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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니스 영화제의 <피에타>
ⓒ 김기덕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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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리뷰에는 줄거리가 담겨 있습니다.

<피에타>는 김기덕 감독의 셀프 다큐멘터리 <아리랑>과 연결되는 영화처럼 보입니다. 믿었던 후배에게 배신당하고 산속에서 3년간 방황하던 김기덕 감독의 절규가 그대로 묻어 있습니다. 혹자는 산속에 들어가면 속세를 잊고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합니다. 혹은 종교를 통해 스스로의 구원을 찾기도 하지만, 김기덕 감독은 3년간 칼을 갈고 나와 복수를 다짐한 것으로 보입니다.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15년 동안 군만두만 먹으며 키웠던 복수심에 비견할 바는 못 되겠지만, 적어도 이창동 감독이 <시>를 통해 써내려간 복수심에 비견될 만큼 강렬합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항상 얼마나 극단적인지가 화제였습니다. 영화가 하고 싶은 이야기나 배우들의 연기를 떠나서 관객을 불편하게 하는 코드를 갖고 있어 외면 받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감독이 산속에서 내려와 처음 만든 장편 극영화 <피에타>는 과연 어떨까요? 눈뜨고 보기 힘들었던, 혹은 눈 감고도 계속 끔찍한 장면을 상상하게 만들었던 그의 상상력은 이번에도 여전할까요?

영화를 아직 못보신 분들을 위해 힌트를 드리자면 초반 30분은 여전히 셉니다. 하지만 강도(이정진 분)가 모자 관계를 인정하는 순간부터는 한결 보기 편해집니다. 그리고 미선(조민수 분)이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뒤에는 왜 초반부에 저렇게 가학적인 장면이 필요했는지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오히려 더 강하고 잔인했어야 하는 게 아니었는지, 이정진의 연기력을 탓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주 인상적이면서도 강렬한 마지막 장면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는 베니스에서 황금사자상으로 인정받았지만, 한국 관객들에게도 선택받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흰색과 검정색은 똑같다

 근친상간 혹은 모자 관계의 확인
ⓒ 김기덕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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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에서 김기덕 감독은 자신의 영화 세계를 설명하면서 "흰색과 검정색은 똑같다"고 말합니다. 이는 <비몽>에 나오는 대사이기도 한데, 세상은 자꾸만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잘난 것과 못난 것,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려 합니다. 하지만 김기덕에게 그것들은 겨우 백짓장 한 장 차이입니다. 인간이라는 작은 존재가 만들어내는 작은 구분일 뿐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그 차이를 자꾸만 의식하려 할 때 김기덕은 날것 그대로의 상태를 드러냅니다. 사회의 질서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김기덕의 영화가 낯설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김기덕의 영화에는 항상 긴장감이 흐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른다는 긴장감은 화면 안에도 있지만 화면 밖에서도 존재합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긴장감의 근원은 사도-마조히즘입니다. 때리고, 맞고, 찌르고, 복수하고, 가학적인 쾌락과 타락. 마치 정글 속 동물들처럼 단순하고 1차원적인 이런 세계는 기존의 관습을 부정하기 때문에 더 자극적입니다. 3D 영화가 만들어지는 시대에도 계속되는 야생동물 시네마라고 할까요.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동물 다큐멘터리가 약육강식의 세계 속에서도 결국 감동을 이끌어내듯 김기덕의 야생동물 시네마도 인간이 가진 본성을 헤집어놓은 뒤에 결국 내면을 조명합니다. 따라서 김기덕의 영화는 아무리 잔혹하고 당황스러워도 꼭 끝까지 봐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김기덕 감독은 <아리랑>에서 "배우는 악한 연기를 할 때 더 자연스럽다"고 말합니다. 인간 내면에는 악한 본성이 있어서 그것을 끄집어내는 것은 착한 연기보다 더 쉽다는 것입니다. 선한 마스크를 갖고 있던 이정진이 <피에타>에서 악한 모습을 그리 잘 연기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선입견을 제하고 본다면 김기덕 감독이 인간을 대하는 기본 태도, 성악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종교와 자본주의

