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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탈(逸脫)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서 진실을 읽고 천하를 배운다.

어둠은 어두워서 세상의 밝음을 가리지만 간혹 아주 맑은 어둠도 존재한다. 칠흑 같은 어둠이 아니라면 웬만한 사물의 형상은 구분된다. 경부연락호 무현협사 재인문향이 그렇게 매우 맑은 어둠 속으로 제 얼굴을 내밀었다. 조금 전 자신의 보았던 방송에서 그가 읽은 시대를 넘는 무림이 아닌 문림의 혼이 그리워서였다. 그의 손에는 태우지 않는 담배의 재 타는 소리만이 여운처럼 남아 있었고, 그의 눈에는 어느새 촉촉한 이슬 하나가 영롱하게 배어 있었다. 창문 밖 저 멀리 매우 맑은 어둠 사이로 그이의 투명한 영혼이 어려 있는 듯 하여 가만히 손을 뻗어 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 무공을 펼쳤던 그 많은 무사들의 혼과 죽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리고 그 어두운 강호의 틈바구니에서 독립 무혼의 열정을 혼신의 언어로 불사르던 그 많은 문사들 또한 우리는 기억한다. 사실 아주 많지만 우리는 특별히 세 분의 문사를 기억한다. 만해불상 용운니뽄혼백사(한용운), 광야거두 육사벌판흑두령(이육사), 그리고 귀공필력 동주용정혼백사(윤동주)가 그들이다. 우리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고 대한민주무림대국이 존속하는 그날까지 영원히 살아 있을 그들.

어두운 시절, 강호 문맥의 그 빛나는 세 분의 혼들 중 니뽄훈도시빤스국의 살아 있는 양심들도 경원하는 문림강호 귀공필력 동주용정혼백사의 넋을 오늘 나는 보았다. 그의 고향인 만주에서도, 그의 조국인 조선에서도, 그리고 그의  평생소원인 통일된 나라 한국에서도 자주 보지 못하던 혼백사의 넋을, 니뽄훈또시빤쓰국의 한 평범한 가정에서, '입담은 즐거워' 방송이 쥐어 짠 공중파 채널을 통해서였다. 활동사진채널은 한류의 정련된 무림과 혐(嫌) 한류가 공존하는 나라 니뽄에서, 거센 한류 무림과 혐(嫌) 한류의 파고를 벗어 난 그 자리에 그렇게 우뚝, 혼백사의 문패를 이태백이나 두보의 그것처럼 의연하게 앉혀놓고 있었다.

'욘사마'보다, 2PM이나 샤이니나 소녀시대보다 '윤사마'를 그리워하여, 그가 태어나고 자라고 묻힌 용정과 그가 죽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이미 10년도 훨씬 전에 한 없이 울었다는 일본의 한 가녀린 중년 여인. 용정혼백사 윤동주에 대한 자료를 그 어떤 한국의 시인 윤동주 연구가들보다도 많이 모은 어느 일본의 중년부인의 진심 어린 눈물과 회한과 복 받치는 설움 속에서, 혼백사 윤동주를 그리워하는 부인을 사랑하는 그의 남편과 같이 울다가 나 또한 나도 모르게 서러워 울었다. 이 대목에서는 무림대국 내 나라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은 한참을 울어도 좋으리라. 그리고 분연히 일어나 새로운 내공을 쌓아도 좋으리라.

'처음에는, 일제 강점기(1905년) 을사늑약 이후 41년을 겪고도 그 시절에 대한 역사를 알지 못하여 혼백사 윤동주보다는 '슈퍼스타 3'로 채널을 돌리는 아이들을 막지 못하는 아비의 무능력이 함경도 명사십리마냥 부끄러워 꺼이꺼이 울었다.

다음에는, 조국의 독립을 얼마 남기지 않고 죽어간 그와 동시대의 다른 그들(이육사, 한용운)이 눈에 밟혀 우렁차게 또 울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견하고 출간한 그나마 양심적인 니뽄훈또시빤쓰국의 진보무림인들과 지식인들, 그리고 그 이름 모를 '윤사마'의 귀혼부신(鬼魂附身·혼이 들림)이 혼백사 윤동주의 묘지를 방문했을 때의 심정에서 나의 심장마저 콱 막혀 눈물 콧물 구멍구멍 다 흘리며 울었다. 또한 그 부인이 아주 오랜 시간 눈물로 대신하던 그 아름다운 열병이 부러워, 찾을 곳 없는 쥐구멍이 생각나서 애달프게 울었다.'

