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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포(율포)석보의 끝 지점인 이곳에서 박제상이 왜국으로 출발했다. 유포에는 신라 시대 이래 왜구의 침범을 막기 위해 석보(돌로 쌓은 작은 성)를 쌓아 두고 있었는데 지금도 석축과 돌무더기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사진의 소나무 아래에 박제상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유포(율포)석보의 끝 지점인 이곳에서 박제상이 왜국으로 출발했다. 유포에는 신라 시대 이래 왜구의 침범을 막기 위해 석보(돌로 쌓은 작은 성)를 쌓아 두고 있었는데 지금도 석축과 돌무더기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사진의 소나무 아래에 박제상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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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혹은 울산에서 동해안을 따라 경주로 간다면 어디를 답사해야 할까? 문무왕 산골처(散骨處)와 감은사터는 너무나 유명한 곳이지만, 그 이전에도 꼭 가볼 만한 곳이 두 곳 있다. 아직 찾는 이가 드문 곳들로, 박제상과 석탈해 유적이다.

박제상은 왜나라로 떠날 때 율포를 출발하여 동해로 들어갔다. 율포는 지금의 울산 북쪽 바닷가인 정자마을이다. 이 마을 뒷산 입구인 유포석보(柳浦石堡)에는 박제상이 왜로 출발한 곳이라는 사실을 기리는 '신라충신 박제상공(公) 사왜시발선처(使倭始發船處)'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신라의 충신 박제상 공이 사신으로 왜에 갈 때 배를 처음 출발한 곳'이라는 뜻이다.

우리니라의 동해에서 흘러간 물은 박제상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 대마도 미나토 마을에 바로 닿는다. 미나토의 방파제에 가면 한글이 적힌 쓰레기들이 떠내려와 있다. (사진 왼쪽) 대마도 바닷가의 지저분한 풍경 (오른쪽) 쓰레기를 확대한 모습. 박제상은 이 물결을 역으로 이용하여 신라 왕자를 탈출시킨 후 자신은 잡혀서 처형당했다.
 우리니라의 동해에서 흘러간 물은 박제상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 대마도 미나토 마을에 바로 닿는다. 미나토의 방파제에 가면 한글이 적힌 쓰레기들이 떠내려와 있다. (사진 왼쪽) 대마도 바닷가의 지저분한 풍경 (오른쪽) 쓰레기를 확대한 모습. 박제상은 이 물결을 역으로 이용하여 신라 왕자를 탈출시킨 후 자신은 잡혀서 처형당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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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에 세운 비석이 왜 이렇게 한문투?

'유포석보'는 무엇? 지금은 정자로 불리는 이곳의 본래 이름은 율포였다. 그 후 유포로 바뀐다. 박제상이 이곳에서 왜로 출발한 것을 보면 짐작이 되지만, 왜구들도 신라로 쳐들어올 때 이곳을 애용(?)했다.

박제상 발선처 비 - 울산 시내에서 북향하여 정자에 닿으면 북쪽으로 포항, 서쪽으로 경주에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 삼거리에서 경주 쪽으로 좌회전하면 100미터도 안 간 지점에 도로 왼쪽으로 작은 언덕이 있다. 이 언덕이 유포석보 유적이고, 그 언덕 위에 박제상 관련 비석이 세워져 있다.
 박제상 발선처 비 - 울산 시내에서 북향하여 정자에 닿으면 북쪽으로 포항, 서쪽으로 경주에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 삼거리에서 경주 쪽으로 좌회전하면 100미터도 안 간 지점에 도로 왼쪽으로 작은 언덕이 있다. 이 언덕이 유포석보 유적이고, 그 언덕 위에 박제상 관련 비석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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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신라 때부터 이 마을 뒷산에는 돌로 쌓은 작은 성이 있었다. 그 작은 성을 '석보'라 하는데, 유포의 것이기 때문에 '유포 석보'가 되었다. 지금 '신라충신 박제상공 사왜시발선처' 비석이 세워진 곳은 유포석보 중 가장 낮은 지점인 셈.

도로변에서 50보 떨어진 작은 언덕 위 유포석보 하단에 올라 '왜에 사신으로 가는 박제상의 배가 처음 출발한 곳'이라는 내용의 비석을 매만지며 동해바다를 바라본다. 문득 박제상이 처참하게 죽고만 대마도에 한 번 가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대마도로 한번 떠나볼 것인가? 강풍에 출렁이는 동해의 파도가 오늘 따라 유난히 마음을 짓누른다.


