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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터. 선덕여왕릉 입구에 있다.
 사천왕사터. 선덕여왕릉 입구에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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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릉부터 경주박물관 맞은편까지 이어지는 얕은 언덕을 신라 사람들은 낭산(狼山)이라 불렀다. 높이는 104m에 지나지 않지만 둘레 지형이 구불구불하여 마치 짐승[狼]처럼 여겨졌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산은 왕의 명령에 따라 나무 한 그루 베어낼 수 없는 신령한 땅으로 우러름을 받았다. 삼국사기는 413년(실성왕 12)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낭산에 구름이 피어올라 누각처럼 보였고, 향기가 퍼져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왕이, 이는 틀림없이 신선이 내려와 노는 것이니 응당 복스러운 땅이라고 하여, 그 후로는 이곳에서 벌목을 하지 못하게 했다.

사천왕사의 당간지주가 도로 변에 서 있다. 당간지주 옆을 지나면 선덕여왕릉으로 간다.
 사천왕사의 당간지주가 도로 변에 서 있다. 당간지주 옆을 지나면 선덕여왕릉으로 간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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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흔히 접근하는 낭산의 길은 사천왕사 터에서 시작된다. 사천왕사는 <제망매가>와 <도솔가>를 지은 월명사가 살았던 절로 유명하다. 피리를 잘 부는 스님이 밤에 사천왕사 앞을 거닐면서 악음을 내면 흘러가던 달이 멈춰 섰다고 전한다. 절은 사라지고 목 없는 귀부만 남았지만 사천왕사터는 사적 8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천왕사 창건은 부처의 힘으로 당나라를 몰아내겠다는 신라인들의 불심이 낳은 대역사였다. 실성왕 12년 이래 신유림(神遊林)이라 여겼던 숲이니 호국불교를 위한 거대 사찰 창건 장소로는 아주 제격이었다. 공사의 시작은 671년(문무왕 11), 끝은 679년(문무왕 19년).

'신이 노니는 숲'에 세워진 사천왕사

사천왕사터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선덕여왕릉으로 가는 산길이 이어진다. 사적 182호인 선덕여왕릉은 그녀가 살아 있을 때 지정한 곳에 쓴 묘소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여왕은 아무 병도 없을 때 여러 신하들에게 일렀다.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 속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신하들이 그게 어느 곳인지 알 수 없어서 물으니 왕이 말하였다. 

"낭산 남쪽이니라."

과연 선덕은 자신이 예고한 바로 그 날에 죽었다. 신하들은 왕이 예고한 낭산 양지에 그녀를 장사지냈다. 그 10여 년 뒤, 문무대왕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를 세웠다. 불경에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했으니 그제야 선덕대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가 있었다.

선덕왕, 한국인의 가슴에 남은 아름다운 여왕

왕릉 입구의 안내판에는 선덕여왕의 공적이 소개되어 있다.

'(아들이 없는 진평왕의 맏딸로 태어난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첨성대를 만들고, 분황사를 창건하였으며, 황룡사 9층 목탑을 건축하는 등 신라 건축의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또 김춘추, 김유신 같은 인물을 거느리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선덕여왕이 분황사를 창건한 때는 재위 3년(634)이다. 분황사(芬皇寺)는 향기로운[芬] 임금(皇]의 절[寺]이라는 뜻이다. 한국사 5천년이 낳은 향기로운 임금이라면 단연 선덕여왕이다. 지금도 선덕여왕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름답고 지혜로운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지만, 신라 당대에도 그녀는 국민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것이 틀림없다. 본문의 일부만 삼국유사 등에 남아 있는 <수이전>의 지귀(志鬼) 설화가 바로 그 상징적 증거이다.

휘영청 굽은 소나무들 사이로 선덕여왕릉이 여왕의 이미지만큼이나 곱게, 숨은 듯 보인다.
 휘영청 굽은 소나무들 사이로 선덕여왕릉이 여왕의 이미지만큼이나 곱게, 숨은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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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귀라는 시골청년이 하루는 서울에 나왔다가 우연히 인파들 속에서 선덕여왕을 보았다. 너무나 아름다운 선덕여왕을 본 지귀는 대뜸 여왕을 사모하게 되었다. 그 이후 지귀는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않으며 선덕여왕을 부르며 거리를 떠도는 미치광이가 되고 말았다.

