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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안현태씨 대전현충원 매장을 계기로 서울현충원 국립묘지를 현장 답사한 적이 있습니다. 앞서 많은 매체에서 지적했듯이 부적격자나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들이 버젓이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었습니다. 반면 이미 국립묘지에 안장됐어야 할 인물들이 보훈당국의 무관심과 방치로 여태 안장되지 못한 사례도 있습니다. 그분들 가운데는 여태 유골조차 찾지 못한 분들도 적지 않은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안중근 의사입니다.

서울현충원 장군묘역 답사기를 보도한 이후 지인 한 분이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그 내용은 이번 8.15광복절 하루 전날인 8월 14일 KBS <취재파일 4321> 방송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방송을 보니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 활약지역 등 항일 유적지를 취재한 것이더군요. 그 가운데 지인이 제게 눈여겨볼 것을 주문한 대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마지막으로 활동하던 중국 중경(重慶) 시내 화상산(和尙山) 한인(韓人)묘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방송을 통해 미처 알지 못했던 내용을 접하고 저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후 8년간의 피난 끝에 중경에 도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 임시정부 이동경로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후 8년간의 피난 끝에 중경에 도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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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 재직 시 두어 차례 중국 내 항일독립투쟁 전적지를 취재차 답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대상 지역이 동북3성이어서 임정의 발상지인 상해나 이동 경로인 항주-장사-광주-유주-기강 그리고 종착지인 중경을 미처 둘러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평소 이 지역의 항일투쟁 현지 사정에 대해서는 어두웠던 편인데 이번에 방송을 보고 저의 무지를 실감했습니다. 1910~20년대 항일투쟁의 본거지가 동북3성 지역이었다면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의 주 무대는 상해(上海)와 중경(重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현태는 국립묘지에... 독립운동가 묘소는 쓰레기장

본론으로 들어가, 중경 임시정부는 일제 말기 항일 투쟁세력의 총본산지였습니다.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후 피난길에 오른 임정은 8년간의 고난 끝에 1940년 중경에 도착해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곳에서 임정은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고, 대일 선전포고를 통해 연합군의 일원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1944년 이후엔 장준하, 김준엽 등 학병 출신들이 일본군에서 탈출해 가세하면서 임정은 활기를 되찾기도 했으나 낯선 환경과 오랜 여정의 피로가 겹쳐 사망자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당시 그들을 매장한 곳이 바로 중경 시내의 화상산 공동묘지였습니다.

자료와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화상산 공동묘지에는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송병조(宋秉祚, 1977~1942) 선생, 차이석(車利錫, 1881~1945) 선생, 손일민(孫逸民, 1884~1940) 선생, 이달(李達, ?~1942) 선생, 김구 선생의 모친 곽낙원(郭樂園, 1859~1939) 여사와 장남 김인(金仁, 1917~1945) 선생, 김상덕(金尙德) 선생의 부인 강태정 여사 등 임시정부 요인 및 조선의용대 대원 등 30여 명의 묘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차이석 선생과 곽 여사, 김인 등의 유해는 국내로 봉환돼 차 선생은 효창원, 곽 여사와 김인은 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습니다. 반면 다른 분들은 여태 봉환은 물론 유해발굴조차 하지 못한 실정입니다.

대전현충원에 마련된 백범 김구 선생 모친 곽낙원 여사와 장남 김인 선생의 묘소.
 대전현충원에 마련된 백범 김구 선생 모친 곽낙원 여사와 장남 김인 선생의 묘소.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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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화상산 공동묘지는 1990년대 이후 이 일대의 재개발로 인해 지형이 많이 변경됐으며 심지어 인근에 담배공장 창고와 쓰레기처리장이 들어서면서 극도로 훼손되었다고 합니다. 이같은 사실은 1990년대 이후 이곳을 답사한 한국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지속적으로 국내에 알려졌고, 또 관계 당국의 조속한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보훈처 등은 이를 수수방관한 끝에 지금은 유해발굴이 어려울 지경이 돼버렸습니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간 답사자들이 전한 화상산 공동묘지의 실상은 이렇습니다.

우선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에는 지난 1993년 10월 김구 선생의 차남 김신(金信, 백범기념관장)씨가 이곳을 답사한 후 전한 얘기가 기록돼 있습니다. 당시 김씨는 화상산 한인묘지의 상태를 두고 "화상산은 낮은 야산으로, 묘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음"이라고 증언하며 "낮은 야산에 자리를 잡은 묘지들은, 인근에 담배공장 창고와 쓰레기처리장이 있어 폐기물이 흘러내리고, 경사가 가팔라 토사가 빗물에 많이 깎여 내려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음. 따라서 시급히 유해를 발굴하여 이장해야 할 필요가 있으나, 이를 위해서는 관계 법령의 검토와 중국 당국과의 협의가 선행되어야 함"이라고 관계 당국의 적절한 조치를 촉구했습니다.

경사가 가파르고 토사가 빗물에 씻겨 내려가 묘지 흔적도 찾을 수 없는 화상산 한인묘지
▲ 흔적도 없는 선열들의 묘소... 경사가 가파르고 토사가 빗물에 씻겨 내려가 묘지 흔적도 찾을 수 없는 화상산 한인묘지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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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을 맞아 지난 2009년 대규모 민간 조사단이 현지를 답사한 적도 있습니다. 그해 7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회장 김자동)는 대학생 70여 명과 관계자들로 구성된 '임정 유적답사팀'을 꾸려 중국 내 임정 유적지를 탐방하였는데 그때 화상산 공동묘지에 들러 묘지 상태를 확인한 바 있습니다.