까치와 함께 동해로 들어온 탈해왕


가락국(駕洛國) 바다 가운데에 배 한 척이 와서 닿는다. 수로왕과 백성들이 북을 치면서 그들을 맞이했다. 그런데 갑자기 배는 계림(鷄林) 동쪽 아진포(阿珍浦,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로 달아났다. 혁거세왕의 고기잡이 할멈인 아진의선(阿珍義先)이 바다 복판에 까치들이 새까맣게 모여들어 울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여기는 바다 가운데에 본래 바위가 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까치들이 모여들어서 울고 있을까?"

알고 보니 그것은 바위가 아니라 까치들이 온통 뒤덮은 배였다. 배 안에는 궤짝이 하나 있었다. 까치들은 그 궤짝을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진의선은 배를 끌어당겨 숲의 나무에 매어 놓은 다음 궤를 열어 보았다. 궤 안에는 단정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고, 또 갖가지 보석들과 많은 노비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7일 동안 사내아이를 잘 대접했다. 그제야 사내아이가 말을 했다.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이오, 부왕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積女國) 왕녀(王女)로 왕비(王妃)로 삼은 지 오래 되어도 아들이 없자 기도를 드렸는데 7년만에 커다란 알 한 개를 낳았소. 불길하게 생각한 대왕은 '인연이 있는 곳에 닿아 나라를 세우라'고 빌어주며 나를 배에 띄워 보내었소.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였고, 지금 이곳에 도착한 것이오."

아진포의 탈해 도착지 유적
 아진포의 탈해 도착지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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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진(포)'에 사는 '의선'할멈이 신라 토박이가 아닌, 외지에서 온 사람인 탈해를 처음 발견한 이곳은 경상북도 기념물 79호 '탈해왕 유허'로 지정되었다. 일대는 소규모 공원화하여 숲으로 가꾸어졌다. 숲속에는 탈해가 나타난 사실을 기념하여 유허비도 세워졌다. 1845년의 일이다.

탈해왕 유허는 월성원자력발전소의 정문 왼쪽 공원 '안'에 있다. 일반도로에서 본다면 사람 키의 두 길은 되어보이는 철책 '안'이다. 그 탓에 정말 찾기가 어렵다. 필자도 문무왕 산골처와 감은사터를 찾는 길에 네 번이나 남쪽으로 동해안을 따라 내려가 본 끝에 간신히(?) 볼 수 있었다.

일반도로변에 차를 세운 뒤 월성원자력발전소 철책 사이로 사진기를 집어넣어 찍은 탈해 유허지. 그러나 이 도로는 주정차를 할 여유가 없는 길이라 역사여행 답사자라 할지라도 이 인근에서 탈해유허를 찾을 생각은 하기 어렵다. 사진 왼쪽 위로 원자력발전소 회사 건물이 보인다.
 일반도로변에 차를 세운 뒤 월성원자력발전소 철책 사이로 사진기를 집어넣어 찍은 탈해 유허지. 그러나 이 도로는 주정차를 할 여유가 없는 길이라 역사여행 답사자라 할지라도 이 인근에서 탈해유허를 찾을 생각은 하기 어렵다. 사진 왼쪽 위로 원자력발전소 회사 건물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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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썰미가 뛰어난 나그네는 일반도로변에 세워져 있는 유허지 안내판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것을 보았다 해도, 오른쪽에 샛길처럼 난 회사 정문 출입용 길로 들어가 바리게이트를 좌회전 우회전 거쳐야만 역사유적지에 닿을 수 있다는 사실까지야 어찌 짐작이나 하겠는가. 가장 적당한 자리를 찾아 새 이정표를 세워야 할 것이다.

정말 찾기 어려워, 네 번 찾아가 겨우 발견

이곳 유허 일대는 탈해가 처음 나타난 곳다운 신성스러움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이미 2000년 전에 탈해가 타고온 배를 숲의 나무에 묶어 두었다고 하지만, 지금의 유허 일대는 그저 드문드문 갓 심은 작은 나무들만 어수선할 뿐이다. 숲의 위용을 느낄 수준이 못 된다. 유허비가 세워진 1845년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결코 시간이 부족하지도 않았는데…

공원의 분위기는 아직도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제 각각 노는 형상이다. 신화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고, 전설의 무대라 하기에도 '2%' 이상이 부족하다. 만약 탈해 본인이 '추억 여행'을 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20년은 더 지나야 다시 이곳에 나타날 것 같다. '갖가지 보석들과 많은 노비들이 가득 탄 배'를 묶어둘 만한 거목들이 있어야 탈해의 마음이 움직일 것 아닌가. 역시 역사유적지는 고목이 울창해야 제멋이 난다는 사실을 석탈해 유적지에서 새삼 깨닫는다.

