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수정 : 5일 낮 12시 10분]

 지난 1일 영화 상영에 앞서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오멸 감독

지난 1일 영화 상영에 앞서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오멸 감독 ⓒ 성하훈


제주 4·3 항쟁 영화 <지슬>이 개봉한 1일. 작품을 연출한 오멸 감독은 아침부터 극장 주변을 맴돌았다. 이례적으로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먼저 개봉하는 선례를 만들었기 때문인 듯 첫 상영 전 배우들과 고사를 지낸 후, 극장 분위기를 살피는 모습이었다.

"극장에 어르신들이 많다"라고 말한 오멸 감독은 7회로 예정됐던 상영이 10회로 늘어나고 다시 2회가 더 추가되며 매진이 이어지자 고무된 표정이 역력했다. 이날 <지슬>은 12회 상영이 모두 매진돼 영화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는 이날 저녁 VIP 상영에 참석한 인사들과 만난 자리에서는 "극장이 들어차는 모습에 오히려 슬픈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저녁 상영에는 우근민 도지사를 비롯한 지역유지들과 문재인 의원, 서울에서 내려 온 영화인 원정대가 함께했다.  

인사차 무대에 오른 감독은 "생전 극장에 오지 않을 어르신들이 영화로 보러온 것은 그만큼 4·3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기 때문"이라며 "이 슬픔이 치유되고 4·3에 대한 생각이 더 많이 공유돼야 기쁠 것 같다"고 말했다. 4·3의 응어리진 한이 그만큼 더 깊이 있게 감독에게 와 닿고 있었던 것이다.

<지슬> 제주 개봉으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오멸 감독을 1일 오후 제주 CGV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지슬>의 매진 소식에 영화계는 제주에서 '지슬의 난' 또는 '오멸의 난'이 일어났다며 반기는 분위기였다.

"동네 할아버지들이 극장을 찾는 심정을 알까요?"

 오멸 감독

오멸 감독 ⓒ 성하훈

오멸 감독은 "3월 1일 개봉은 의도적으로 맞춘 날짜"라고 했다. 개봉일 자체에 큰 의미가 담겨 있었다. 3월 1일은 4·3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1947년 3·1절 발포사건이 발생했던 날이다.

당시 3·1절 기념대회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6명의 주민이 희생됐다. 제주 중심부인 관덕정에 모인 주민들 사이로 지나던 기마경찰이 말에 깔린 어린 아이를 방치한 채 지나쳤고 이에 군중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발포로 이어진 것이다. 이 사건이 발단이 되면서 1948년 4·3항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제주 개봉 과정이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여러 조건이 부족하고 어려워서 제주 개봉은 진짜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며 힘들었던 과정을 토로했다. 그렇지만 지역 주민들의 한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가끔 그런 생각도 했어요. '내가 왜 중간에 이 일을 만들어 놨나', 왜 사고를 쳐가지고 이 과정을 힘들게 만들었나 싶어 무척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서울 배급사도 제주 개봉에 맞춰 안 해봤던 일이라 힘들었지요. 그래도 지역주민들이 갖는 한이 있으니까 지역에서 개봉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4·3 영령들이라도 도와주시겠지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살얼음 같이 깨질 것 같고 조심스런 상황들도 많이 생겼는데, 오늘까지 오게 된 게 엄청 신기하기도 합니다."

<지슬>의 제주 개봉을 고집했던 것은 지역의 이야기인 것 외에 그가 가진 예술가로서의 기질 때문이었다. "사건에 중심에 있던 사람들이 먼저 보는 것이 맞다"고 본 것이고, "열악한 환경에 맞서는 것도 예술가로서의 자세"라고 생각한 것이다.

"동네할아버지들이 영화 보러 오는 심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여기서는 감동입니다. 영화보고 관객들과 만나러 들어가면 눈물이 나요. 천만 관객을 바라보는 감독이라도 이런 감동은 못 느낄 겁니다. 어르신들이 영화를 보고 자신들의 상처를 벗겨내려고 온 것이라 위로가 됐으면 하지만 조마조마한 마음도 들고... 내가 다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분들의 가슴에 위로가 됐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선동이 아닌 평범한 주민들의 모습으로 표현한 4·3 항쟁

 '큰넓궤동굴'로 피한 주민들. 영화 <지슬>의 한 장면

'큰넓궤동굴'로 피한 주민들. 영화 <지슬>의 한 장면 ⓒ 자파리필름


<지슬>은 4·3 항쟁 당시 안덕면 동광리 큰넓궤동굴로 피난했던 주민들의 이야기다. 해안선을 기준으로 5km 밖에 있으면 무조건 폭도로 간주하다는 정부의 포고령에 주민들은 난리를 피해 동굴로 피신한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들을 영화에 담아냈다.

