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가 2011년, 서른 번째 시즌을 맞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고 웃고 환호하고 분노했던 그 서른 해를 기념하고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해마다 함께 기억할 만한 경기의 한 장면을 뽑고, 그것을 단면 삼아 그 시대의 한국야구를 재조명해보고자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부터 시작해 한 주에 한 해씩, 30주 동안 이어진다...<기자주>

지난 두 시즌에서 천당과 지옥을 오갔던 삼미 슈퍼스타즈는 1985년, 개막전에서 무명의 정성만이 천하의 최동원과 맞대결해 5대 1의 완투승을 거두는 이변을 연출하며 기분 좋게 출발했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 날인 3월 31일에 롯데의 신인투수 박동수에게 완봉패를 당한 것을 시작으로 꼭 한 달 뒤인 4월 30일 최계훈이 MBC를 상대로 완봉승을 얻어낼 때까지 무려 30일 동안 단 한 번도 승리를 경험하지 못하는 고역을 치르게 된다.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18연패의 신기록이 작성된 것이 바로 그 해였다.

그 18연패가 몰고 온 파장은 작지 않았다. 18번째 패배를 당했던 4월 29일에는 김진영 감독이 '휴가'라는 명목의 해임 통보를 받아야 했고, 무엇보다도 자금난을 겪고 있던 모기업 삼미가 야구단에 대한 마지막 미련을 끊어내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연패를 끊은 다음 날인 5월 1일 구단 매각이 발표되었고, 삼미 슈퍼스타즈는 3년 반 동안 120승 211패 4무라는 눈물겨운 성적을 남기고 프로야구사에서 가장 먼저 낙오한 팀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그 18연패는 1985년의 한국 프로야구를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하지만 그 해 더 충격적인 연패는 따로 있었다. 어차피 꼴찌인 바에 연패의 길고 짧음이란 그저 수식어를 결정하는 문제일 뿐이었고, 18연패의 신기록 속에서도 삼미는 1할 대 승률에 머물렀던 3년 전보다는 확실히 나은 팀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후기리그의 절정이던 8월 중순에 롯데가 경험했던 사건은, 그 해를 30년의 프로야구사에서 유일하게 한국시리즈를 거른 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삼미의 18연패 vs 롯데의 8연패

그 해 최강팀은 김시진과 김일융, 그리고 이만수와 장효조라는 리그최강의 쌍두마차를 공수 양면에 배치할 수 있었던 삼성 라이온즈였다. 물론 프로출범 이래 그제까지 최강으로 평가받지 못한 적이 한 번도 없으면서도 늘 뭔가 예상할 수 없었던 허점과 어그러짐 때문에 조역에 머물러야 했던 삼성이었지만, 그 해만큼은 달랐다.

김시진 고교시절부터 늘 최동원, 김용남과 더불어 '개띠 삼총사'라 불렸던 1958년생의 명투수. 늘 최동원에 밀려 2인자에 머물렀지만 1985년을 기점으로 역전, 1987년에는 최동원보다 11승 앞선 채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통산 100승 투수라는 영예를 차지할 수 있었다.

▲ 김시진 고교시절부터 늘 최동원, 김용남과 더불어 '개띠 삼총사'라 불렸던 1958년생의 명투수. 늘 최동원에 밀려 2인자에 머물렀지만 1985년을 기점으로 역전, 1987년에는 최동원보다 11승 앞선 채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통산 100승 투수라는 영예를 차지할 수 있었다. ⓒ 삼성 라이온즈


당대 최고의 작전능력을 가진 김영덕 감독이 취임 2년째를 맞이해 선수단에 대한 장악력을 키웠기 때문이기도 했고, 전 해 고의패전이라는 추태를 벌여가면서 골라낸 파트너 롯데에게 대역전패를 당한 망신이 조여 놓은 긴장감 때문이기도 했다. 그 해 삼성 라이온즈는 가장 강했고, 가장 명민했으며, 가장 냉철한 팀이었다. 

반면 삼성을 제외한 5개 팀의 전력은 다 거기서 거기였다. 삼미가 전기리그 개막 이튿날부터 내리 18연패를 당하며 일찌감치 경쟁에서 이탈하긴 했지만, 청보로 유니폼을 갈아입은 후기리그에는 한때 선두권까지 바라보며 4위로 올라선 것만 보더라도 그랬다. 저마다 강점과 약점이 뚜렷이 드러나는 형편이었고, 그 강점들과 약점들이 맞물리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천적관계가 두드러진 한 해였다.

