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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가 해체를 한 달여 앞둔 1949년 7월 11일, 반민특위 전라남도 조사부에서 한 반민피의자에 대한 신문이 진행됐습니다. 이날 특위에 불려나온 피의자는 호남은행 설립자로 호남지역의 거부 현준호(玄俊鎬, 1889~1950)였으며, 신용근 조사관이 신문을 맡았습니다. (참고로 현준호는 1930년부터 해방 때까지 16년간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전남도 평의원,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 친일단체에서도 활동하였고, 또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징병제 홍보와 학병지원 권유 등에 가담했습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그의 손녀입니다)

이날 신 조사관은 현준호의 중추원 참의 시절 행적을 신문하던 중에 "중추원 참의 가운데 가장 대표적으로 친일반민족 행위를 한 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친일파 가운데서도 1급 친일파가 누구냐고 물은 셈입니다. 이에 대해 현준호는 "본인으로서는 말하기 곤란한 점도 있으나 말하자면 조병상을 대표적으로 (거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반민특위 재판기록 17권 '현준호 편' 중에서)

1급 친일파 조병상... 두 아들은 전장으로

조병상
 조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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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가운데서도 친일을 직업삼아 한 자를 흔히 '직업적 친일파'라고 부르는데 조병상(曺秉相, 창씨명 夏山茂, 1891~?)은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 인물로 불리는 사람입니다.

<반민특위 재판기록>에 따르면, 그는 1922년 경성시(서울시) 학교평의원에 당선된 이래 경성부 협의원, 경성부회 의원(4회), 경기도회 의원(3회), 중추원 참의(2회)를 비롯해 조선식량영단 감사, 경성지방법원 인사조정위원, 선린육영회 이사, 동민회 이사, 갑자구락부 위원, 조선지원병후원회 이사, 국민총동원연맹 이사, 국민총력연맹 이사, 흥아보국단 발기위원, 임전보국단 이사, 경성 종로경방단장, 대화동맹 이사 등 친일단체 경력만도 무려 한 쪽에 달합니다.

조병상은 그 자신의 친일행적도 문제거니와 자신의 입지를 위해 일제말기 두 아들을 전쟁터로 내몬 '비정한 아버지'로서도 특기할 만한 인물입니다. 1939년 6월 제2기 육군지원병으로 입대한 그의 장남 태환(台煥, 창씨명 夏山光郞))은 조선에서 5년, 버마에서 2년, 총 7년간 일본군에 복무하다가 해방을 맞아 일본군 군조(軍曹, 중사)로 제대했습니다.

차남 문환(文煥, 창씨명 夏山正義)은 '학도병 제1호'로 자원입대하였습니다. 그의 두 아들의 일본군 입대는 전적으로 그가 독려한 결과인데 이는 일제 당국의 지원병제도 및 학도병 지원 홍보에 적극 활용됐습니다. 최근 서울현충원 장군묘역 현장조사를 갔다가 그곳에 묻혀 있는 그의 차남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장군 제1묘역이 있는 조병상의 차남 문환의 묘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장군 제1묘역이 있는 조병상의 차남 문환의 묘
ⓒ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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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상은 5남을 두었는데 대부분 군인이었습니다. 장남 태환은 해방 후 일본군에서 제대한 다음 <평화신문> 업무국장, 대한통운여행사 대표이사를 거쳐 한국모리스상사 회장을 지냈습니다. 차남 문환은 해방 후 육사7기(특별반) 졸업 후 한국군에 들어가 군 장성을 역임했으며, 1987년 사망 후 서울현충원 장군묘역에 묻혔습니다. 3남 익환도 육군장교(1965년 당시 육군 소령)를 지냈으며, 4남 세환은 공군 조종사 출신으로 1966년 공군중령으로 예편 후 대한항공에 입사해 운항본부장(전무)을 역임했습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차남 문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주사변,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병력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자 급기야 조선인 대학생들에게도 '지원'을 핑계로 입대를 강요했습니다. 이른바 '학도(學徒)지원병제'가 그것입니다. 1943년 10월 20일 발표된 '조선인학도 지원병제'의 일정은 5일 뒤인 25일부터 접수를 시작해 11월 20일 마감한 후 12월 12~20일 중에 징병검사를 마치고 이듬해 1944년 1월 20일 입대시키기로 정해졌습니다. 일정이 길지 않다보니 일제는 조선 내 친일지식인들을 동원해 학병권유에 나섰으며, 미지원자에 대해서는 '비(非)국민'이라는 딱지를 붙여 강제 징용은 물론 각종 불이익을 주었습니다.

