음을 알리고 싶었다"

- 최동원 선수는 마지막까지 고향팀 롯데자이언츠에서 감독을 맡고 싶어했다. 동시에 롯데는 선수회 구성을 이유로 그를 내친 팀이기도하다. 애증의 팀이라고도 볼 수 있을 텐데, 최동원과 롯데를 어떻게 바라보나?
"나는 그 당시 구단을 운영하던 구단주나 단장들을 생각하면 일부분 이해를 한다. 선수회를 구성한다는 게 아마 달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이번에는 구단이 동상 제작 비용으로 1억 원을 내는 등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개인적으로는 최하진 롯데자이언츠 사장의 결단이 화해의 장을 마련했다 생각하고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 추후 활동 계획이 궁금하다.
"말씀드렸듯이 조금 더 재원을 확보해서 투수상을 제정할 계획이다. 그리고 기장에 건설하는 야구장의 4개면 중 1개면을 '무쇠팔 최동원 구장'으로 명명하는 것을 추진중이다. 또 부산 기장군에 야구박물관이 들어서는데 박물관의 한 개 전시실에 최동원 선수의 유품을 전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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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 롯데자이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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