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자본주의의 천박성을 고발한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자본주의 : 러브스토리>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기업이 고용한 노동자의 명의로 생명보험을 듭니다. 얼핏 노동자 복지를 위한 기특한 혜택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따로 있습니다. 노동자가 사망할 경우 보험금을 회사가 가로채는 것입니다. 노동자가 죽기 전 보험 수급자를 회사로 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증언도 있습니다. 생명보험에 가입한 한 주부는 남편이 죽은 뒤 보험금이 나왔는데 수급자가 은행으로 되어 있었다고 고발합니다. 헤지펀드의 천국 케이맨제도에서는 생명보험증권을 대량 매입해 보험 계약자의 사망에 투자하는 헤지펀드도 있습니다. 과거 해적들의 은신처에서 이제는 헤지펀드의 은신처로 변신한 채 사람의 죽음까지도 서슴없이 투기의 대상으로 삼는 모습은 현대판 해적의 민낯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속도와 무한경쟁을 모토로 한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휘둘리다 무장해제를 당할 때, 그것은 자살이라는 이름의 죽음을 낳습니다. 사회적 불안이 증폭되는 사회일수록 사람의 생사를 담보로 하는 생명보험은 위세를 떨칩니다. 그래서일까요? 영화판에서는 드물게 생명보험을 소재로 한 영화가 보험계약자들을 찾았습니다. 가진 거라고는 맨몸뚱이밖에 없는 아웃사이더들이 생명보험을 배수진으로 아슬아슬한 생사의 줄을 타는 <수상한 고객들>(4월 14일 개봉)입니다.

하루 평균 42.2명이 자살하는 자살공화국

라이프생명 오 부장(박철민)은 책상 위 명패를 가방에 넣고 사무실을 나섭니다. 소연(윤하)은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고 출연료로 받은 5만 원을 세다가 날치기를 당합니다. 피 같은 돈을 찾기 위해 사력을 다해 쫓는 과정에서 교통사고가 일어나고 소매치기는 현장에서 즉사합니다. 연쇄충돌은 청소차에 매달린 환경미화원의 목숨까지 앗아가고 오 부장의 차도 박살이 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보험왕에 오른 병우는 무한경쟁에 내 몰린 시대의 욕망을 대변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보험왕에 오른 병우는 무한경쟁에 내 몰린 시대의 욕망을 대변한다. ⓒ (주)메이스엔터테인먼트


보험왕 병우(류승범)는 연봉 10억에 대한민국 0.1%의 자산을 관리하는 플래너로 스카우트 제안을 받습니다. 꿈에 부풀어 있던 병우에게 "생명보험금을 탈 수 있는 비법을 알려달라"는 중년 고객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난감한 병우는 의도적인 자살은 보험금이 나오지 않지만 술에 취한 상태에서는 보험금이 지급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윽고 지하철 의자에 앉아 병나발을 불던 중년의 사내는 구내로 진입하는 전철에 뛰어듭니다.

이때부터 병우의 찬란한 꿈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중년의 사내 가족들이 병우를 자살방조혐의로 경찰에 고소하고, 여자친구는 "천박하게 변했다"며 이별을 통보하고, 회사에선 병우의 실적을 내사하기 시작합니다. 자살 경력이 있던 사람들을 생명보험에 가입시킨 사실이 들통 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절체절명의 위기. 거액의 생명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자살을 계획하는 이들을 과연 어떻게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릴 수 있을까요.

영화는 병우의 고군분투를 통해 하루 평균 42.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자살공화국'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들춰냅니다. <수상한 고객들>은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던 이들이 어떻게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리는지, 살아남아야 할 이유와 가치는 무엇인지를 병우의 눈으로 뒤쫓으며 자살을 방조하는 한국사회를 신랄하게 고발합니다.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19세기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자살론>에서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자살도 사회구조적 요인에 연유하며, 지극히 개인적인 자살이란 없다는 뜻입니다. 하물며 21세기 신자유주의의 광풍 앞에서야 말할 나위 없습니다. 세계경제 위기 등으로 일가족이 자살하고 일자리를 찾던 가장과 청년들의 자살이 끊이지 않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며 자살하던 학생들에 이어 카이스트에서도 줄지어 목숨을 끊은 것은 모두 사회적 타살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연봉 10억원 대박을 앞둔 병우는 자신의 발목을 잡는 수상한 고객들을 설득하기 위해 오 부장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다.