"여왕이여, 아름다운 여왕이여, 사랑하는 선덕여왕이여!"

걱정을 한 관리들은 지귀를 붙잡아 호통도 치고 매질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길을 지나는 선덕여왕 앞으로 뛰쳐나가며 '나의 사랑하는 여왕이여!' 하고 외치던 지귀가 또 관리들에게 붙잡혔다. 감히 여왕에게 그런 행동을 했고, 또 관리들에게 체포되었으니 사람들이 웅성거리게 된 것이야 당연한 귀결이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에워싸인 여왕이 관리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신하가 쭈뼛쭈뼛하여 대답했다.

"…… 지귀라는 미친 자가…… 폐하를…… 사모한다고 외치면서 뛰어들어서……."

여왕은 관리에게 지귀가 자신의 뒤를 따라올 수 있도록 해주라고 명령한 다음, 절을 향하여 나아갔다. 여왕의 말을 전해들은 백성들은 모두 놀랐지만, 지귀는 춤을 덩실덩실 추며 여왕의 행렬을 뒤따랐다.

선덕여왕릉
 선덕여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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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 도착한 선덕여왕은 부처에게 기도를 올렸다. 지귀는 절 앞의 탑 아래에 앉아 여왕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여왕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지귀는 그 자리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기도를 마친 여왕은 탑 아래에 잠들어 있는 지귀를 보았다. 여왕은 지귀를 잠깐 바라보더니 금팔찌를 뽑아 지귀의 가슴 위에 내려놓은 다음 자리를 떠났다.

한참 뒤 잠이 깬 지귀는 여왕의 금팔찌를 보았다. 그는 여왕의 금팔찌를 가슴에 꼭 껴안고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기쁨은 가슴 속에서 불길처럼 뜨겁게 활활 타올랐다. 이윽고 지귀는 온몸이 불덩어리가 되었다. 처음에는 가슴이 타고, 나아가 머리와 팔다리가 붉게 타올랐다. 지귀는 있는 힘을 다해 탑을 잡고 일어섰고, 탑도 불기둥이 되었다. 지귀의 불은 온 거리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선덕여왕릉 정면 앞에 소나무 한 그루가 베어진 채 그루터기만 남기고 있어, 마치 지귀의 혼을 보는 듯한 애잔함을 풍긴다.
 선덕여왕릉 정면 앞에 소나무 한 그루가 베어진 채 그루터기만 남기고 있어, 마치 지귀의 혼을 보는 듯한 애잔함을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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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지귀는 불귀신이 되어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선덕여왕이 주문을 지어 백성들에게 주었다.

志鬼心中火(지귀심중화)
지귀는 마음에서 불이 일어나
燒身變火神(소신변화신)
온몸을 태우고 불신이 되었구나
流移滄海外(유이창해외)
흘러흘러 푸른 바다 밖까지 갔으니
不見不相親(불견불상친)
보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지어다

백성들은 선덕여왕이 지어 준 주문을 대문에 써서 붙였다. 이제 여왕의 주문이 붙은 집에는 불이 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불귀신이 된 지귀가 오직 선덕여왕의 뜻만은 고스란히 따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문무왕의 화장터 능지탑

선덕여왕릉을 뒤로 하고 산길을 조금만 걸으면 중생사로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 삼거리에 탑인지 무덤인지 가늠이 잘 가지 않는 문화재가 하나 버티고 있다. 이 문화재는 불국사 삼거리의 구정동 방형분에 2층을 올려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능지탑이라 부르는 이 '물건'은 이름 그대로 무덤이 아니라 탑이다. 본래 5층 석탑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문무왕의 화장터에 기념으로 세워진 게 아닌가 여겨진다.
  
능지탑 기단에 아로새겨진 십이지신상 조각을 구경하다가 낭산 서쪽 비탈의 마지막 답사지인 중생사로 향한다. 능지탑과 중생사는 약 150m 가량 떨어져 있다. 중생사에서 꼭 보아야 할 것은 보물 665호인 마애삼존불이다.