그 결과 전기리그에서 2위 OB와 5위 MBC 사이의 승차는 고작 5.5경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수준이 다른 팀이었던 삼성 라이온즈는 OB를 무려 11경기차로 떼어놓으며 간단히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741의 승률은 기별 최고기록이었다.

그리고 후기리그 들어서도 삼성 라이온즈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전 해에 OB 베어스가 전후기 통합승률 1위를 차지하고도 전후기리그 각각 2위에 머물렀던 탓에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한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1985년부터는 종합승률제가 도입되었기 때문. 즉, 전·후기리그 우승팀이 한국시리즈에서 맞붙는 방식은 그대로 유지하되 전·후기리그 통합승률 1위 팀에게도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보장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세 팀이 한국시리즈를 치를 수는 없는 일이기에, 84년처럼 전·후기리그 우승팀과 종합승률1위 팀이 서로 다를 경우에는 전·후기리그 우승팀이 플레이오프를 치러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가려야 했다. 따라서 전기리그 우승팀인 삼성 역시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확보하지는 못한 셈이었고, 따라서 후기리그에서도 최선을 다 해 종합승률 1위에 올라야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후기리그 들어서는 새로운 강자가 나타났다. 그제까지 경험한 네 번의 시즌 동안 늘 시즌 내내 강하지는 못했지만, 어떤 흐름을 만나면 단기간은 최강의 팀으로 변신하곤 했던 롯데 자이언츠였다. 그 해는 82년, 84년과 달리 봄이나 가을이 아닌 여름에 그 흐름이 도래했고, 롯데 자이언츠는 7월 말부터 연승행진을 벌이며 일거에 선두로 치고 나갔다.

그 무렵, 삼성 라이온즈는 2진급이었던 진동한과 양일환을 중용하며 에이스들의 어깨를 아끼고 있었다. 하지만 김시진과 김일융이 오랜만에 등판하는 날에도 전기리그만큼의 위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여유가 있는 것은 분명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는 면도 분명히 있었다.

반면 롯데는 최동원 한 사람에게만 의존했던 지난 해와 달리 제법 균형을 갖추고 있었다. 여전한 원투펀치 최동원과 임호균에 재일동포 출신의 김정행이 가세했고 신인 박동수와 양상문까지 다섯 명의 투수가 100이닝 이상을 소화하는 '정상적인 마운드'를 비로소 운용하고 있었다. 타선에서는 김용철이 부진했지만 김용희, 유두열, 홍문종이 전기리그에 이미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며 공격 각 부문의 10위권에 나란히 진입해있을 만큼의 위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특히 그 해 롯데의 '보약' 노릇을 했던 것은 7월 26일부터 31일 사이에 벌어진 5연전을 고스란히 헌납하고 선두권경쟁에서 튕겨 나가버린 해태 타이거즈였다. 롯데는 그 5연승을 발판 삼아 후기리그 단독선두로 질주했고, 우승을 가시권에 넣기 위해 넘어야 할 마지막 고개를 만난 것이 8월 6일이었다.

마지막 고비에 걸려 넘어지다

8월 6일과 7일에는 부산에서, 그리고 하루 건너 9일부터 12일까지는 대구에서 선두 롯데와 2위 삼성의 5연전이 치러져야 했다. 후기리그 일정의 정확히 절반을 막 넘어서던 그 시점에서 롯데와 삼성의 승차는 4.5였고, 삼성과 3위 해태의 승차는 2였다. 롯데로서는 2승만 건져도 승차 3.5를 유지하며 선두자리를 굳힐 수 있는 기회였고, 삼성으로서는 더 이상의 격차를 허용하면 2위 자리마저 위협받을 수 있는 위기였다.

물론 삼성이 다섯 경기를 모두 잡아내 순위를 뒤집는다거나, 반대로 롯데가 삼성 마운드를 전멸시키며 중위권 싸움을 안갯속으로 밀어 넣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미 전기리그 우승으로 배가 불렀던 삼성이나 이변이 없는 한 후기리그 우승이 안정권에 들어왔다고 본 롯데 모두 그런 극단적인 상황만 아니라면 큰 불만이 없다는 심산이었다. 

부산에서의 2연전은 말 그대로 탐색전이었다. 롯데는 1차전에 박동수를 세웠고 삼성은 진동한과 권영호로 맞섰다. 그리고 타격전 끝에 7대 5로 삼성이 승리했지만, 2차전에서도 롯데는 그 해 단 한 번도 승리를 기록하지 못한 이진우를 내세웠고 다시 삼성 황규봉에게 완봉패를 당하며 2연패로 몰리게 된다.

