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프로야구에는 유례 없는 홈런 가뭄이 이어지고 있다. 20일 현재 각 팀들은 일 년간 치르는 128경기 중, 93~99경기를 소화했다. 시즌의 80%가 진행된 상황이지만 거포들의 홈런 페이스는 여전히 시들하다. 최정(23개), 박병호(23개), 최형우(22개)가 20개를 상회할 뿐이고, 두 자리 수의 홈런을 때린 타자도 19명에 불과하다.

2006년에 이대호가 26개의 홈런으로 홈런왕을 차지한 전례가 있지만, 당시는 프로야구 역사상 손꼽히는 투고타저의 시즌이었다. 올시즌은 타고투저의 흐름이 지배적인 상황이기에 야구팬들의 홈런 갈증은 더욱 크다.

최정과 박병호가 23개로 홈런 선두 자리를 경쟁하고 있지만, 23개의 홈런과 관련된 또 한 명의 선수가 있다. 한화이글스의 투수 김혁민이다. 김혁민은 올시즌 27경기에 등판해 123 2/3이닝을 던지며 23개의 홈런을 맞았다. 피홈런 2위인 장원삼이 15개의 홈런을 맞은 것을 감안했을 때, 격차가 매우 큰 편이다.

월별로 보면 4월에는 7경기에 나와 27이닝을 던지며 3개의 홈런만을 허용했으나, 5월에는 6경기 38이닝에 6개의 홈런, 6월에는 4경기 19 2/3이닝에 8개의 홈런을 허용하며 점점 그 수가 늘어났다. 7월에 들어서는 4경기에 등판해 31이닝을 던지며 4개의 홈런만을 허용했으나, 본격적으로 불펜 등판을 시작한 8월에는 5경기에 나와 8이닝을 던지며 2개의 피홈런을 기록 중이다.

올시즌을 앞두고 김혁민에 대한 한화팬들의 기대는 상당했다. 그도 그럴 것이, 류현진이 떠난 이후 한화이글스에서 기대할 수 있는 토종 선발투수는 김혁민과 유창식이 전부였다. 기대에 비해 성장 속도가 더딘 유창식을 제외하면, 믿을 만한 국내파 선발 자원은 김혁민이 유일했다. 그는 지난해에 류현진 다음으로 많은 승을 챙긴 투수였으며, 2011년부터 꾸준한 선발 기회를 누리며 기량이 점차 향상되고 있는 투수였기 때문이었다. 투수로서 피칭에 눈을 떠 꽃을 피우기 시작할 때라는 그의 나이(27세)도 김혁민에 대한 기대를 더욱 크게 했다. 그러나 2011년에 26경기 18피홈런, 2012년에는 32경기에서 9피홈런을 기록했던 김혁민은 올해 27경기에서 벌써 23개의 피홈런을 기록 중이다.

김혁민은 다양한 구종을 구사하는 스타일의 투수가 아니다. 간간이 섞어던지는 포크볼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직구 위주의 피칭이다. 기교파보다는 힘으로 승부하는 정통파에 가깝다. 정통파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타자를 압도하는 구위이다. 방망이 한가운데에 제대로 맞더라도, 공의 힘으로 배트를 압도하여 범타를 유도해낼 수 있어야 한다. 올해의 김혁민에게는 그 힘이 부족해보인다. 부족하다는 말보다는 떨어졌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올시즌 김혁민은 27경기(8월 20일 기준)에 등판했다. 123 2/3이닝을 던지며 5승 10패 3홀드를 기록 중이다. 그가 소화해낸 123 2/3이닝은 전체 투수 중 14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외국인 투수를 제외하면 그보다 많은 이닝을 소화낸 선수는 노경은(135 2/3이닝), 윤성환(127 1/3이닝), 송승준(125 1/3이닝) 밖에 없다.

노경은과 송승준은 22경기에, 윤성환은 20경기에 등판했다. 김혁민보다 5~7경기를 적게 등판했을 뿐 아니라 불펜 등판 이력도 없고, 소속팀이 치른 경기 수도 한화에 비해 많다. 8월 20일까지 두산과 롯데가 99경기, 삼성은 97경기를 치른 데 비해 한화는 93경기를 치르는 데 그쳤다. 김혁민은 이닝이터 부문 경쟁자들에 비해 훨씬 적은 경기를 소화한 팀에 소속되어 있음에도 그들과 비슷한 이닝을 던지며 그들보다 많은 경기에 출장한 셈이다.  

실제로 김혁민이 출장한 27경기는, 투수 출장 경기 수 부문에서 50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이 중 불펜 투수를 제외하면 김혁민의 순위는 2위로 껑충 뛴다. 주 업무가 선발투수인 선수 중 김혁민보다 많은 경기에 뛴 선수는 유희관(32경기) 뿐이다. 그리고 그 유희관조차 113 2/3이닝으로 김혁민에 비해 10이닝을 적게 던졌다. 유희관 이후의 순위는 60 1/3이닝을 던진 김상현으로 대폭 줄어든다. 김혁민보다 더 많은 경기에 출장한 49명의 선수 중 김혁민보다 많은 이닝을 소화한 선수는 단 한 명도 없다.

한화 구단이 김응룡 감독을 선택한 것은 팀 성적과 리빌딩 두 가지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성적과 리빌딩 중 한화에게 좀더 필요한 것은 리빌딩이었고, 구단과 팬들의 기대도 그러했다. 올해나 내년 정도는 다소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더라도, 장기적인 안목에서 유망주를 발굴하고 우수한 선수들을 육성하길 기대했다. 그러나 현재의 한화이글스는 두 마리 토끼 중 어느 것도 잡지 못하고 있다.

팀 순위는 막내 NC에게도 크게 뒤진 9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3할대의 팀 승률도 무너진지 오래다.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9위 구단은 이미 기정사실화됐다. 미래를 위해 간간이 신인들을 기용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하지만, 실책성 플레이가 나올 때마다 가차없이 문책성 교체 또한 행하고 있다. 믿을 만한 선수가 없다보니, 특정 선수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김혁민은 이런 한화마운드에서 의존도가 가장 높은 선수이다. 5승 8패 3홀드, 23피홈런에 5.75의 평균자책점. 표면적인 기록만 봤을 때에는 한화이글스의 부진에 김혁민도 한몫을 했다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팀 사정을 살펴보면 그는 혹사 아닌 혹사를 당하고 있는 피해자에 가깝다.

성적과 리빌딩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애매한 포지셔닝을 설정해버린 코칭스태프 덕에, 그는 아무 때나 올라오는 애니콜 투수가 되어가고 있다. 일정한 등판 주기 없이 마운드에 올라가는 그의 마음도 편치 않을 것이나, 김혁민은 볼멘소리 한 번 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공을 뿌리고 있다. 그의 부진함이 이해되는, 오히려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이다.  

스물 일곱 살의 젊은 투수 김혁민. 팀은 그에게 에이스가 되어주길 요구하고 있다. 그의 어깨에는 팀의 명예도, 팀의 멍에도 함께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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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민 한화이글스 에이스 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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