재인문향은 참으로 한참을 울었다. 그의 울음은 근두운을 타고 바다를 건너 수평선에 잠시 앉더니 어느새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시를 쓰는, 시를 만드는, 언어를 조탁하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완전하게 정련되고 간결하게 채색된 언어로 우주의 만물, 그리고 지구상의 살아 있는 것들의 진실과 세상의 모든 아침을, 경건하게 철학적으로 노래하고 싶었고 세상사 모든 정치 무림의 협객들이 펼쳐가는 대서사시를 온몸으로 노래하고 싶었다. 진심으로 노래하고 싶었고, 강호에서 쓸쓸히 불어오는 바람에 날리는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까지도 잡아내고 풀어내어 맑은 언어도 세탁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깨어, 나는 시인이 될 수 없는 나를 보며 많이도 슬퍼했다. 바다와 바람과 산과 들판에서 들려주는 자연의 소리와 인간과 인간 사이에 펼쳐지는 희로애락의 그 깊은 울림을 나는 알 수 없었고, 나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 설령 알았다 하더라도 그 신비스럽고 산림 우거진 비경을 적당히 옮길 수 있는 언어를 찾지 못했다. 그런 이후로 나는 아주 오랫동안 문화의 골짜기와 정치 무림의 강호들이 버티고 있는 그 깊은 계곡에 들어가려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후로 나는 하늘이 정해 준 '운명'을 따라 형법사가 됐고, 그 운명이 만남을 만들었고, 그 만남이 또 다른 운명을 내려 주었다.'

북간도의 명동촌에서 태어난 귀공필력 용정혼백사 윤동주에게 당시의 암울한 조국은 한창 때 날아간 꽃바람과 같은 철 지난 춘삼월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다니던 도중 발생한 니뽄국의 야비한 신사참배 사건의 여파는 여린 혼백사의 시심을 자극하였고, 그는 불란서변소공국의 지옥청장 랭보한철필단사(아르튀르 랭보)의 지옥과도 같은, 이 나라의 절망뿐인 계절에 서정적인 시어를 풀어냈다.

순수의 정열에서 차츰 민족적인 역사의 암울과 철학적 자아성찰까지. 무림의 습식처럼 고도의 습작을 통해 단련된 그의 언어는 역사적 진실과 조우하고 철학적 사색과 율동하며 연희전문의 문수지절 학승 시절에 이미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그 시를 읽으며 재인문향은 '아리랑'의 가락을 떠올렸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그 유명한 <자화상>. 자화상은 자신의 얼굴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 자신의 마음을 얼굴에 담아 언어로 표현하고 그림으로 채색하는 것이다. 나의 얼굴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어떤 운명이 이 얼굴을 감싸고 타인과의 유대를 만드는가.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교토대를 다닌 천하시심 지용향수실개천(정지용)의 너무나도 아름답고 유명한 시에 얼굴이 담긴 다른 세계가 있다. 아름다웠던 이 나라 최고의 문사.

얼골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밖에

무림대국의 문사님들의 시 중 가히 최고랄 수 있는 서정시 <호수> 전문이다. 우리나라 언어를 최고의 시어로 승화시킨 정지용의 얼굴이 사랑과 향수였다면, 윤동주의 얼굴은 조국의 현실에 맞서 사운 무림협객이 아니어서 세상을 어찌할 수 없었던 한 인문학적 지식인의 현실에 대한 최소한의 도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미 그가 자신의 얼굴에 그린 '조국의 초상화'는 그가 종내 '남의 나라 땅'이라며 불편해하던 일본으로 유학 가기 전, 이와 같은 언어로 구체화 된다. 재인문향은 윤동주의 삶의 궤적을 관조하며 자신이 가야 할 운명의 길을 열어 보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는 나도, 너도, 또 우리 대한민주무림대국의 모든 협객들에게도 읽히면 읽힐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한숨과 부끄럼을 던져주는 영원불멸의 언어다. 마치 동시대의 세 사람, 한용운의 '님'이나 이육사의 '광야'처럼, <서시>는 묵중한 바위를 바다에 던질 대 나는 그 둔중한 소리와 같은 천하의 울림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문향이 잠시 거두어들인 검 끝이 쉬고 있는 즈음 피어오르는 문심의 계절에는 아름다운 단풍과 감정을 공유하는 자연이 숨 쉬고 있었다.

