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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는 우리나라 역사여행의 '금(金)'이다. 1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는 아득한 세계사 전체에서도 서양의 로마제국과 동양의 신라가 있을 뿐인데, 경주는 그 '천년의 왕국' 신라에서 다시 1천 년 내내 '서울'이었으니, 세상에 다시 없는 희귀한 '천년 왕도(王都)'이다.

'희귀하다'의 준말은 '귀하다'이다. 금(金)도 희'귀'하기 때문에 '귀'금(金)속의 상징이 되었다. 진흥왕이 중국에 보낼 국가 문서에 서명을 하면서 '金'진흥이라 쓴 것도 그 때문이다. 진흥왕의 서명은 성씨가 공식적으로 사용된 우리나라의 첫 사례로 확인된다. 진흥왕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金'을 왕족의 성씨로 삼았던 것이다.

금이 귀금속의 상징이듯 고분은 경주의 상징이다. 흔히 산에 있기 때문에 산소(山所)라 불리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무덤들과 경주의 고분은 다르다. 경주의 고분들은 평지에 위풍당당하게 자리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규모들도 동산만큼 커서 국내외 여행자들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금척고분군의 여름 풍경. 역시 경주의 고분군답게 너른 평지에 터를 잡고 있다.
 금척고분군의 여름 풍경. 역시 경주의 고분군답게 너른 평지에 터를 잡고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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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고분들, "나는 '산(山)소'가 아니야"

고분들이 한 곳에, 그것도 평지에 운집해 있는 모습은 다른 곳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광경이다. 부여 능산리(陵山里)의 백제 고분군이나 경북 고령 주산(主山)의 대가야 고분군 등도 있지만, 그곳 무덤들은 지명 그대로 '산'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경주의 고분군들은 온통 평지에 널려 있다. '과연 신라의 고분답다!'는 찬탄이 아니 나올 수 없다.

서쪽에서 경주로 들어갈 때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유적지는 '金'척고분군이다. 이름에 '金'까지 들어 있으니 경주 역사여행의 들머리로서 전혀 부족함이 없다. 세계 제일의 패권 국가였던 당나라와의 관계에서 빚어진 역사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금척 고분군! 황금으로 만든 자가 무덤 속에 들어 있는 곳이다. 물론, 무덤 속에 파묻힌 이래 지금까지 그 금자를 본 사람은 없다. 마치 경주를 제대로 본 사람이 거의 없는 것처럼.

부여의 능산리 고분군은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이는 신라의 고분들이 평지에 위치하는 것과 대조가 되는 모습이다.
 부여의 능산리 고분군은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이는 신라의 고분들이 평지에 위치하는 것과 대조가 되는 모습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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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국의 '주산 고분군'도 경주 고분들과 달리 산 정상부에 자리잡고 있다.
 대가야국의 '주산 고분군'도 경주 고분들과 달리 산 정상부에 자리잡고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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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보물인 '금자'가 묻혀 있는 곳

금척고분군으로 가려면 경주IC 아닌 건천IC에서 내려야 한다. 경주IC에서 내리면 무열왕릉, 김유신 묘, 법흥왕릉, 진흥왕릉, 금척 고분군, 단석산 마애불 등을 보기 위해 다시 경주를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오락가락, 우왕좌왕 여정이다. 그렇게 되면 보통 사람들은 귀찮아서라도 금척고분군 답사를 포기해버린다.

건천(乾川)의 도로는 고분군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뚫려 있다. 도로 좌우로는 큰 것 24기, 작은 것 14기, 모두 38기의 고분들이 마을처럼 운집해 있다. 이곳은 대단한 세력가나 소국의 웅거지였던 게 분명하다.

그런데 감히 가운데를 뭉개고 예전에 없던 신작로를 내었다? 물론 왜인들의 짓이다. 왕년의 권력가와 그 후손이 여전히 당당한 세도를 누리고 있거나, 조선이 국가 주권을 지켰다면 지금의 참상은 상상도 하지 못할 풍경이리라. 국토 곳곳에 남아 있는 식민지의 흔적은 오늘도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금척고분군. 무덤 위에 자란 거목 고목이 세월과 권력의 무상함을 잘 말해준다.
 금척고분군. 무덤 위에 자란 거목 고목이 세월과 권력의 무상함을 잘 말해준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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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에 따르면, 신라왕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금자[金尺]를 주었다. 왕이 꿈에서 깨어나 보니 손에 그것이 쥐어져 있었다. 왕은 꿈에 신인이 가르쳐준 대로 죽은 사람을 금자로 재어보았는데 다시 살아났고, 병든 사람을 재면 병이 나았다. 소중하게 간직하여 나라의 보물로 자자손손 물려오던 중, 당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이 신기한 금자를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왕은 거절하기 위해 38기의 무덤을 만들어 금자를 감추었다. 그 후 이 금척 고분(金尺古墳)의 이름을 따서 마을을 '금척'이라 부르게 되었다.

금척이 묻힌 위치는 매장 당사자인 왕이 급사한 이래 비밀이 되었다. 38기의 고분 중 어느 무덤에 숨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 도굴을 시도한 일제도 당연히 그것을 손에 넣지 못했다. 죽은 사람을 살리고, 가난한 사람을 단숨에 부자로 만들어주는 신이한 금자가 외적 도굴범의 손에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여행자는 옛길과 상징을 중시하며 걸어야

금척 고분군은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 건천IC에서 내리지 않고 경주IC에서 내리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사와 문화유산을 찾아다니는 답사여행자는 일반지도의 도로를 따라다녀서는 안 된다. 상징과 옛길을 중시해야 한다.

신라인들은 건천을 지나 영천, 그리고 달구벌로 다녔다. 그 길을 걷는 것이 답사여행이다. 죽은 사람을 살려내고 가난한 이를 부자로 만들어낸다는 금자가 묻혀 있다는 금척고분군! '金'과도 같이 오랜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경주 답사여행의 첫 관문이다. 경주에 가면, 꼭 금척고분군부터 먼저 찾아보자.


태그:#금척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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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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