그래서 제대로 된 결판은 3차전에 벌어졌다. 더 이상 밀릴 수 없었던 롯데에게는 '언제라도 필요한 1승을 만들어 줄' 구세주 최동원이 있었다. 8월 9일 대구에서 열린 3차전에 롯데가 최동원을 선발로 내보낸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삼성이 에이스 김시진을 그 경기에 등판시키는 맞불을 놓은 것이었다.

최동원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 한국야구에서 '에이스'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이름이다. 당대 투수들의 평균적인 구속보다 10km이상 빠른 강력한 직구와 최고 수준의 커브를 무기로 국내무대와 국제무대를 휩쓸었고,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구단과 입단계약을 맺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대부분 약체팀에서 선수생활을 했고, 늘 비정상적인 무리를 감수하거나 자청했던 탓에 후배인 선동열 만큼의 오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 최동원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 한국야구에서 '에이스'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이름이다. 당대 투수들의 평균적인 구속보다 10km이상 빠른 강력한 직구와 최고 수준의 커브를 무기로 국내무대와 국제무대를 휩쓸었고,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구단과 입단계약을 맺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대부분 약체팀에서 선수생활을 했고, 늘 비정상적인 무리를 감수하거나 자청했던 탓에 후배인 선동열 만큼의 오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 한국야구위원회

다시 만난 숙적, 최동원과 김시진

만약 그 5연전에서 4승 이상을 잡겠다는 욕심을 가졌다면, 삼성의 김영덕 감독은 그 경기를 버리는 대신 4,5차전에 김시진과 김일융을 투입하는 쪽을 선택했을 이였다. 잡을 경기와 버릴 경기를 뚜렷이 구분하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차피 선두 팀을 상대로 한 5연승이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반대로 이미 전기리그를 우승한 삼성 입장에서는 져도 큰 타격이 없을 상황에서 최동원의 기를 꺾어보자는 모험을 걸어볼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먼저 흔들린 것은 김시진이었다. 동갑내기로서 고교시절부터 실업시절을 거치며 라이벌로 불렸지만 늘 결정적인 고비에서 패퇴하며 2인자로 낙인찍혔던 김시진으로서는 필생의 숙적을 상대로 또다시 썩 유쾌하지 않은 시험대에 오른 것이 마음을 흔들었기 때문인 지도 모른다.

롯데는 1회 초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볼넷을 골라 출루한 데 이어 내야안타로 간단히 한 점을 만들어냈다. 김시진의 슬라이더는 여전히 위력적이었지만 감각이 무뎌진 듯 제구에 애를 먹는 모습이었다. 반면 최동원은 별다른 위기 없이 5회까지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하지만 김시진은 빠르게 컨디션을 회복했고, 2회부터는 칼날같은 제구력을 자랑하는 예전의 김시진으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최동원은 주무기인 직구의 구속이 많이 떨어져있었고, 시즌 내내 최동원에게 눌려있었던 삼성 타자들도 두 세 번 타순이 돌아오자 그 날의 최동원은 공략할 수 있는 상대임을 간파하기 시작했다. 5회에 배대웅의 중전안타로 동점을 만든 데 이어 6회에 들어서자마자 5안타를 집중시켜 4점을 뽑아내며 드디어 최동원을 쫓아낼 수 있었다.

김시진의 7.2이닝 5안타 2실점 호투에 힘입은 3번째 승리. 삼성은 그 날 경기를 통해 5연전에서 최대목표로 삼았던 3승을 이미 확보한 데다 최동원 마저 깨뜨리며 김시진과 타선의 기를 살려놓는 망외의 소득까지 올릴 수 있었다. 이제 내친 김에 두 번을 더 이기면 후기리그에서도 단독선두에 올라설 수 있게 되었고, 이미 '심리적 지지선'인 최동원 마저 무너진 롯데가 그걸 막아설 여력은 없어 보였다. 한국시리즈에 관한 '안 좋은 추억'이 많은 삼성으로서는 가능하기만 하다면 전후기리그 우승과 통합최고승률을 모두 휩쓸며 그대로 통합우승을 확정짓는 것이 최선임은 물론이었다.

