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책 <여행의 여왕>
 책 <여행의 여왕>
ⓒ 큰솔

관련사진보기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써서 처음으로 공모전에 냈는데 처음으로 <키스의 여왕>이라는 작품으로 대상에 당선되고 1억 원을 받았다. 대박 작가라는 꼬리표를 달고 3년간 숱한 밤을 새우며 써댔지만 결국에는 한 편도 영화화되지 못하고 사산된 시나리오만 낳았다.

그사이 9년간의 결혼 생활은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벽에 똥칠하기도 전에 앉은 자리에서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 무작정 떠났다. 2년간 세계 47개국을 떠돌다 2009년 1월 말에 돌아왔다."

살다 보면 죽도록 힘든 날들이 생긴다. 정말 평범하기 그지없던 나조차도 서른 나이에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죽도록 힘들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언제나 인생은 돌고 돌기 마련인 듯하다. 그 힘든 골짜기를 지나 다시 또 평온한 위치에 놓였으니 말이다.

<여행의 여왕>(김정화 저, 큰솔 펴냄)은 인생의 최고 정점과 최저 나락을 모두 경험한 작가 김정화의 길고 오랜 여행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대박 작가라는 꼬리표로 출발했으나 한 편도 영화화되지 못한 시나리오를 낳아 쪽박 작가가 되어버린 자포자기 인생.

모든 것을 버리고 싶을 때 그녀는 여행을 시작한다. 2년간 세계 47개국을 떠돌며 다양한 삶을 경험한 그녀는 미움을 내려놓고 평화를 얻어 돌아온다. 그녀의 여정을 따라 다니다 보면 독자 또한 마음 가득한 원망과 미움, 뭔지 모를 세상에 대한 불만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여행의 시작은 엄마의 잔소리에서 시작한다.

"엄마는 내가 과거에 연연해 살고 있고 쥐뿔도 없는 주제에 혼자 잘났다고 착각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내가 이룬 것 죄다 잊어버리고 훌륭한 스승을 찾아 자존심 버리고 새로 시작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저 웃음만 나왔다."

저자는 이 대한민국에서 '내가 더 내려갈 데가 어디 있는데' 하는 극단적인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실패의 나날은 점점 자신감을 갉아 먹고 당당하던 모습을 모두 상실하게 했다. 결국 선택은 떠나는 것.

흙탕물에 뒹구는 인도, 빙하가 녹은 물을 식수로 사용해서 수도를 틀면 걸레 빤 듯 시커먼 물이 나오는 파키스탄. 그 물로 밥도 해 먹고 샤워도 해야 한다니 한국에서라면 꿈도 못 꿀 생활을 여행은 가능하게 한다.

그게 바로 여행이 가진 힘이 아닌가 싶다. 평소 나와 다른 모습으로 살도록 하는 것. 많은 이들은 여행을 통해 색다른 일을 경험하고 일상의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갖는다. 저자의 경우는 2년 동안 세계를 돌아다녔으니 한국의 힘든 경험은 모두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여행의 끄트머리... 어느 순간, 더 이상 화가 나지 않았다

저자의 여행 코스 중 매력적인 곳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이슬람 국가가 아닐까 싶다. 이란에서는 7월의 뜨거운 날씨 속에서도 실내에서조차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게 히잡을 한다고 한다. 심지어 물놀이를 할 때도 여자들은 차도르를 한 채 물속에 들어간다.

반면 이란 남자들은 반소매 차림에 최소한의 이슬람교의 상징인 흰 모자도 쓰지 않은 채 시원하게 다닌다고 하니, 페미니스트인 저자 입장에선 거슬릴 수밖에… 이란의 착한 여성들을 보면서 저자는 자신의 처지에 감사를 느낀다.

재미있는 사실은 미국이 이란을 '악의 축'이라고 칭한다고 이란 사람들이 미국을 싫어하지는 않는다는 것. 오히려 우리가 아메리칸 드림을 꿈꿨던 것처럼 이란 사람들은 미국을 선망한다고 한다. 저자는 이란 정부의 엄격한 통제와 폐쇄성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미국에 대한 환상을 갖게 했다고 말한다.

여행의 마지막 부분은 아프리카 이야기다.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저자는 어느 순간 화를 내지 않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밥에 돌이 씹혀도, 음료수에 파리가 빠져 죽어도, 걸레로도 안 쓸 더러운 행주로 식탁을 닦아도 아무렇지도 않게 된 것이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최근까지도 나는 억울하고 분해서 가슴을 치며 살았다. 왜 내가 준 것의 반의 반도 돌아오지 않느냐며, 왜 나는 자격이 있는데 받지 못하는 것이냐며 억울해했다. 내게 사랑이 그랬고, 일이 그랬고, 돈이 그랬다. (중략) 한국을 떠나온 지 500일이 넘도록 그렇게 지독한 배신감과 결핍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다. 분노가 사라진 자리에 기쁨과 감사가 자리하고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화가 나지 않게 된다. 여행이 가진 놀라운 힘이 아닌가 싶다.

세상의 끝이라는 우수아이아에서 유람선을 타고 비글 해협을 유람하면서 남극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걸 확인한 저자. 그녀는 이곳에 도착하여 슬픔이란 놈을 던져버리기로 계획했으나, 막상 도착하고 보니 슬픔 같은 건 마음속에 없었다고 한다. 2년이나 걸리기는 했지만 여행 덕분에 자유로워진 게 아닐까?

그리고는 지인들에게, 나에게 엽서를 쓴다. 우수아이아에 오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는 '세상의 끝'이라는 스탬프도 여권에 받는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까지 자신이 가야하는 이유를 바로 '돌아가기 위해서'라고 밝히며 당당히 돌아오는 모습에 마음이 울컥하다.

대박 작가에서 쪽박 작가로, 화려한 수상에서 끝없는 나락으로 어려움을 경험한 저자의 여행을 따라 읽으며 나 또한 힘든 인생 따위는 던져버릴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그녀와 함께 울고 웃으며 여행을 한 기분이다.


태그:#여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