연봉 10억원 대박을 앞둔 병우는 자신의 발목을 잡는 수상한 고객들을 설득하기 위해 오 부장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다. ⓒ (주)메이스엔터테인먼트


영화에서 병우의 고객들 역시 사회적 타살의 연장 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오 부장은 보험회사의 구조조정으로 책상을 비웁니다. 기러기 아빠로 아내와 딸을 뒷바라지하던 그는 빵가게를 열지만 사기를 당하고 고시원에서 지내며 대리운전을 합니다. 범인을 잡았다고 경찰에서 연락이 왔으나 돈은 이미 탕진한 상태.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자 오 부장은 철길 건널목에서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차를 움직입니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복순(정선경)은 생전 남편이 일하던 비정규직 환경미화원 자리를 물려받습니다. 엄마를 돕겠다며 나물을 캐 골목길에 좌판을 벌여 놓은 새끼들은 그녀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하지만 학교 준비물 하나 챙겨가지 못하는 큰딸은 지긋지긋한 가난에 밖으로만 겉돌고, 가방에서 나온 가정환경조사서에 엄마는 '부재'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버티고 서 있기 힘든 어느 날, 복순은 지나가는 트럭에 몸을 던지기 위해 차도로 내려섭니다.

부모가 돈 벌러 나간 뒤 소식이 끊긴 소녀 가장 소연은 동생과 함께 한강둔치 폐차장 버스에서 숨어 지냅니다. 가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오디션에 응시하지만 매번 떨어지고, 아빠가 남긴 빚을 독촉하는 사채업자들은 소연에게 "몸을 팔아서라도 빚을 갚아라"고 겁박합니다. 마지막 보금자리였던 버스마저 강제철거 당하던 날, 동생의 하루 끼니를 채우기도 버거웠던 소연은 비가 쏟아지는 건물 옥상 위로 올라갑니다.

중증의 틱 장애를 앓고 있는 영탁(임주환)을 받아 주는 회사는 없습니다. 영탁은 폐지를 줍다 몸져누운 누나와 핏덩이 조카의 생계를 책임집니다. 그는 지하철에서 노숙을 하며 무료급식으로 허기를 채웁니다. 그런 영탁이지만 낡아빠진 수첩에 꼬박꼬박 하루 세 번 감사의 일기를 쓰며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나가 의식불명상태에 빠지고 영탁은 보금자리나 마찬가지였던 지하철 구내로 빨려들듯 달려드는 전철을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봅니다.

배병우 표 자살 방지 프로젝트 본격 가동 

카메라는 병우의 24개월 전과 후를 교차하며 서울특별시에서 주변부로 살아가는 이들의 일상을 압축적으로 표현합니다. 병우가 그들의 구질구질한 일상에 뛰어든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이 든 생명보험을 연금보험으로 갈아타게 해 자살을 막아야만 10억 대박을 터트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에 다가갈수록 속물 병우에게는 알 수 없는 연민이 솟아나고 분노가 부글거립니다. "배병우 정신 차려! 너하고 상관없는 일이야"라고 외쳐보지만 그들을 향한 발걸음을 멈출 수 없습니다.

 복순의 마지막 희망인 아이들이 이른 봄나물을 캐 좌판을 벌려 놓고 있다. 엄마의 가난은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대물림되고 있다.

