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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생활에서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외로움이었다. 외로움은 외로울 때만 알 수 있다.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지금은 외로움을 잘 모른다. 하지만 내게도 사람이 몹시 그리울 때가 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그리워서 클래식 음악의 배경에 소음으로 들리는 기침 소리와 악보 넘기는 손가락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도 나를 알려고 하는 사람이 없는 미국 땅에서 길가의 거지 노파에게 말을 시켜 보았다.

 

며칠째 혼자 집에 있다 보면 빈 의자가 내게 말을 건네 오는 것 같은 환각이 드는 때도 분명히 있었다."

 

사람들에게 있어 외로움은 어떤 의미일까? 부모형제와 동떨어져 외국 생활을 하다 보면 깊은 외로움에 마음이 잠겨 어떻게든 사람의 숨결을 느끼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런 경험은 깊은 사색과 자기 정체성을 탐색할 기회를 제공한다. 그 순간이 힘겨울지라도 지나고 나면 또 사람 속에 섞여 사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책 <카페 에스프레소 꼬레아노>의 저자는 공부를 위해 외국으로 떠났다가 외로움에 몸부림친 경험이 있는 한국 남자다. 하지만 지금 그는 나폴리라는 이국에서 이탈리아 여자 마리안나와 귀여운 세 명의 아이들을 키우며 부지런한 생물학자로 살아가고 있다.

 

보스턴의 케이프 코드 반도 끝자락에서 두 달 동안 오징어 신경을 연구하는 동안 우연히 마주치게 된 한 여인. 그녀가 바로 지금의 아내다. 처음 보는 낯선 이방인이건만 그녀의 얼굴은 마치 친숙한 어머니처럼 보이고 저자의 외로움에 한 줄기 빛을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골인하고 한국 남자와 이탈리아 여자는 미국에 정착해 새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소비지향적인 미국의 삶은 만만치가 않았다. 빚을 내어 자동차와 집을 산 것이 화근이다. 그 빚을 갚느라 몇 년의 고생을 하고 결국 이탈리아의 연구원으로 와서야 다 갚게 된다. 이탈리아는 돈 쓸 일도 없고 또 그럴 시간도 없는 나라다. 인터넷 뱅킹으로 미국 빚을 다 갚은 저자는 잔고가 제로가 된 계좌 내역서를 일기장에 단단히 붙이면서 나폴리에서의 또 다른 삶을 이끌어 간다.

 

책에서 전하는 이탈리아, 그리고 나폴리의 모습은 '도둑의 나라, 스파게티의 나라' 정도로 이곳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다 실질적인 정보와 살아 있는 느낌을 전한다. 나폴리에서 운전하기가 힘든 이유는 신호등을 무시하고 운전하는 사람들, 주차 공간이 아닌 곳에 차를 세우는 사람들, 횡단보도가 아닌 곳에서 길을 건너는 사람들 덕분이다.

 

이렇게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는 나폴리도 나름의 질서와 규칙을 갖고 평화롭게 사람들의 인생을 다져간다. 같은 서구 사회지만 LA의 비버리 힐스에는 병원도 없고 장의사도 없으며 인생의 모든 염세적인 면을 도외시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만이 모여 사는 곳이다. 하지만 나폴리는 발걸음 내딛는 곳마다 골치 아픈 현실들이 놓여 있다.

 

나폴리의 명물 중 하나는 토마토와 모짜렐라 치즈가 어우러진 마르게리타 피자다. 이 피자는 백 년 전 피자 경연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작품으로 당시 나폴리를 다스리던 사보이아 왕가의 말게리타 왕비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식사라는 말처럼 한국인에게는 먹는 것도 '일(事)'인데 이탈리아 사람들은 아무리 번잡한 인생이라도 그 삶을 사랑할 줄 안다.

 

그럼 이탈리아에서 가장 대접받는 이들은 누구일까? 그건 바로 아이들이다. 아이들에게는 어른이 마시는 미네랄 물 값의 두 배를 들인 최상의 물이 공급되고 올리브유도 아이를 위한 최상품이 따로 있어 가격이 두 배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어른과 함께 식사를 할 때도 가장 맛있는 것을 먼저 먹을 권리가 주어진다.

 

그러다 보니 이탈리아 아이들은 구김살이 없으면서 조금은 버릇이 없다. 학예회에서도 부끄럼을 타기보다는 자기 표현력이 강하다고 한다. 한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는 제일 마지막에 식사를 하게 되는 풍습은 우리나라와 정반대라 웃음을 자아낸다. 한국에서 대접받고 자라던 남정네인 저자의 입장은 얼마나 난처할까.

 

저자는 책의 후반부에서 '이탈리아노처럼 숨쉬기 꼬레아노처럼 꿈꾸기'라는 부분을 통해 이탈리아와 한국 문화를 비교하며 우리의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을 소상히 말한다.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은 우리 문화가 너무 급변하다 보니 젊은 층 중심의 일회적 문화가 팽배했다는 것.

 

“너무도 빨리 변하는 사회에서 어디에다 기준점을 삼아야 할지 모르겠다. 적어도 백년 정도는 변하지 않는 보편적 가치 같은 것이 아쉽다. 그래서 나는 한국이나 미국보다 변화에 느리고 세대 간의 일체감과 연속성이 강한 이탈리아의 구식 사회에서 오히려 편안하고 아늑함을 느낀다.”

 

이런 아쉬움은 비단 외국 생활을 오래 해온 사람만 느끼는 게 아닐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뒤죽박죽 엉망인 나폴리도 본받을 만한 점이 꽤 있단 생각이 든다. 느리게 사는 것, 어른과 아이가 친구가 되는 세상, 사람 사이의 인정을 중시하는 낙천주의자들. 이런 이탈리아 민족의 모습은 참 멋스럽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 문화가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다. 다만 지나치게 새것만 좋아하여 낡은 것을 쉽게 갈아 치우는 요즘 세태가 안타까울 뿐. 뉴타운이다 뭐다 하여 낡은 동네를 포크레인으로 갈아엎고 커다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현실, 낡은 옷을 입으면 괜히 누추한 취급을 받는 우리네 모습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프레스토(presto, 빨리)보다는 라르고(largo, 천천히)가 통용되는 사회 모습을 기대해 본다. 느림의 미학이란 말도 있듯이 천천히 움직이더라도 사회는 충분히 발전할 수 있지 않은가!


카페 에스프레소 꼬레아노 - 이탈리아 여자 마리안나와 보스턴에서 만나 나폴리에서 결혼한 어느 한국인 생물학자의 달콤쌉쌀한 이탈리아 문화 원샷하기

천종태 지음, 샘터사(2007)


태그:#여행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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