문무왕의 화장터에 세워진 능지탑
 문무왕의 화장터에 세워진 능지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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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존불은 대웅전 왼쪽에 있다. '마애'라면 흔히 절벽 같은 암석이 연상되지만 이곳은 그저 땅에 놓인 바위일 뿐이다. 게다가 안내판은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이 불상은 보살상과 신장상(神將像)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이런 예는 아주 드문 일이다. 중앙에 있는 본존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고 (중략) 왼쪽 신장상은 오른손에 검을 들었고, 오른쪽 신장상은 두 손에 무기를 들고 있다'고 해설하고 있다. 두건을 쓰고 무기를 든 불상이라니 참으로 특이하다.

중생사 삼존불은 안내판의 해설을 미리 읽지 않고서는 본존(本尊)과 좌우의 두 신장상 모두 그 형체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세월의 마모를 이기지 못한 탓일 터이고, 앞으로 점점 더 상태는 나빠질 것이 자명하다. 그 탓에, 문화재를 보호하는 것이 임무인 관청에서 보호각으로 전체를 덮어 두었다.


최승로의 아기 시절 전설이 깃든 중생사


두건을 쓴 중생사의 마애불
 두건을 쓴 중생사의 마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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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아주 작은 사찰에 머물러 있지만, 신라 시대에는 중생사가 아주 이름 높은 절이었던 듯하다. 삼국유사에는 중생사와 관련 있는 이야기가 여럿 기록되어 있다.

가장 알려진 이야기는 최승로(927∼989)의 생존 비화를 전해주는 대목이다. 견훤군이 쳐들어 왔을 때 최승로의 부모가 태어난 지 석 달도 안 된 그를 중생사 관음상 밑에 숨겨두고 피란을 갔다가 반 달 뒤에 돌아왔는데, 아기는 마치 목욕을 시킨 듯 예전보다 살결도 더 곱게 무사히 살아 있었다는 '전설'이다.

최승로는 누구인가? 신라가 멸망한 10세쯤에 아버지를 따라 개성으로 옮겨와서 살았다. 12세 무렵에는 논어 등을 왕건 앞에서 줄줄 암송하여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뒷날 최승로는 성종에게 '시무(時務) 28조'를 올려 고려가 개혁과 안정을 동시에 구축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시무는 때[時]에 맞춰 처리해야 할 정치적 행정적 일[務]들을 가리키는 말로, 과거 시험의 내용이기도 했고 임금이 관리들에게 수시로 제출을 요구했던 정책 제안서 정도로 보면 되겠다.

고려 시대 전체를 통해 시무책 전문이 <고려사> 등에 기록된 경우는 최승로가 유일하다. 그만큼 그는 왕과 관리들의 신망을 한몸에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시무책에는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일으켜야 한다, 불교의 폐단을 줄여야 한다, 스님들의 횡포를 막아야 한다, 불경과 불상을 사치스럽게 만드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 연등회나 팔관회에 사람과 노역이 동원되는 것을 줄여야 한다' 등 불교 혁파를 주장하는 내용이 많았다. 그는 부처가 살려준 어린 생명이었지만 뼛속까지 철저한 유교 신봉자였던 것이다.

중생사 마애삼존불을 보호하고 있는 비각
 중생사 마애삼존불을 보호하고 있는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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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팔공산 부인사의 선덕묘

선덕묘
 선덕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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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을 제사 지내온 선덕묘(善德廟, 현재 이름은 숭모전)는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 있다. 부인사는 2차 몽고 침입 때(1232년) 불탄 초조대장경이 보관되어 있었던 사찰이다.

선덕묘가 이곳에 위치하게 된 것은 백제 의자왕에게 대야성(합천)을 빼앗기는 등 곤경에 처한 왕이 팔공산에서 불공을 올렸는데, 그때 도인이 나타나 현재의 부인사 자리에 절을 짓고 기도하면 국난을 극복하고 통일대업을 완수할 수 있다고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그후 여왕은 한때 39동에 승려가 2천여 명이 머물게 되는 부인사를 창건했고, 어머니 마야부인의 명복도 이곳에서 빌었다. 그래서 사찰 이름이 '부인사'가 되었다.



태그:#선덕여왕릉, #능지탑, #중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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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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