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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없는 방>(왼쪽)과 <사람 냄새>
 <먼지 없는 방>(왼쪽)과 <사람 냄새>
ⓒ 보리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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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무언가에 목소리를 내고, 광장에 나와 발언을 할 때 그들이 왜 그럴까를 생각해봤어요. 미안함과 죄책감보다는 실은 사람을 애틋하게 연민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서 움직인 거라 생각해요. 두 책은 그들이 얼마나 힘들었나보다는 돌아가신 황민웅씨, 황유미씨 그리고 그들의 가족 정애정(황민웅씨 부인)씨, 황상기(황유미씨 아버지)씨를 사랑할 수 있도록 러브스토리를 만든 거예요."

김성희 작가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울림이 있는 책 소개였다. 무거운 사실을 단순히 전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따뜻한 사랑으로 그 사실을 담겠다는 거다. 사람들의 무관심을 극복하고 행동을 이끌어 내기 위한 작가의 전략인 셈이다.

그 '무거운 사실'은 바로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사람과 그 가족들의 삶이다. '행동'은 국민들이 이 문제에 공감하고 삼성에 '똑바로 하라'는 눈치를 주자는 것이다.

백혈병 러브 스토리... 연결고리는 '삼성' 하나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다 2007년 급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황유미(왼쪽)와 아버지 황상기(오른쪽). 김수박 작가의 <사람 냄새>는 황상기씨를 주인공으로 산업재해로 인정받기 위한 그의 투쟁 과정을 담았다.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다 2007년 급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황유미(왼쪽)와 아버지 황상기(오른쪽). 김수박 작가의 <사람 냄새>는 황상기씨를 주인공으로 산업재해로 인정받기 위한 그의 투쟁 과정을 담았다.
ⓒ 반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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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스토리는 두 편이지만 서로 이어져 있다. 시기는 다르지만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사람의 가족 이야기다. 이 책을 낸 보리출판사도 '삼성 백혈병의 진실 세트'라는 기획으로 판매 중이다.

하나는 김수박 작가의 <사람 냄새>. 부제는 '삼성에는 없는 단 한 가지'다. <사람 냄새>는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근무하다 2007년 급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의 시선을 담는다. 삼성이 내세우는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슬로건이 잘 어울리게 삼성이 만든 '한 가족의 이야기'다. 아버지의 시선으로 사랑스러운 딸의 마지막 가는 길을 그렸다. 감정을 최대한 절제한 채로. 읽다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반면 삼성전자 직원들의 집요한 회유도 대비된다. '백혈병은 개인의 병'이라며 설득하는 직원들. 언뜻 보면 삼성 백혈병 문제가 삼성의 비리, 3세 승계 문제와는 관련 없어 보인다. 하지만 김수박 작가는 두 이야기를 적절히 배치해 삼성 문제를 극대화해 나간다.

김성희 작가는 자료조사 더불어 끊임 없는 현장 노동자들에 대한 취재를 통해 한 번도 제대로 공개된 적 없는 반도체 공장을 만화로 그려 냈다.
▲ 먼지 없는 방 김성희 작가는 자료조사 더불어 끊임 없는 현장 노동자들에 대한 취재를 통해 한 번도 제대로 공개된 적 없는 반도체 공장을 만화로 그려 냈다.
ⓒ 보리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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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는 김성희 작가의 만화책 <먼지 없는 방>. 부제는 '삼성반도체 공장의 비밀'이다. 이 책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동료 황민웅씨를 만나 결혼한 정애정씨가 주인공이다.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만난 남편 황민웅씨를 백혈병으로 잃은 정애정씨의 홀로서기가 담담하게 그려진다. 김성희 작가는 모 반도체 연구소의 도움과 현장 노동자와 한 인터뷰를 통해 한번도 제대로 공개된 적이 없는 반도체 공장을 그려냈다.
김성희 작가에 따르면 '클린룸'이라 불리는 반도체 공장에서 노동자들은 방진복, 방진모, 마스크를 쓴다. 에어 샤워가 필수다. 이름 그대로 깨끗해야 한다. 어떤 먼지도 들어가서는 안 되기에. 한마디로 노동자들이 입고 쓴 복장은 사람을 보호하는 복장이 아닌 철저히 반도체를 위한, 반도체의 복장이다.