당시 답사팀에 동행했던 언론사 기자들이 전한 답사기에 따르면, 대부분의 묘지터가 훼손돼 묘지를 알아보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김신의 증언으로부터 18년, 답사팀의 증언으로부터 2년이 지났지만 관계 당국이 화상산 공동묘지를 발굴했다거나 또 유해를 봉환해 왔다는 얘기는 여태 전해진 바 없습니다.

2009년 당시 답사팀 가운데는 임정 문화부장 출신으로 해방 후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낸 김상덕 선생의 외아들 김정육(77)씨도 동행했었습니다. 김씨는 다섯 살 때 잃은 어머니(강태정)의 묘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김씨는 어머니 강씨의 묘가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는 얘기를 듣고 망연자실했습니다.

독립운동가 유골도 안 챙기는 나라... 이게 정상인가

이선자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부관장은 "김씨 어머니 묘는 이곳에 없으며, 어디에 어떻게 됐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증언했습니다. 1986년 중국 정부가 공동묘지를 이전하면서 6개월간 연고자를 찾는 공고(公告)를 냈지만, 한국인 중에서 묘소 주인이라고 나타난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묘를 말 그대로 "밀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역 땅에 모친을 묻고 부친을 따라 귀국한 김씨는 부친마저 6·25전쟁 도중 납북되자 어린 나이에 고아가 돼 평생 험난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 그가 중국 땅에서 난 공고를 제때 접했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모친의 묘소를 찾으러 갔던 김씨는 이선자 부관장이 알려준 그의 모친 묘소가 있었다는 곳의 흙을 한 줌 담아서 오는 것만으로 성묘를 대신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김씨를 두고 조상묘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불효자식이라고 그를 탓할 수 있을까요? 비단 김씨만이 아닙니다. 그곳에 묻혔던 이달(李達) 선생의 딸 이소심 여사도 아버지의 유해를 찾지 못해 애만 태우다 돌아왔다고 합니다.

인근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쓰레기와 잡초로 뒤덮인 화상산 한인묘지.
▲ 잡초만 무성한 선열들의 묘소터 인근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쓰레기와 잡초로 뒤덮인 화상산 한인묘지.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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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화상산 한인묘지 일대는 잡초와 쓰레기로 가득한 실정입니다. 그래서 임정 요인들의 묘가 이곳에 몇 기나 있었는지, 또 그 후에 어떻게 처리됐는지 아무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실제로 유해발굴에 나선다고 해도 가능할지 의문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발굴 시기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보훈처가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서둘렀더라면 발굴할 수 있었을 겁니다. 지금이라도 김씨처럼 이곳에 관한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 생존해 있을 때 서둘러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비단 화상산 한인묘지 발굴 건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정부는 그간 수차례에 걸쳐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방침을 밝혀왔지만 제대로 실행에 옮긴 적은 없어 보입니다. 지적을 받을 때마다 예산 타령이나 중국 및 북한과의 협조 문제 등을 핑계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안 의사 묘지 일대에는 아파트와 공장이 들어서서 이제는 진짜로 발굴이 어려운 상황이 돼버렸습니다.

지난 2009년 3월 안 의사 순국 99주년을 맞아 필자가 여순(旅順)감옥 뒷산 현장을 답사했는데, 과거 이곳이 공동묘지였는지 유추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형이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한국 정부에 주무부처가 없는 것도 아닌데 항일투쟁의 상징이랄 수 있는 안 의사의 유해를 여태 발굴하지 못한 것은 우리 민족 천추의 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 유해 매장지로 추정되는 여순감옥 뒷산의 아파트 공사현장. (안의사 순국 99주기인 2009년 3월 26일 촬영)
▲ 공사장이 돼버린 안중근 의사 묘소터 안중근 의사 유해 매장지로 추정되는 여순감옥 뒷산의 아파트 공사현장. (안의사 순국 99주기인 2009년 3월 26일 촬영)
ⓒ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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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처, 말만하지 말고 본분에 충실하시길

1990년대 중반 일본 나가노(長野) 지방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일제는 소위 '옥쇄(玉碎)'에 대비해 이곳에 일본 황실과 대본영을 피난시킬 요새, 소위 '마쓰시로 지하호(松代地下壕)'를 건설하였는데 이 공사에 조선인 2000여 명이 동원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1000명은 공사 도중 현지에서 사망하였는데 그들의 유해가 한 언덕에 집단으로 매장돼 있었습니다.

필자를 안내했던 현지 일본인은 "삽으로 1m만 파면 그들의 유골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강제로 끌려가 낯선 타국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맞은 그들. 그러나 누구 하나 시신마저 거두는 자가 없어 객지에서 고혼(孤魂)으로 떠돌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같은 민족으로서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국방부는 한국전쟁 때 전사한 장병들의 유해 발굴사업을 수년째 지속해오고 있습니다. 이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또 시한을 두지 않고 지속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난을 맞았을 때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한 충혼(忠魂)들은 그 넋이라도 국가가 책임지고 거두고 보살펴야합니다. 그런데 순서로 보자면 중경 화상산 한인묘지에 묻힌 임정요인들이 전사 장병들보다 먼저가 아닌가 싶습니다. 숭고한 죽음에 신분이나 지위 고하가 있을 수는 없겠지만 굳이 따지자면 순서로는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런 명분도 없는 퇴역장성들의 국립묘지 안장 문제에 신경 쓸 시간이 있다면 보훈처는 지금이라도 화상산 한인묘지 현장조사에 나설 것을 촉구합니다. 보훈처는 입으로만 선열을 기린다고 뇌까릴 것이 아니라 이제라도 본분에 충실하기 바랍니다.


태그:#안현태, #현충원,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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