아진포에 있는 탈해유허비는 1845년에 세워진 것이다. 물론 사진에 보이는 큰 비석은 관광안내판인 셈이고, 1845년에 세워진 것은 나무 사이의 비각 안에서 보호를 받고 있다.
 아진포에 있는 탈해유허비는 1845년에 세워진 것이다. 물론 사진에 보이는 큰 비석은 관광안내판인 셈이고, 1845년에 세워진 것은 나무 사이의 비각 안에서 보호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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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함산에 얽힌 석탈해 이야기

탈해는 동해안 아진포에 도착한 7일 후 토함산 정상에 올라 다시 7일간 머물면서 거주지를 살핀 끝에 반월성 안 호공의 집을 빼앗기로 마음먹는다.
 탈해는 동해안 아진포에 도착한 7일 후 토함산 정상에 올라 다시 7일간 머물면서 거주지를 살핀 끝에 반월성 안 호공의 집을 빼앗기로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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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는 머리 회전이 대단한 아이였다. 아진의선에게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내력을 말한 아이는 그 길로 토함산 위에 올라 돌집을 지은 후 7일 동안 머무르면서 성(城) 안에 살 만한 곳이 있는지 관찰하였다. 아이는 호공(瓠公)의 집을 빼앗기로 작정했다. 아이는 남몰래 숫돌과 숯을 호공의 집 곁에 묻은 다음, 이튿날 아침 찾아가서 말했다. 

"이 집은 옛날[昔] 우리 조상들이 살던 집이오."

아이와 호공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다. 결국 재판을 받게 되었다.

"무엇으로 네 집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느냐?"

아이가 대답했다.

"우리 조상은 본래 대장장이였소. 그런데 잠시 떠나 있는 동안에 집을 빼앗긴 것이오. 땅을 파보면 알 수가 있을 것이오."

땅을 파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다. 결국 아이는 호공의 집을 빼앗았다. 조상들이 옛날[昔]에 살았던 집을 빼앗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에게는 석(昔)씨 성이 붙었다.
 

탈해가 빼앗은 호공의 집은 반월성 안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반월성 안은 낮이나 밤이나 호젓해서 산책하기에 아주 적격이다.
 탈해가 빼앗은 호공의 집은 반월성 안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반월성 안은 낮이나 밤이나 호젓해서 산책하기에 아주 적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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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공은 누구인가? 삼국사기에 보면 혁거세왕은 재위 38년(기원전 20) 그를 마한에 사신으로 보낸다. 삼국사기는 또 '호공은 집안과 성씨가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본래 왜인이었는데,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 왔기 때문에 호공이라고 불렀다'고 부연하고 있다. 아이 탈해가 집을 빼앗으려고 덤볐을 당시 호공은 장관급 고관이었으며, 그 역시 혁거세나 탈해처럼 서라벌 토박이가 아니라 세력이 강한 외지인이었다.

그런데도 아이가 나타나 호공의 집을 빼앗았다. 대단한 아이 아닌가! 그래서 2대 임금 남해왕은 그 아이가 지혜로운 인물임을 간파, 맏공주와 결혼을 시킨다.

탈해의 능력과 지혜를 증언하는 일화들

탈해의 지혜로움과 초인적 능력을 증언하는 유명한 일화는 한 가지 더 있다. 어느 날 동악(東岳, 토함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백의(白衣)를 시켜 물을 떠 오게 했다. 백의는 물을 떠 가지고 오다가 자신이 중간에서 먼저 마셨다. 그리고는 물을 탈해에게 내밀려고 했다. 하지만 이게 무슨 조화인가. 물그릇이 입에 붙어 떨어지지를 않았다. 탈해가 꾸짖자 백의는 "앞으로는 감히 먼저 마시지 않겠습니다." 하고 맹세했다. 그제야 물그릇이 입에서 떨어졌다. 이때부터 백의는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감히 탈해를 속이려 들지 않았다.




태그:#탈해, #박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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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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