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민유중은 왕권을 위협하는 최고의 악역이다.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민유중은 왕권을 위협하는 최고의 악역이다.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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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월화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그 유명한 '원자 정호 사건'이 전개되면서 장희빈(김태희 분)과 인현왕후(홍수현 분)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이효정 분)과 숙종(유아인 분)의 치열한 권력 다툼 또한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실제 역사 속 민유중은 정말 사위인 숙종과 권력을 두고 대립했을까. <장옥정, 사랑에 살다>가 그린 민유중의 모습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민유중은 왕권을 위협했던 '권신'이었나

<장옥정, 사랑에 살다> 속 민유중은 서인당의 당수이자 왕권을 위협하는 조선 최고의 권신으로 그려지고 있다. 철저히 서인 정권의 이익을 대변하는 그는 세자 책봉을 거부해 임금을 길들이고, 임금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반정을 일으킬 수 있다는 말도 서슴지 않는 인물이다. 물론 온갖 권모술수를 꾸며 장희빈을 핍박하는 것 또한 그의 몫이다. 이 정도면 그야말로 드라마 속 '최고의 악역'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 속 민유중은 어땠을까. 우선 민유중이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서인, 그 중에서도 '골수 노론'이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서인 세력의 두 거목인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에게 학문을 배웠던 민유중은 스승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노론 세력에 합류했고, 이후에도 이들과 정치 생명을 함께 했다. 그는 제 2차 예송 논쟁이 벌어지자 적극적으로 송시열을 지지한 대표적 인물이기도 하다.

벼슬길에서도 탄탄대로를 걸었다. 송시열의 문하생인데다가 송준길의 사위라는 화려한 정치적 배경을 무기 삼아 홍문관 대교, 사헌부 감찰, 병조좌랑, 사간원 정언, 이조참의, 대사간, 전라도·충청도·평안도 관찰사, 성균관 대사성,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호조판서, 병조판서 등 주요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서울 시장을 거쳐 각종 장관까지 두루 경험한 몇 안 되는 엘리트인 셈이다.

그러나 민유중이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처럼 국정을 전횡하고 왕권을 위협한 권신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엄격하고 단정하며 점잖은 성품을 지녔던 그는 권력보다 명예를 중히 여긴 인물이었고, 자신의 딸인 인현왕후를 중궁전에 들여보낸 이후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몸가짐을 더욱 조심히 했다. 외척이 국정에 관여한다는 일각의 비난을 받아들여 스스로 두문불출을 선택한 것이다.

드라마와는 달리 실제 민유중은 임금의 장인이면서도 권력과 재물을 탐한 적이 없었고, 죽는 그 날까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 참 선비였다. 뛰어난 학문과 정갈한 성품, 빼어난 정무 능력을 모두 갖췄지만 임금의 장인이란 이유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았던 그에 대해 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때 민유중이 바야흐로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위계가 보국숭록대부에 올랐으므로 아침 저녁 사이에 정승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는데, 국가의 제도에 얽매여 중요한 요직을 모두 내놓고 마침내 등용하지 못하게 되므로 여론이 매우 애석하게 여겼었다." (숙종실록 13년 6월 29일)

실제 민유중은 '원자 정호 사건'을 알지도 못해

 실제 민유중은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운명을 가른 '원자 정호 사건'을 알지도 못했다.

실제 민유중은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운명을 가른 '원자 정호 사건'을 알지도 못했다. ⓒ SBS


민유중과 장희빈의 '악연' 또한 작가의 상상에 불과하다.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민유중은 장희빈을 감금, 폭행하고 그를 궁궐에서 쫓아내기 위한 계획에 몰두하며,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삼으려는 숙종에게 누구보다 격렬히 저항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날 만큼 명예를 중시했던 민유중이 한낱 '임금의 애첩'과 기 싸움을 한다는 건 실제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민유중으로서도 장희빈의 존재가 달갑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중전으로 들어간 자신의 딸은 아들 하나 제대로 생산하지 못하고 있는데 애첩인 장희빈이 매일 숙종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아비 된 입장에서 화가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사적인 감정일 뿐이고 신하 된 입장에서 왕실과 내명부에서 벌어지는 일을 시시콜콜 따져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실제 역사 속 민유중은 장희빈이 정 1품 '빈'의 첩지를 받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민유중이 살아 있을 때 장희빈은 종 4품 '숙원'에 불과했다. 장희빈이 정 2품 '소의' 첩지를 받고 왕자(훗날 경종)를 낳은 것은 민유중이 죽은 지 1년 뒤인 1688년이었고, '빈'의 첩지를 받은 것은 경종을 낳은 해인 1689년이었다. 즉, 살아생전 민유중에게 장희빈은 단순히 임금이 총애하는 후궁일 뿐이었지 딸인 인현왕후의 자리까지 위협하는 위험인물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민유중이 주도하는 '원자 정호 사건' 역시 완벽한 픽션일 수밖에 없다. 원자 정호 사건이란 서인이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삼으려는 숙종에게 반발한 일로, 서인 정권이 몰락하고 남인이 득세하는 기사환국의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다. 한 때 숙종에게 대로라고 불릴 정도로 존경을 받았던 우암 송시열은 끝까지 원자 정호를 반대하다가 한양으로 압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사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시기 민유중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죽은 지도 2년이나 지난 후였다. <장옥정, 사랑에 살다> 속 민유중처럼 원자 정호를 앞장서서 반대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처지였던 셈이다. 드라마의 극적 재미를 위해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과도한 왜곡이 자칫 망자를 욕보이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뒷맛이 씁쓸하다.

지금껏 살펴봤듯이 민유중은 숙종의 정적도, 왕권을 위협한 권신도 아니었으며 장희빈을 핍박하거나 권모술수를 꾸며 그를 내쫓으려 한 적도 없었다. 한 개인으로 보자면 그는 매우 훌륭한 학자이자 선비였고, 명예를 중시 여기며 위엄을 잃지 않은 품격 있는 인물이었다. 아마 민유중이 하늘에서 <장옥정, 사랑에 살다>를 본다면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노라고 매우 억울해 할지도 모르겠다.

조정의 주요 대신이 죽으면 사관은 실록에 '졸기'라는 것을 적게 되어있다. 실록에 써져 있는 민유중의 졸기를 마지막으로 보며, 시청자들이 드라마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그의 행적을 곡해하거나 폄하하지 않기를 바라본다.

"여양부원군 민유중이 58세의 나이로 졸하였다. 민유중은 성격이 강직하고 방정하며, 총명하고 막힘이 없었는데 형 민정중과 함께 경서에 관한 학문을 가지고 진출하여 선비들이 우러러 믿고 따르는 덕망을 지녔다. 조정에 벼슬하면서는 언론이 준엄하고 단정하여 업적이 융성하게 나타났고, 집에 있을 적에는 품행이 올바르고 정이 독실하여 예법으로 자신을 제어하였으니 임금이 왕비(인현왕후)를 그의 가문에서 정하였음은 대개 그의 집 규율이 올바름을 살폈기 때문이다.

(중략) 부고가 오자, 임금께서 하교하시기를, '겨우 광성부원군(김만기, 인경왕후의 아버지)의 상사에 곡하고 나자 또 이 상사에 곡하게 되니, 놀랍고 비통한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고 국가를 위해서도 불행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하고 이어 3년 동안 녹봉을 주도록 명하고서 희정당에서 발상했다. 뒤에 시호를 문정이라고 하였다." (숙종실록 13년 6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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