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루퍼>의 포스터

영화 <루퍼>의 포스터 ⓒ 유니코리아문예투자


영화 <루퍼>에 설정된 시간은 2074년은 시간 여행이 가능해진 세상이다. 그러나 시간 여행은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범죄조직은 자신들이 제거할 대상을 죽이는데 시간 여행을 악용한다. 그들은 제거 대상을 2044년의 시간으로 보내 '루퍼'라 불리는 킬러들에게 처리하게 하여 미래에서는 시체를 없애고 과거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자를 죽이는 완전범죄를 꾀한다. 범죄조직은 루퍼를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 최종 타깃으로 루퍼 자신을 보낸다. 루퍼 스스로 자신을 죽여야 하는 운명을 거부하면 조직은 그를 처단한다.

2044년에 활동하는 최고의 루퍼 조(조셉 고든 래빗). 어느 날 그의 앞에 새로운 타깃이 나타난다. 타깃은 30년 후 미래에서 보내진 자신(브루스 윌리스). 그런데 미래의 자신은 '레인메이커'에게 살해당한 아내를 구하기 위해 2044년에 존재하는 '레인메이커'를 죽이려 한다. 미래에서 온 조는 현재의 조를 피해 시간의 역사를 바꾸려 하고, 현재의 조는 조직의 보복을 피하고자 미래에서 온 자신을 죽여야 한다. <루퍼>는 자신과 싸우는 자신의 이야기다.

시간을 지배하고 싶어하는 것은 인류의 오랜 욕망이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엿보고 싶다거나 지나간 시간을 다르게 만들고 싶어하는, 또 다른 시간대의 자신을 만나고 싶은 마음은 오랜 시간 인류가 매혹되었던 소재다. 하지만 현재의 과학과 기술에선 과거나 미래의 특정한 시간대로 이동하는 시간 여행은 불가능하다.

시간 여행이 불가능하기에 간접적으로나마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노력은 소설과 영화 등에서 이루어졌다. 소설과 영화는 절대적으로 시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설정과 역사는 바뀔 수 있다는 설정, 그리고 다양한 평행 시간대가 존재한다는 설정 등의 방식으로 시간 여행을 다루었다.

<루퍼>는 <타임머신>이나 <백 투 더 퓨쳐>같이 시간 여행에 집중한 영화는 아니다. <루퍼>는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던 '자신'들이 같은 시간대에 만난다는 설정으로 물질적으로 같은 존재이지만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진 존재의 정체성을 짚는다. 그럼으로써 시간과 기억을 연결한다.

 영화 <루퍼> 속 한 장면

영화 <루퍼> 속 한 장면 ⓒ 유니코리아문예투자


시간과 기억으로 <루퍼>를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영화가 테리 길리엄 감독의 <12 몽키즈>다. <12 몽키즈>의 주인공은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해 계속 과거로 보내진다.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과거의 시간에서 다시 자신의 시간을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예정된 운명을 벗어날 수 없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자기의 죽음을 바라보던 어릴 적 자신을 떠올리게 된다.

<12 몽키즈>는 크리스 마르케 감독의 1962년 영화 <활주로>를 원안으로 삼았던 영화다. <활주로>는 정지된 사진을 나열하는 방식을 통해 기억에서 재구성되는 시간의 개념을 다루었다. 영화 전체에 깔린 의식엔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시대의 공포가 깔렸다.

데뷔작 <브릭>으로 선댄스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고, <블룸 형제 사기단>으로 한 박자 쉬었던 라이언 존슨 감독은 <루퍼>가 어떤 계보에 속하는 영화인지를 분명히 했다. <활주로> 속 핵전쟁의 두려움과 <12 몽키즈> 속 세기말의 공포는 <루퍼>에 스며들어 있다. <루퍼>에선 레인메이커가 장악한 암흑의 도시가 주는 공포로 나타난다. <12 몽키즈>의 주연 배우였던 브루스 윌리스가 <루퍼>에서 주연 배우로 나온다는 사실은 태생에 대한 증명서에 가깝다.

기억을 다룬 유명한 영화 <인셉션>의 주연 배우였던 조셉 고든 래빗도 묘하게 이루어진 조응이다. 여기에다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는 자유 의지를 다루었던 영화 <컨트롤러>의 주연 배우 에밀리 블런트까지 연결하면 <루퍼>에 나오는 시간, 기억, 의지의 모든 구성 요소가 완성된다.

현재의 존재와 미래의 존재가 만난다는 설정은 흥미롭지만, 전체적으로 새로운 면이 풍부하지는 않다. 그러나 현재의 존재가 새로운 미래에 희망을 걸고, 미래의 존재는 자신이 체험하지 못했기에 알지 못하는 기억이 만들어지는 선택을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으로 <루퍼>는 비범해진다. <활주로>와 <12 몽키즈>에서 다룬 사유에 <마이너리티 리포트>, <컨트롤러> <소스 코드>가 다루었던 자유 의지, 기억 등을 훌륭하게 접목한다.

분명 <루퍼>는 뛰어난 걸작 SF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동시대에 나온 나태한 SF 영화들보다 똑똑한 SF 영화임은 확실하다. 그리고 <활주로>와 <12 몽키즈>의 영화적인 사유를 이어가는 흥미로운 적자이기도 하다. 시간 여행을 다룬 영화는 이렇게 또 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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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24프레임의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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