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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준비를 위해 도서관을 드나드는 요즘 20대의 나날은 대개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하루 24시간은 어찌 그리 단조로운지. 그런데 그렇게나 특별할 것 없는 도서관에서 나는 아주 의미 있는 그림책이 한 달 동안 전시돼 있는 것을 보았다. 아니 그것은 '발견'이었다.

그림책 <꽃 할머니> 표지
▲ 표지 그림책 <꽃 할머니> 표지
ⓒ 사계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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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5일부터 28일까지 원주시립도서관에서는 한·중·일 그림책 작가들이 평화를 주제로 출판한 '평화그림책' 시리즈의 제1권 <꽃 할머니> 전시회가 열렸다. 도서관 1층 로비에 마련된 그림책 전시회를 나는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아침, 저녁 힐끗힐끗 본 그림들은 색깔도 선명하고 고운 데다 그 이름까지 '꽃 할머니'여서 처음엔 그저 어린 학생들의 그림을 모아 전시해 놓은 것인가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저 우연히 몇 장의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혹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무거워지고 '설마'라는 생각이 또다시 들었다. 그렇게 전시된 그림은 하나하나 다 들여다보았을 때, 나는 이 그림책이 전쟁피해자인 '종군 위안부'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책은 위안부 피해자인 심달연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림책 전시의 시작에 쓰여 있던 문구가 가슴을 툭 하고 건드렸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슬픈 것이었다. 마음이 아프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리라.

대한민국에 태어나 사는 사람으로서 초등학교부터 배워 온 일제강점기와 그 시기의 핍박에 대해 모를 리 없다. 마음이 쓰였던 것은 내가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배워왔기 때문이 아니다. <꽃 할머니>는 도서관에도 일반 열람실이 아닌 어린이 열람실에 가서야 대출할 수 있는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이다. 역사적 배경을 모르는 어린이들도 쉽게 보고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림책이 마음을 울린 까닭은 그것이 우리 역사의 아픔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성의 상실에 관한 보편적 이야기이기 때문일 터다. 한 소녀가 먹을 것이 없어 풀을 뜯으러 갔다 일본군에게 붙잡혀 끌려간다. 그 후, 하루에도 몇 차례씩 들이닥치는 군인들을 받아내야 하는 열세 살 소녀. 이 그림책을 보는 누구라도, 그가 가진 국적, 인종, 배경에 상관없이 우리는 인간으로서 마음 아파야 한다.

그림책 <꽃 할머니> 속의 삽화 들.
▲ 삽화 그림책 <꽃 할머니> 속의 삽화 들.
ⓒ 사계절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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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그것이 가진 거대한 힘으로 한 개인이 당연히 가져야 할 인간적 존엄을 파괴한다. 인간이 물건이 되고 목적을 위한 도구가 되는 일. 중일전쟁 시기부터 태평양전쟁의 종전까지 일본군의 위안부 정책으로 성폭력에 희생된 여성은 최소 4만에서 최대 30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피해자인 여성들은 물론이고 가해자인 남성들 또한 그 속에서 자신들의 인간적 가치를 지키지 못했다. 내가 아닌 다른 이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전쟁의 포화 속에서는 생겨날 수 없었던 것일까.

심달연 할머니는 2011년 생을 마감하셨다. 그러나 아직도 수요집회는 1000회가 넘게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사회 내에서도 위안부 문제는 꾸준히 주목받고 있지 못하다. 지난 3월 8일은 세계여성인권의 날이었다. 매번 받아보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웹진에 실린 여성의 날에 대한 논평의 몇 부분은 다음과 같았다.

최근 우리나라는 여성의 사회 진출과 경제활동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고 …… 보건, 교육·직업훈련, 문화·정보 부문은 비교적 높은 성 평등 수준에 도달해 있는 것으로 타났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앞으로도 관련 의제를 적극 발굴하고, 실태조사와 권고·의견표명 등을 통해 여성에 대한 차별시정 및 인권보호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거론하는 것조차 힘든 우리나라에서 여성 인권 신장을 논하는 일은 얼마나 사치인지. 지금도 일본의 몇몇 인사들은 계속해서 위안부는 강제동원이 아닌 돈벌이를 위한 자발적 참여였다고 망언하고 있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 번의 분노 표출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심과 연대다. 이는 곧 지켜보는 것이 조금 아플지라도 계속해서 상처를 마주 대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 책은 3년 전인 2010년에 출간됐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지방의 한 도서관에서 전시회가 열릴 정도로 꾸준히 우리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마침 4월부터 <꽃 할머니>가 연극으로도 만들어져 무대에 오른다고 한다. 책을 보아도 좋고, 연극을 관람해도 좋다. 수요집회에 참가해 함께 연대하는 것은 더욱 좋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함께 가슴 아파야 한다.


꽃할머니

권윤덕 글.그림, 사계절(2010)


태그:#꽃 할머니,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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