송광사 출신 스님 5명이 학병 출정에 앞서 마을주민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출정식을 갖고 있다
▲ 출정하는 '스님 학도병'들 송광사 출신 스님 5명이 학병 출정에 앞서 마을주민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출정식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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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 마감이 임박해지자 총독부 당국은 기관지 <매일신보>와 <경성일보>를 통해 연일 학병권유 특집기사를 실었습니다. 또 이광수 같은 친일파들을 앞세워 강연회를 개최하는가 하면 시와 칼럼 등을 통해 학병 지원을 적극 독려하였습니다. 바로 그 무렵인 11월 5일자 <매일신보>에 조병상의 칼럼이 하나 실렸습니다. 제목은 '판단(判斷)하라, 우리의 영예(榮譽)-학도(學徒)의 갈길은 단(單) 하나'. 이 글에서 조병상(夏山茂)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나는 큰 아들과 둘째아들을 전부 군문으로 보내게 되었지만 평시부터 나는 아들들에게 이런 뜻을 누누이 일러온 것입니다. 물론 한번 전쟁에 나간 바에는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는 바이므로 만일 그런 때는 집안이 다소 쓸쓸하게 될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에 대한 애정도 때에 따라 내용과 형식이 달라지는 것이매 이런 비상한 시대에는 조선동포의 원대한 장래를 살펴 웅대하고도 큰 사랑을 기울이는 것이 참다운 어버이의 자세일 것입니다. 우리들 반도인은 누구나 하루라도 빨리 완전한 황국신민이 되어 대동아의 지도국민이 되지 않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틀 뒤인 11월 7일자 <매일신보>에는 그의 차남 문환의 글이 실렸습니다. 제목은 '국가(國家)가 잇고 개인(個人)도 잇다'. 이 글에서 "천의를 받들고 나가는 곳에 생과 사의 문제를 고려할 수 있을까. 썩어빠진 생을 지탱하느니 보다 영원한 생명에 사는 것이 얼마나 남아다우랴. 양심적이랴. 얼마나 떳떳하랴"며 학병지원의 소감을 밝혔습니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린 조병상(왼쪽, 1943.11.5)과 차남 문환(오른쪽, 1943.11.7) 명의의 학병권유 관련 기고문
▲ 조병상-문환 부자의 '학병권유문'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린 조병상(왼쪽, 1943.11.5)과 차남 문환(오른쪽, 1943.11.7) 명의의 학병권유 관련 기고문
ⓒ 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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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문환은 10월 29일자로 학도병 입대를 '지원'하였는데, 이는 조선 전체에서 '학도병 지원 제1호'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당시 그는 경성법학전문학교 1학년이었는데, 그의 학도병 지원 소식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습니다. 심지어 그의 모친(夏山淑子)도 <매일신보> 주최 '학도 출진격려 어머니 좌담회'에 나가 '군국 어머니'의 귀감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온 가족이 학병권유에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차남 문환의 '학도병 지원 제1호'는 문환 본인의 자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작품'이었습니다. 당시 차남이 다닌 경성법전은 관립(官立)인데다 교장(增田道義)은 총독부 관료 출신으로 '황민화교육의 모범'으로 불린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해 연초 문환이 입교하는 과정에서 교장의 도움을 받았으며, 그 대가(?)로 문환이 가장 먼저 학병에 지원하기로 양자간에 묵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조병상이 반민특위 신문 과정에서 증언한 바 있으며, 문환 역시 같은 취지의 발언을 한 바 있습니다. 최초 지원의 '공로'로 문환은 11월 27일 경성법전출신 학도병 지원자 격려모임에서 교장으로부터 지휘도(刀)를 하사받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국방부 차관까지... 국립묘지 장군묘역에 묻히다

