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연필을 쥐는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연필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이야기가 있어요. 호미를 쥐는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호미로 땅을 쪼거나 일구는 밭살림이 있어요. 부엌칼을 쥐는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부엌에서 칼질을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맛난 밥을 짓는 즐거운 보금자리 숨결이 있어요. 전쟁무기를 쥐는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서로 죽이고 죽는 끔찍한 전쟁이 있지요.

겉그림
 겉그림
ⓒ 사계절

관련사진보기


꽃할머니 얼굴은 두 가지다.
시무룩한 얼굴과 활짝 웃는 얽굴.
"웃어 보려고 해도 웃을 일이 없어.
뭐 그렇게 크게 웃을 일이 있어? 좀 삐죽 웃으면 되지."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꽃 이야기를 할 때면 늘 활짝 웃으신다. (2쪽)

권윤덕님이 빚은 그림책 <꽃할머니>(사계절 펴냄)는 이름 그대로 꽃할머니 이야기를 다룹니다. 꽃을 좋아하기에 꽃할머니입니다. 꽃을 아끼기에 꽃할머니입니다. 꽃다운 넋이기에 꽃할머니예요. 꽃처럼 곱게 피어나던 밝고 싱그러운 삶이기에 꽃할머니입니다.

그런데 꽃할머니는 열세 살 꽃다운 나이에 꽃다운 길이 짓밟혔다고 해요. 이 나라를 총칼로 억누르며 들볶던 일본 군대는 열세 살 꽃다운 가시내를 비롯해서 수많은 꽃넋을 사로잡아서 전쟁터로 보냈어요. 전쟁터로 끌려간 꽃넋은 총칼에 억눌리면서 시달리고 들볶이며 죽음과 같은 수렁에 빠져야 했습니다.

속그림
 속그림
ⓒ 사계절

관련사진보기


꽃할머니가 열세 살 무렵이었다.
일본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었고,
나라 밖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총독부는 젊은 사람들을 전쟁터로 내몰고,
곡식이며 놋숟가락까지 거두어 갔다.
사람들은 나물을 캐어 죽을 쑤어 먹었다.
그날도 꽃할머니는 언니와 함께 나물을 캐러 나갔다. (6쪽)

전쟁을 일으킨 이들은 꽃넋을 노리개로 삼았습니다. 전쟁에 휘둘리다가 식민지에서 벗어난 나라에서는 노리개로 시달린 꽃넋을 거두거나 돌보거나 보듬거나 달래 주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 꽃넋은 전쟁터에 버려졌어요. 전쟁터에서 겨우 빠져나와 고향으로 돌아온 꽃넋은 보금자리에서 따스한 품을 누리기 어려웠어요. 이러면서 속절없이 하루하루 흘렀습니다.

생채기는 응어리가 되고, 응어리는 다시 생채기가 됩니다. 피고름처럼 맺힌 응어리는 깊은 생채기가 되다가, 풀릴 길이 보이지 않는 아픈 응어리가 되어요.

속그림
 속그림
ⓒ 사계절

관련사진보기


군대가 이동할 때마다 꽃할머니도 끌려 다녔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만주인지, 상해인지, 사할린인지…….
폭탄 냄새와 폭격 소리와 온천지 불꽃만 기억 속에 남았다.
그렇게 몇 해가 더 흐르고, 전쟁이 끝났다.
군인들은 꽃할머니를 전쟁터에 버려두고 떠났다. (24쪽)

그림책 <꽃할머니>는 이 땅에서 벌어졌으나 이 땅에서 오랫동안 감춰진 이야기를 꽃송이와 함께 다룹니다. 꽃다운 나이에 꽃피지 못한 채 짓밟히고 만 수많은 꽃넋 이야기를 그림으로 차분하게 보여줍니다.

전쟁이 끌어들이는 끔찍한 짓 가운데 하나를 보여줍니다. 전쟁, 전쟁무기, 식민지, 제국주의가 한통속이 되어 마을과 사람을 괴롭힌 짓을 보여주어요.

꽃넋이 아닌 성노예가 되어야 했던 생채기를 한국과 일본 정부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사람을 사람 아닌 성노예로 짓밟고 괴롭힌 생채기를 한국과 일본 정부는 어떻게 뉘우쳐야 할까요.

참된 뉘우침이라 한다면 전쟁무기를 모두 녹여서 없애고는 평화라는 길을 가리라 생각해요. 참다이 뉘우치고 나서 이제부터 착한 길을 걷겠노라 한다면 군대도 전쟁무기도 없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삶이 되도록 나라살림을 바꾸리라 생각해요.

속그림
 속그림
ⓒ 사계절

관련사진보기


지금도 끊임없이 지구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난다.
열세 살 꽃할머니가 겪은 아픔은
베트남에서도 보스니아에서도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 콩고에서도 이라크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37쪽)

지구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전쟁터 한복판과 언저리에서는 수없이 꽃이 집니다. 한국뿐 아니라 베트남과 보스니아에서도, 콩고와 이라크에서도 되풀이된다는 전쟁이요 꽃이 지는 생채기입니다.

총칼을 쥐기에 평화 아닌 전쟁만 불거져요. 총칼을 내려놓지 않기에 평화하고 등을 돌리는 전쟁으로 치달아요. 총칼을 녹여서 호미와 쟁기로 바꾸지 않기에 평화하고 동떨어진 길로 가고 말아요.

열세 살 꽃님이는 나물을 캐고 꽃을 꺾는 꽃넋으로 살려는 꿈을 꾸었어요. 시골에서 조용하고 수수하게 호미를 쥐던 꽃님이는 우악스레 총칼을 거머쥔 사내들 군홧발에 아프게 밟혔어요.

오늘 우리는 두 손에 무엇을 쥐는 살림인지 돌아보아야지 싶어요. 우리 두 손에 아직 총칼이 있나요? 우리 두 손에 호미와 연필이 있나요? 우리 두 손에 평화와 사랑이 있나요? 우리 두 손에 민주와 자유가 있나요? 우리 두 손에 평등과 나눔이 있나요? 우리 두 손에 따스한 웃음과 넉넉한 노래가 있나요? 이 땅에서 우리 아이들은 꽃순이랑 꽃돌이로 무럭무럭 자라서 꽃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덧붙이는 글 | <꽃할머니>(권윤덕 글·그림 / 사계절 펴냄 / 2010.6.7. / 10500원)



꽃할머니

권윤덕 글.그림, 사계절(2010)


태그:#꽃할머니, #권윤덕, #평화그림책, #그림책, #성노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