대권 무림의 역사가 정정당당한 정치 무리의 협객들이 쌓아온 공력만으로 무도를 겨뤄 이뤄지듯, 현대의 역사가 살아 있는 한 일제 강점기 우리에게 빚을 안겨 준 안중근이나, 백범이나 이회영 일가를 위시한 그 모든 독립선현들은 영원히 살아 있다. 돌멩이와 낫으로 총칼과 대포와 맞서 싸우다 토끼몰이로 희생당한 당시의 모든 독립군들과 의용군들을 생각하면, 이 편한 세상에서 한가히 정치 무림을 논하는 우리에게는 단순히 경건이나, 의식이면 의례히 치루는 묵념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그 무엇이 저 들판의 갈대처럼 널려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가을 갈대를 사랑하는 바람은
아프디 아픈 겨울의 죽음 같은 밤을 지켜보지 않는다.

들판의 머언 먼 끝자락에서 부서지던
햇살의 그 잎 새 떨군 나무의 홀가분함처럼
봄날이면 결가부좌 틀고 일어날 그 모든 풀꽃들의 구원을 위하여
오늘 우리는 나의 등줄기를 세우고, 그대의 목덜미를 바르게 여며
영롱히 산화해 간 관음 같은 시대의 영령들에게
저 억새를 딛고 일어날 풀꽃들을 기억하게 해 주어야한다
[졸시: 갈대의 꿈(부분 인용)]

새벽을 달리며 시심을 달래며 깨어 있던 '혁신과 통합'의 유리수, 무현협사 재인문향의 의식이 소리 없이 내리는 안개비에 젖을 때까지, 그는 창문을 열고 밝혀 있는 집들의 창문을 세기 시작했다. 그의 거처가 자리한 공공주택의 주변에는 낮은 빌라들이 옹기종기 설키고, 또 그 보다 더 낮은 다세대 가옥들이 즐비한 미로 같은 주택촌이 형성되어 있어, 마치 민심을 읽기가 어렵듯이 새벽을 달리며 새어나오는 빛의 줄기를 읽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창문만 열면 미명을 향해 달리는 안개비에 굶주린 불빛들이 여기저기서 고개를 들어 반길 것 같은데 찾기 어렵듯이, 일제 강점기 수탈과 전흔으로 초토화된 조국에서 어리석은 제국주의에 맞서 질렀던 여린 지식인들의 소리는 우리 땅 곳곳에 묻혀, 때로는 보라색 도라지꽃으로, 때로는 흰색의 민들레로, 또 대부분은 붉은색의 진달래와 철쭉, 노란색의 개나리로 지천에서 살아 피어나고 있었다. 창문을 닫는 재인문향의 손등에 아직은 따스한 달빛 한 점이 내려와 박혔다.

나는 진성백신 철수바이러스공에게 전화를 걸어 하늘의 이치를 설명했다. 그는 반가이 받아 주었고, 오늘 나는 일제 강점기 이 나라를 사랑했던 또 다른 문향(文香)을 가슴에 박았다. 내일이면 나는 서울특별공국의 새 맹주 원순희망제작창의 손을 잡고 민주공방으로 가서 학규공자의 진솔한 손등에 경건하게 입을 맞출 것이다. 일제 강점기 민족의 시인처럼 밟혀도 다시 살아나는 질경이처럼, 우리 땅 어느 곳에서든 흥건하게 자라나는 민초들의 언어 앞에 옷깃을 여미며.

덧붙이는 글 | *지나 간 역사에서 우리는 돌아오는 역사를 배운다. 그 감당할 수 없는 역사의 수레바퀴



태그:#문재인, #박원순, #안철수, #윤동주,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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