반민특위 조사과정에서도 조병상의 두 아들의 일본군 '자원 입대'는 주목을 끌었습니다. 재판과정에서 조병상이 신태익(申泰益) 재판장과의 일문일답을 보도한 당시 <동아일보>(1949.4.8.) 기사를 일부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재판장: 귀한 아들을 전지로 보낸 이유는?
피의자: 큰아들은 피고가 지시하여 보냈는데 그것은 피고가 무(武)를 숭상한 까닭에 사관학교에 한 놈 보내려는 희망에 의한 것이었으며, 둘째아들은 법전(法專/경성법전)에 들어갈 제 교장한테 부탁을 좀 한 까닭이 있으므로 교장의 권고대로 지원케 하여 징용보다는 (학도병)지원을 택하게 한 것입니다.
재판장: 그 당시 자식을 전장에 보내서 개죽음을 시키는 것을 꺼리는 것이 일반민중의 의사가 아니었던가?
피의자: 피고의 아들들은 별로 피고의 의사와 다른 점이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재판장: 피고는 좋았겠지만 피고와 반대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피고의 행동이 큰 박해(迫害)가 될 것이 아닌가?
피의자: 그럴 겝니다.
재판장: 피고의 자식까지 죽엄의 터로 보내서까지 자기의 영화를 꿈꾸는 자가 다른 사람의 사정을 조금이라도 돌아볼 필요는 없었을 것이 아닌가? 피고인의 심경은?
피의자: 글쎄요, 생각하기에 달렸겠지요.  

반민특위에서 재판받는 조병상(동아일보, 1949.4.8)
 반민특위에서 재판받는 조병상(동아일보, 194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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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에서 조병상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에 차남 문환이 증인 신분으로 재판정에 출두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군인 가운데 반민 피의자도 적지 않았는데 그는 피의자 자격이 아니라 증인자격으로 출두한 것입니다.

1949년 5월 30일 조병상 4차 공판정에 출두한 문환은 제1호로 학도병에 지원한 배경에 대해 "일본인 교장은 유난히 (학병입대에) 열렬한 사람이어서 불가피한 입장에서 스스로도 전쟁도 알아보고 운명을 개척할 생각으로 응했다"고 밝혓습니다.

또 부대 근무 이력에 대해서는 "입대 후 대구부대에 있다가 북지(北支) 파견 고로모(衣)부대에 근무했다"고 증언했습니다. 당시 문환의 나이는 27세, 계급은 육군 중위였으며, 용산연병장 내 육군병기공창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문환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다니던 경성법전에서는 해방 후 모든 재학생들에게 일괄 졸업장을 주었다고 하니 그는 실지로는 1학년도 덜 마친 채 졸업장을 받은 셈입니다).

한편 문환은 해방 후 육사 7기(특별반) 졸업 후 임관하여 30여 년간 군에 복무하면서 요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전두환 군부 쿠데타 직후인 1979년 12월 20일 국방부 차관에 발탁됐으며, 이후 장관급인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 겸 비상기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습니다. 그는 한국 육군사(史)에서 몇 가지 기록할 만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공수단장 시절 공수교육 이수자에게 표창하는 조문환 대령(왼쪽)
 공수단장 시절 공수교육 이수자에게 표창하는 조문환 대령(왼쪽)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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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1965년 사상 첫 월남 파병부대인 비둘기부대의 지휘관을 지냈으며, 1969년 특전사령부를 창설해 초대 사령관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이어 초대 수도군단장, 전투병과교육사령관, 국방대학원장 등 육군의 요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차관 발탁 당시 한 언론의 보도를 보면 그는 특수전 권위자로 알려져 있으며, 한국 상황에 맞는 비정규전술을 발전시킨 공로가 크다고 합니다.

퇴임 후 한국광업진흥공사 사장을 지낸 그는 1987년 11월 8일 심장마비로 서울대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 천주교 신자인 고인의 장례는 11일 오전 명동성당에서 발인하여 당일 오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장군 제1묘역(묘지번호 152)에 묻혔습니다. 그의 삶을 과도하게 비판할 생각도, 필요 이상으로 옹호할 생각도 없습니다. 큰 틀에서 보면 그 역시 시대의 희생자일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그가 뭐라고 얘기했건 간에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이 좋아서 자원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비극이라면 그가 친일파 집안에 태어난 것이겠지만, 친일의 대가로 영화를 누리던 부친의 덕을 전혀 보지 않은 것은 또 아닙니다. 그가 한국군에 이바지한 공로가 적지 않다고 해도 일제말 '학병지원 제1호' 기록이라든지 전두환 일당의 쿠데타에 부화뇌동한 점 등은 비판받아 마땅한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태그:#조병상, #조태환 지원병, #조문환 '학병지원 제1호', #직업적 친일파, #파월비둘기부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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