김성희 작가는 "총 99가지의 화학약품이 제조공정에 들어간다"며 "화학약품 냄새가 나면 대한민국 공장 어디에서도 나는 냄새라고 노동자들은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그렇게 유해한 약품들은 몸을 파고 들어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생리불순과 불임 등의 부작용이 발생했다. 가장 큰 부작용은 혈액암, 즉 백혈병이었다.

2010년, 비밀리에 진행된 '캔디 프로젝트'

김성희 작가는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황민웅씨의 아내 정애정씨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담아냈다. 김 작가는 무거운 주제를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로 담담하게 그려냈다.
▲ <먼지 없는 방>의 김성희 작가 김성희 작가는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황민웅씨의 아내 정애정씨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담아냈다. 김 작가는 무거운 주제를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로 담담하게 그려냈다.
ⓒ 강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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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30일 오후, 서울 마포 홍대 근처의 북카페에서 김성희·김수박 작가를 만났다. 책이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2년. 좌충우돌 진행된 집필작업을 설명하느라 인터뷰도 두 시간 넘게 걸렸다.
두 책의 시작은 2010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0년 2월 삼성의 비리를 고발한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는 책이 나온 이후, 윤구병 보리출판사 대표가 두 작가에게 삼성 반도체의 백혈병 문제를 다루자고 제안했다. '문제 생기면 내가 다 책임진다.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말과 함께.

애초 집필 작업은 '캔디 프로젝트'로 명명됐다. 작품의 엄중성을 생각해서 일단 비밀리에 진행하기로 결정한 것. 출판사에서도 담당 편집자만 알게 했다. 혹시라도 이 작업이 새어나가면 집필이 중단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두 작가는 일단 돌아가신 분들의 가족을 만나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쉽지는 않았다. 가족들의 격앙된 감정 상태 때문에 꼬치꼬치 캐묻기 어려웠다. 그들의 감정을 낮추는 시간이 필요했다. 집필 작업의 70%는 유가족들과 투쟁한 시간이었다. 재판에도, 추모행사에도 함께했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신뢰가 생겼고 가족들도 서서히 마음을 열게 됐다. 김수박 작가는 "그러고 나서 보니 작가로서 책임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이 책임감은 책 수익금 일부를 삼성 백혈병 노동자들의 치료비에 보태는 데로 이어졌다.

"반도체 기술은 무어의 법칙, 노동현실은 70~80년대"

백혈병을 치료하는 데 수천만 원에서 1억 원이 넘는 치료비가 들었다. 항암치료, 몇 번에 걸치는 수술. 2, 3년이 넘는 투병기간. 때문에 삼성은 유가족들에게 '이 병은 개인의 질병일 뿐이다'는 말로 위로금을 제시했다. '병 주고 약 주는' 회유는 집요했고 몇몇 사람들은 삼성과 합의하기도 했다. 김성희 작가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그 목숨을 팔아 돈을 받는다는 감정을 이입시켜 보면 삼성의 회유가 어떤 성격인지 쉽게 알 수 있다"고 답했다. 김수박 작가는 그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분노했다고 말했다.

"자식, 남편을 잃은 사람이 그 돈을 어떻게 받겠어요? 그 돈을 받아서 살림이 나아지겠어요? 나머지 삶은 인생이 인생이 아니에요."