복순의 마지막 희망인 아이들이 이른 봄나물을 캐 좌판을 벌려 놓고 있다. 엄마의 가난은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대물림되고 있다. ⓒ (주)메이스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예상했던 대로 해피엔딩으로 돌아섭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영화를 연출했다"는 감독의 말처럼, 비록 영화 속이지만 병우의 '자살 방지 프로젝트'가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수상한 고객들'이 자살의 문턱에서 되돌아오는 과정에서 설득력이 떨어지고 자본주의의 꽃인 보험의 두 얼굴을 입체적으로 묘사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 영화의 최대 미덕은 희망을 꿈꿀 수조차 없는 이들의 마지막 선택이 자살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공론화한 것입니다. 보험 가입 후 2년이 지나서 죽으면 가족들에게 보험금을 남겨 줄 수 있다는 기막힌 설정만큼 꿈과 희망이 부재한 한국사회를 상징하는 것은 없으니까요. 영화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던 이들의 일상에 병우를 매개로 연대의 손짓을 보내며 삶을 따뜻하게 보듬습니다.

그럼에도 40~50대 가장을 대변하며 대리운전을 하는 오 부장부터 졸지에 싱글맘이 되어 홀로서기에 나선 달동네의 복순, 88만원 세대의 자화상격인 한강의 소연, 그리고 한국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처박혀 있는 영탁의 지하철역은 춥고 어두우며 그들의 삶은 여전히 불안정합니다. 그러기에 이 영화는 마냥 낄낄거리며 왁자지껄 즐길 수만은 없습니다. 이 영화가 코미디보다는 사회성 짙은 블랙코미디에 가까운 이유입니다. 

비겁한 자살? '이명박 표 경쟁'의 씁쓸한 이면  

'연봉 10억 못하면 넌 짐승새끼'라는 경구를 침대 위 천장에 붙여놓고 살던 병우는 오 부장에게 "희망을 갖는 게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희망을 가지지 않고 자살을 선택하려 한다"고 태연자약하게 말합니다. 사람의 삶과 죽음까지 상품으로 사고팔던 그에게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이들이 보일 리 없으니까요. 그렇게 영화는 생사의 길목에 서 있는 사람들조차 이윤의 대상으로 삼는 사회에서 과연 사람의 존재가 제대로 보이겠느냐고 관객들에게 되묻습니다.

특히 한국사회는 자살을 개인의 탓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지배적입니다. 그것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는 신자유주의의 결과든, 그들만의 리그에 편입하려다 추락한 결과든, 사회적 양극화의 극단에서 벼랑 끝으로 내몰린 결과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미쳐 날뛰는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은 곧 패배이며, 그중에서도 자살은 가장 비겁한 선택으로 낙인찍혀 왔을 뿐입니다. 

뱃속 태아 때부터 무덤에 이르기까지 경쟁에 휘둘리는 사회에서 자살을 방지하기 위한 사회적 시스템을 구축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지난 1993년 신자유주의의 수입과 함께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라'는 '이건희 식 개혁'이 자리잡으면서 경쟁은 다른 모든 가치를 압도하며 일상화되었습니다. 여기에 실상은 근대적 토건주의에 불과하면서 자신을 실용과 효율로 포장한 이명박 식 목표지상주의까지 맞물리면서 자살공화국은 가속화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자살공화국의 오명을 씻어내기 위해서라도 유럽처럼 관리 차원에서 자살예방 프로그램을 유기적으로 운영하는 사회적 안전망을 시급히 구축해야 합니다. 또한 한국사회를 연대와 배려, 참여와 소통의 열린사회로 개조해 나가기 위한 사회적 합의와 실천도 병행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이명박 정부같이 '경쟁의 배타적 독점'을 지상과제로 삼는 정권이 아니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가난과 절망을 동전의 양면처럼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 불나방처럼 자신의 삶을 불태우는 '사회적 타살'은 구조적으로 해소될 수 있을 것이며, 최대 이윤이 최대 행복을 보장한다는 신자유주의의 가면은 벗겨지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순결한 속살이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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