 소나무에 물을 주는 강도(이정진 분)
ⓒ 김기덕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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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서부터인가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서 빠지지 않는 게 있다면 바로 종교입니다. 꼭 절이나 스님은 한 번씩은 등장하고 교회도 등장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그만큼 종교는 좋든 나쁘든 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더구나 김기덕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소외되고 삶이 팍팍하고 낮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종교는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구원자임과 동시에 그들을 사지로 밀어내는 배신자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과 <사마리아>는 불교와 기독교를 가장 직접적으로 언급한 영화였죠.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을 가진 단어 'Pieta'를 제목으로한 <피에타>는 포스터부터 성모 마리아와 예수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습니다. 도입부에서 성냥갑 같은 건물에 달린 교회의 간판을 보여주면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관계를 기독교적 상징의 원형으로 끌어올린 뒤 그 원초적인 관계 속에 천민 자본주의가 잉태한 증오와 복수라는 테마를 담았습니다. 그곳은 도시화가 예정된 대한민국 서울 청계천, 돈이면 사람 목숨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원초적인 자본주의와 분노 가득한 복수심이 만나는 곳입니다.

감독이 똑같은 색이라고 했던 흰색과 검정색은 영화 중반부터 역전돼 강도는 그에게 소중한 것을 지켜야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언제 보복당할지 두려워합니다. 30여 년을 외로움 속에 살아온 이 남자에게 자신이 엄마라고 주장하는 여자가 찾아옵니다. 성서 속 마리아처럼 그녀가 그를 낳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강도는 자신의 점을 잘라 그녀에게 먹인 뒤 그녀가 엄마임을 인정합니다. 마치 천주교에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며 살집을 잘라주는 것을 연상시킨 장면입니다. 그녀에게 마음을 연 강도는 속죄하고 구원을 바라지만, 성모는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대신 그가 예전에 고통을 줬던 상황을 재연하고는 스스로 몸을 던져 복수를 이룹니다. 10년 전 <나쁜 남자>의 선화가 자신을 창녀로 만든 한기를 구해준 것과는 전혀 다른 복수. 그만큼 김기덕도 변했습니다.

다시 이 글의 처음으로 돌아와볼까요? 김기덕 감독이 산속에서 보낸 3년. 배신당하고 복수심에 불탄 그는 제대로 칼을 갈고 내려왔을까요? 복수심에 눈먼 그는 흉폭하게 닭, 토끼, 장어 같은 동물들을 죽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패배한 자들에게 무자비하게 상해를 입혀 보험금을 받아내는 강도에 자신을 대입합니다. 하지만, 어느 날 진짜 엄마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은 성모를 만나 복수가 전부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배신자를 이렇게 만든 원인을 찾습니다. 그속엔 현대인에게 뿌리깊은 자본주의의 병폐가 있었습니다. 강도는 마지막 장면에서 스스로의 몸을 차에 묶어 속죄를 구합니다. 마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 무거운 돌덩어리를 허리에 묶고 눈덮인 겨울 산을 맨 몸으로 오르는 감독 자신의 모습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인간이 먹는 동식물들은 거의 전부 하우스에서 재배합니다. 그러한 동식물들은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 자라기 때문에 그 자체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살아가는데 이를 먹고 자란 현대인들은 그 스트레스를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현대인들에게 몸으로 스트레스를 축적시키는 방식입니다. 김기덕은 산속에서 지낸 3년 간 자신이 현대인들과 부대껴 살면서 불안에 떨어야 했던 근원을 파고들었고, 이를 영화로 상징화했습니다.

물론 <피에타>가 전혀 개인적인 감정 없이 만든 영화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16년간 영화만 생각해온 그이기에, 또 배신에 목놓아 울 줄 아는 그이기에 그가 만든 작품에 그의 인생을 투영해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유럽 영화제에서 칭찬받으면서도 한국 관객과의 소통에 힘겨워했던 그는 아마도 천민 자본주의의 최전선에 있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탄생한 돌연변이 같은 존재이자 가장 유명한 이단아일 것입니다.

서양의 백인들에게 인정 받았다고 하면 무조건 숭배하고 보는 한국 사람들이 그럼에도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흰색과 검정색이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만큼 적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태어날 때부터의 삶이 규격에 맞춰져서 이탈자는 낙오자로 불리우는 사회, 검은 것을 검다고 말하는 것조차 용기가 필요한 사회에서 흰색과 검정색의 경계를 말하는 예술가를 받아들이기에는 우리의 아량이 너무 좁은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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