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몽골에서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레닌 동상이 철거됐다.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있었던 철거 행사에는 300여 명의 시민이 찾아와 그 모습을 지켜봤다고 한다. 오버코트를 입고 타오르는 눈빛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던 레닌 동상이 거대한 거중기에 이끌려 휘청거리다 끝내 사라지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한때, 레닌 동상은 성공한 사회주의 혁명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이젠 사라지는 기억이다. 1989년 소비에트연합 해체와 함께 자본주의로 돌아선 국가들에 레닌이 차지할 자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광장은 혁명 전사가 아닌 자본주의 시민들의 차지다. 볼프강 베커 감독의 2003년 작 <굿바이 레닌>, 사라지는 동상에 대한 일간지의 단신을 접하자 떠오른 것은 이 독일 영화다.

 굿바이 레닌의 한국판 포스터. ⓒ 굿바이 레닌

굿바이 레닌의 한국판 포스터. ⓒ 굿바이 레닌 ⓒ 굿바이 레닌

우주의 심연 속에서 지그문트가 조국을 빛내는 동안 아버지는 자본주의 여자한테 빠져버려서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 얘긴 금기가 됐고 어머니는 열성적인 애국자로 변했다.

열성 공산당원인 어머니에게서 자란 알렉스, 무슨 뜻이라기 보단 얼떨결에 베를린 장벽 제거 시위에 참여한다. 그를 이끈 건 의지보단 무료함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뜻 하지 않게 어머니와 마주친다.

동독 개국 40주년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한껏 차린 빨간 드레스를 입고 길을 나섰던 어머니는 '그곳'에서 아들을 본 충격으로 쓰러져버린다. 심장마비. 그리고 8개월. 그사이 독일은 통일이 되었고 많은 것이 변했다. 아들은 사랑에 빠지고 딸은 대학을 자퇴하고 버거킹에 취직했다. 그러나 깊은 잠에서 깨어난 어머니가 기억하는 것은 오로지 친애하는 조국 동독뿐이다.

독일 통일이 공산당 대변인의 말실수에서 시작되었듯이 어머니 크리스티아네와 아들 알렉스의 인생도 그렇다. 남편과의 이별, 걷다보니 다다른 베를린장벽에서의 마찰. 모두 개인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시간과 함께 흘러가다보니 어느덧 이른 곳이다. 그리고 우연이라는 이름을 쓴 운명이 그들 앞에 인사한다. 반갑지 않지만 함께 가야할 수밖에.

충격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8개월 만에 깨어난 어머니는 이제 작은 충격에도 위험하다.  그 때문에 아들은 어머니에게 독일의 통일 소식을 알릴 수 없다. 그리고 거대한 거짓말이 시작된다. 서독처럼 변해버린 집안 환경을 동독스타일로 바꿔버리고 이제는 사라진 옛 동독제품을 구입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한다. 하다하다 TV 프로그램도 조작한다. 친구와 가짜 뉴스를 만들어 어머니를 안심시킨다.

7월말이 되자 동독제(製)는 사라지고 장벽 너머의 진짜 돈이 흘러들었다… 사방에서 독일화폐가 우리 작은 사회를 침범하였다.

영화는 순간순간 통일이 되었지만 아직 갈등이 봉합되지 않은 동독과 서독의 모습을 보여준다. 서독에서 온 누나의 남편이 집을 예전처럼 되돌리는 것에 반대하며 집세를 내는 건 자신이라고 항변할 때, 우리는 통일 된 동독의 집값이 과장이긴 하지만 서독에선 껌 값밖에 안 된다는 걸 알게 된다.

또, 알렉스가 어머니의 담당의사에게 '당신은 언제 서독으로 튈 거냐?'라고 비아냥대듯 묻는 질문에서, 천신만고 끝에 찾은 어머니의 옛 돈이 마르크화로의 화폐 교환일이 이틀 전에 끝났다는 이유로 휴지조각이 되어버리는 상황에 당시 동독 사회의 혼란과 허탈함을 짐작할 수 있다.

동독인들은 만족을 몰라 늘 불평불만이지, 한심한 편지 쓰는 네 어머니도 그렇고.

물론 서독 사람들도 그 가족들과 동독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크리스티아네가 병이 생긴 두 처음으로 밖으로 나와 레닌의 동상이 철거되어 어디론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있다. ⓒ 굿바이 레닌

크리스티아네가 병이 생긴 두 처음으로 밖으로 나와 레닌의 동상이 철거되어 어디론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있다. ⓒ 굿바이 레닌 ⓒ 굿바이 레닌


거짓말이 언제까지 계속될 순 없다. 어느 날 밖으로 나온 어머니는 모든 것이 달라진 현실과 마주한다. 바깥 세상엔 레닌 동상이 헬기에 매달려 어디론가 떠나간다. 그리고 우린 그제야 그들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진실을 만난다.

우상이 과거의 유령처럼 나타났다. 지그문트 얀, 그는 이제 우주의 신비를 얘기하고 무중력의 느낌을 설명해주는 대신 작고 지저분한 택시를 몰았다.

한때 위대하던 것들이 가을 거리에 떨어지는 낙엽들처럼 지저분하고 쓸모없게 변해간다. 누가 원하고 누가 원하지 않았든 변화는 모두에게 양해를 구하진 않는다. 버거킹에서 일하는 알렉스의 누나가 오랜 전 떠난 아버지를 만나고도 '버거킹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던 것처럼.

위태롭고 황당한 알렉스의 거짓말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쓰일 때, 이야기는 종착역에 다다른다. 타오르는 불꽃과 모형로켓 속에 떠나버린 어머니. 그러나 혼란 속에서도 축제는 계속되듯 영화는 끝났지만 알렉스의 삶은 계속될 터.

알렉스의 어머니와 떠나버린 레닌 동상이 그리운 누군가여, 그러나 너무 괘념 친 말기를. 레닌은 떠났지만, 그렇다고 혁명이 끝난 것은 아니니. 자본주의의 풍요와 빈곤이 물결쳐 넘치는 이 시대에도 혁명은 있다. 조용히 소리 없이, 때론 과격하며 한편으로 우아하게. 세상은 언제나 완벽하지 않기에, 레닌도 스마트폰도 우리의 대통령도 바꾸고 업그레이드 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에.

굿바이 레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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