4·3 항쟁 한 단면을 주민들의 모습을 통해 표현하고 있는데, 오멸 감독은 큰고모가 당시 희생됐다고 말했다. 영화가 특별한 부분은 4·3의 한을 분노의 시선으로 보기보다는 제사형식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4·3을 소재로 했다고 해서 거친 영화로 생각한 사람들에게는 동떨어진 면이 있다. 오 감독은 "개인으로서 내 생각을 의지대로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었다"고 말했다.

"선동적인 형태로 영화가 강한 자극을 주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찍는 방향이 다른 쪽으로 나올 수 있다고 미리 말을 했지요. 타인들의 원하는 것과 달라서 고민이 많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술적으로 문화적으로 표현을 해서 관심 없는 사람들까지 끌어내고, 모르는 사람들한테까지 전달해서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4·3의 단면을 그리고 있지만 4·3에 대해 모르는 상태에서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기초적인 설명이 아쉬워 보인다는 지적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했다.

"4·3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건 내 역할이 아닌 역사시간이 할 일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영혼에 대한 치유라고 봐요. 저는 <지슬>을 찍으면서 느낀 거지만 제주의 슬픈 역사가, 그리고 이 사람들의 아픔이 치유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치유에 대한 의미를 더 크게 받고 있습니다. 66년 동안 몰랐던 사실을 1시간 40분 동안 다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이기에 포기할 것은 포기해야 했습니다." 

<지슬>은 4·3 희생자 영혼들이 만들어 준 영화

 <지슬> 연출한 오멸 감독

<지슬> 연출한 오멸 감독 ⓒ 성하훈


<지슬>은 흑백화면으로 구성돼 있다. 그 자체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제주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흑백논리의 상징이면서, 상복의 색깔처럼 죽어간 희생자들을 추도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당시 제주 아픔과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 있어 꽤 강렬한 색감을 자랑한다. 미술(한국화)을 전공한 감독은 무채색에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신위' '신묘' '음복' '소지'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된 영화는 무고하게 희생된 4·3 희생자들의 아픔을 절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제사의 의미가 담겨진 영화에 대해 감독은 "4·3 영령들의 한이 영화에 스며들었다"면서 영화 완성도 "4·3 영령들이 도와줘서 가능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촬영 콘티를 꼼꼼하게 준비한 것도 아니고 그냥 매일 아침에 현장에 가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다니다보면 장소가 나타났습니다. 내가 준비한 게 아니고 현장에서 분위기와 공간을 보면서 만들었는데, 지금 이 공간이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고 에너지가 다른 것을 잘 들었다고 봐야겠지요. 감독은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듣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매일매일 영감을 주고받으면서 작업을 하는 게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소소한 부분들까지 무모할 정도로 운에 맡겼는데, 잡으려 하기보다는 놓으려고 했을 때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영화의 첫 장면에 대해서도 "찍고 나서 놀랐다"며 "운이 좋았는데, 이런 장면을 4·3 영령들이 아니면 누가 만들어 줬겠나 싶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스태프들도 이런 제작 방식에 적응하면서 많은 힘이 돼 줬다. 영화 촬영 기간 내내 의견충돌은 단 한 번도 없었고 믿고 따라와 줘 감독으로서는 잘 정리만 해주면 되는 상황이었다.

"배우들이 모두 연기경험이 없는 지금까지 알고 지내온 분들입니다. 시나리오에 있는 대사를 그때그때 제주도 말로 표현했고 자기가 할 말을 미리 찾아왔어요. 앵글 때문에 바쁜 날은 용필 역을 맡은 가수 양정원씨가 다른 사람들의 연기지도를 해 주는 등 다들 알아서 해 줬기 때문에 감독으로서는 편했습니다. 출연료를 전혀 주지 못했고, 밥을 제때 못 먹어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영화가 해외에서 잇따라 수상하면서 제작비가 조금은 채워지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그는 "선댄스영화제는 상금이 없었다, 사람들이 저 돈 많이 번 줄 아는데 상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잇따른 주요 영화제 수상에 대해서도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아쉬운 부분에 대한 지적도 잊지 않았다.

"지역에서 조금 잘 하는 게 세계에서 이길 수 있겠나 싶었고, 이 정도만 했으면 됐지 뭘 더하고 싶은 욕심이 없습니다. 부산영화제에서 상을 4개 받은 것도 과한데, 받는 것도 적당히 받아야 할 것 같아요. 이 정도 왔으면 충분히 작품 만드는 입장에서 만족합니다.