삼성의 집요함에도 황상기씨와 정애정씨는 끝까지 버텼다. 그들은 반도체 백혈병을 산업재해로 인정받기 위해 행정소송을 벌였다. 2007년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인정을 신청했지만 '백혈병 발병과 반도체 공정 사이의 인과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기각됐다. 그들은 행정법원에 항소했다. 결국 지난해 6월 서울 행정법원은 삼성전자 반도체 직원의 유가족 등 5명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취소 처분' 소송에서, 황상기-이선원씨에게는 승소 결정을, 정애정씨를 포함한 나머지 3명에게는 기각 결정을 내렸다. 절반의 성공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근로복지공단은 지난달 11일, 삼성전자 온양공장 반도체 공장에서 5년간 근무한 김지숙(36)씨의 '혈소판감소증 및 재생불량성 빈혈'을 산업재해로 승인했다. 더디지만 힘겹게 하나씩 쌓아 올린 성과였다.

김성희 작가는 "반도체 기술은 무어의 법칙(마이크로칩에 저장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이 18개월마다 2배씩 증가한다는 법칙)처럼 빛의 속도로 빨라지는데, 산업 현장, 노동 현실은 70, 80년대 산업화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삼성의 반도체 백혈병 문제를 보면 알 수 있다"라고 꼬집었다.

두 작가는 "무엇보다 삼성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김수박 작가는 "삼성이 3대 세습을 하는데 어느 국민이 좋아라 하냐"며 "이런 문제들을 털고 가지 않으면 영원히 국민에게 사랑받는 기업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의 관심도 물론 중요하다. 김성희 작가는 "삼성 제품 안 쓰는 사람이 없는데 삼성이 국민들 눈치 좀 보게 하자는 게 두 책을 펴낸 목적"이라며 "기업의 활동에 국민이 개입할 수 있는 공감대를 만들고 싶다"고 강조했다. 현재 우리가 쓰는 TV, 노트북, 휴대전화 등 첨단 제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어떤 처우를 받는지, 그 제품을 만들다가 백혈병에 걸렸을 수도 있다는 사실. 두 작가는 그것을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몇몇 언론사, 책 광고 거부... "자본권력이 언론 검열"

김수박 작가는 언론사 광고 게재 거부와 관련해  "표현의 자유가 가장 강력한 힘으로 발휘되는 곳이 언론과 출판인데 이번 일로 누구를 비판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게 됐다"고 씁쓸해 했다.
▲ <사람 냄새>의 김수박 작가 김수박 작가는 언론사 광고 게재 거부와 관련해 "표현의 자유가 가장 강력한 힘으로 발휘되는 곳이 언론과 출판인데 이번 일로 누구를 비판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게 됐다"고 씁쓸해 했다.
ⓒ 강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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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광고에서 문제가 터졌다. 몇몇 언론사에서 두 책의 지면 광고를 거부한 것이다. 이유는 확실하지 않았다.
김성희 작가는 "과거에 독재정부가 언론을 탄압해서 언론이 스스로 검열을 했던 것처럼 이제는 자본 권력이 언론을 검열하는 구조가 답습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구조적인 이유 때문에 "해당 언론사에 돌을 던지기는 힘들다"고 덧붙였다. 김수박 작가는 "표현의 자유가 가장 강력한 힘으로 발휘되는 곳이 언론과 출판인데 이번 일로 누구를 비판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게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두 책을 낸 보리출판사는 "삼성에 장악되지 않는 국민에게 직접 광고를 하겠다"며 SNS을 상대로 대국민 홍보를 벌이기로 했다. 출판사는 트위터(@boribook)에 올린 광고가 RT되는 숫자에 비례해 시민단체 '반올림'에 기부한다고 밝혔다.

인터뷰 말미에 김성희 작가가 다시 강조했다. 이 책과 주인공들의 삶이 소중한 이유를 말이다.

"공장 안의 노동자들은 실험쥐가 아니라 사람이잖아요. 삼성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백혈병에 걸리기까지 삼성에서 일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어요. 그들은 미래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했던, 우리 사회의 건실한 사람들이에요. 우리 모두의 일로 바라봤으면 좋겠어요. 우린 모두 일하고 사니까."


태그:#삼성 반도체 백혈병, #사람 냄새, #먼지 없는 방, #김수박, #김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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