조금 불만도 생기는 게 영화제 수상해야 개봉도 하고 관심도 받고 하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돈이 많지 않은 이상 어려운 것 같아요. 작가로서 경쟁해야 하는 시스템이 있어야 하는 게 불편하기도 합니다. 밑바닥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환경이 없다는 게 문제인데, 상을 받아야만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예술가로서 굴욕스럽기도 합니다."

독립영화의 열악한 여건에 대해서도 언급한 오멸 감독은 "특히 서울이 아닌 지역의 영화인들은 지역이야기를 안 다루는 경우가 많은데, 지역영화의 활로를 고려해 지역 사람들을 위한 영화를 찍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역문화 자체가 세계적일 수 있다"며 "제주 지역에서 개봉하는 것도, 많은 독립영화인들한테 가능하다는 여지를 만들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제주 목표 관객 3만 명은 4·3 당시 희생자들의 수

 <지슬>이 개봉한 1일. 영화 관람을 위해 극장을 찾은 문재인 의원과 함께한 오멸 감독

<지슬>이 개봉한 1일. 영화 관람을 위해 극장을 찾은 문재인 의원과 함께한 오멸 감독 ⓒ 성하훈


<지슬>은 제주 관객 3만 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 3만 명은 4·3항쟁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숫자다.

"3만 명 의미는 돌아가신 분들의 후손들이 다 영화를 봤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서울에서도 독립영화 3만 명은 힘든 숫자입니다. 하지만 3만 명 넘어서면 사회적 발언이 준비될 수 있지 않나 싶은 것이지요. 100만이나 그 이상 욕심은 없습니다. 제주에서 3만이면 우리나라 인구비례로 하면 300만이나 마찬가지라 볼 수 있을 만큼 엄청난 가치가 있습니다."  

오 감독은 영화를 통해 4·3 항쟁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있기를 소망했다. 그 변화의 마음이 영화에 대한 관심으로 쏠리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를 본 어르신이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선거 때마다 공약이 나오지만 실천이 안 되는데 이번에는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영화가 좋다고 하기 보다는 그만큼 상처가 큰 게 현실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4·3 국가기념일 제정을 공약했는데, 거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 지역민들에 대한 명예회복까지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부분인데, 정권을 가진 부분이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사실 4·3에 대한 국가기념을 추진해야 하고, 진상규명위원회도 해야 하고, 이 역할이 너무 도 간절한데, 문화적으로 힘을 못 갖고 있고 정치하는 분들이 기대와는 다르게 실천하지 않으니 영화로 관심을 보이면서 몰리는 것 같아요. 이제는 마음이 풀리는 일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감독의 바람은 개봉일 영화인 원정대가 제주를 찾은 계기로 작용했다. 독립영화의 개봉에 맞춰 영화인들이 떼를 지어 개봉관을 방문한 것은 사례가 없었던 일이다. "밖의 인사들이 관심이 많다고 하면 지역민들에게 많은 자부심이 생긴다"는 것이 감독의 설명이었다.

이에 화답하듯 영화인 원정대의 일원으로 극장을 찾은 배우 강수연씨는 1일 저녁 상영 전 인사말을 통해 "제주영화가 한국 대표영화가 됐다"며 "제주 분들이 귀빈들이고 영화인들이 관객"이라고 제주 개봉의 의미를 부여했다.  

제주에서 1일 개봉한 <지슬>은 오는 21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상영된다. 개봉 후 3일 간 제주에서만 매일 천 명 이상이 관람하며 3천명을 넘어섰다. 독립영화 흥행기준이 전국 관객 1만 명임을 감안할 때 놀라운 열기다.

 주민들의 해학이 담겨 있는 <지슬>의 한 장면

주민들의 해학이 담겨 있는 <지슬>의 한 장면 ⓒ 자파리필름


전국 개봉을 앞두고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서 조금 더 주의 깊게 보거나 이해했으면 하는 부분이 있을까 싶어 물었다. 감독은 4·3의 영혼들이 영화에 참여했음을 강조하며, 영화 첫 부분에 나오는 장면을 설명했다.

"'신위'(영혼을 모셔 앉다)라는 장면을 보면 제사를 지낼 때 위패를 세우고 영혼을 불러오는 거잖아요. 그러면 그 이야기를 끌어오는 것인데, 그 다음 장면부터는 그분들 영혼인 거지요. 이 사람들이 굳이 처절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보니 해학이 담긴다고 보는 것이지요. 4·3의 영혼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영화를 표현한다는 생각으로 찍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소지'(신위를 태우며 드리는 염원)로 가는데 제의적 성격이 있다 보니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어려워하는 분들이 있더군요."

지슬 오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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