그리고 남은 두 경기에서 롯데가 그런 삼성의 기세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하루 쉬고 열린 11일 경기에서는 장효조, 배대웅, 김용국, 오대석이 내기라도 하듯 홈런포를 날려대며 김정행이 버틴 롯데를 12대 5로 난타했고, 12일의 마지막 5차전에서는 김일융과 황규봉의 2인조가 이진우, 양상문으로 맞선 롯데를 다시 3대 1로 꺾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5연승. 결국 우려는 현실이 되었고 4.5경기차는 뒤집혀 삼성이 0.5경기차 선두로 올라서는 결과가 빚어졌다.

롯데는 그 충격의 5연패를 시작으로 13일 잠실에서 청룡에게, 다시 16일과 18일에는 광주에서 그 해 내내 쥐고 흔들었던 타이거즈에게마저 반격을 당하며 연패행진을 8로 늘려놓은 채 선두싸움을 계속할 기력을 잃고 만다. 반면 삼성은 5연전이 끝난 뒤 한 호흡 쉬어 8월 25일부터 9월 17일까지 무려 13연승의 아찔한 질주를 벌이며 전기리그에 작성한 최다연승 기록을 경신하게 된다. 최동원을 상대하며 부활한 에이스 김시진은 그 연승 기간 중 무려 6승을 추가하며 최동원과의 통산승수 경쟁에서도 한 발 앞서 나가게 된다.

삼성이 후기리그마저 석권하며 그 해 통합우승을 결정지은 것은 그로부터 한 달여 뒤였다. 하필 9월 17일부터 19일까지 부산에서 김빠진 2위를 유지하고 있던 롯데와 다시 3연전을 치르게 됐을 때 삼성은 이미 매직넘버 2를 남겨두고 있었고, 단 한 경기만이라도 지면 그대로 안방에서 상대팀의 우승축하연을 열어주어야 했던 롯데의 강병철 감독은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겠다'며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 3연전의 첫 경기였던 17일에 선발등판한 삼성의 김시진을 뚫어낼 힘이 롯데 타선에는 남아있지 않았고, 패기를 무기 삼아 한 때 2인자로까지 떠올랐던 롯데의 박동수 역시 기세가 오른 삼성 타선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경기는 7대 4로 끝났고, 롯데는 홈인 구덕구장에 삼성 측의 샴페인 반입을 허락하지 않는 소심한 복수로 분을 삭여야 했다.

왜곡된 기억, 치열했던 1985년

올드팬들에게 1985년의 프로야구가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하는 것은 삼성의 13연승과 통합우승, 그리고 삼미의 18연패다. 그래서 늘 승패가 결정된 경기들로 시즌이 흘러간 무료한 시즌이었던 것 같은 윤색된 기억이 남아있기도 하다.

하지만 출범 4년째를 맞은 그 해에도 프로야구는 진화하고 있었고, 전력의 격차도 꾸준히 좁혀지고 있었다. 어느 팀이라도 페이스의 과열을 자제하지 못하면 연승 끝에 곧바로 연패에 빠지며 서로 물고 물리는 잔인한 게임이 시작되었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한두 명의 에이스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원시적인 운영도 조금씩 사라지게 되었다.

그 해 종합승률 1위 팀과 최하위 팀 사이의 경기차는 38이었다. 41까지 벌어졌던 1982년에 버금가는 큰 격차였다. 하지만 1위 팀과 2위 팀 사이의 격차만 무려 18.5에 달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시즌 중의 열기는 결코 차갑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삼성 라이온즈라는 단 한 팀이 너무나 강했다는 것이고, 또한 그 최강팀이 시즌 내내 6개 구단 중 가장 독한 마음가짐으로 무장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것은 전 시즌이었던 1984년의 대참사가 낳은 부산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거대한 흐름의 한 고비에 두 에이스의 특별한 대결이 있었음을 지나칠 수 없다. 늘 가장 높은 곳에서 맞대결해 늘 이겼던 최동원과 늘 졌던 김시진 사이의 오랜 라이벌전이 조금씩 다르게 전개되기 시작하는 변곡점이 바로 그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서른을 눈앞에 두고 있던 두 명투수의 승부는 이제 '투혼'에서 '체력'으로 옮겨지고 있었고, 최강팀 삼성과 약체팀 롯데라는 배경의 힘이 그렇게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선동열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기점으로 국가대표팀 에이스로 올라섰고, 1985년에 프로무대에 데뷔했다. 데뷔전에서 삼성의 김일융과 맞대결해 패배했지만, 그 해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챙겼고, 이듬해부터 곧장 김시진, 최동원과 에이스 삼국시대를 열었다. 물론 프로무대에서의 성적은 압도적으로 선동열의 우위였지만, 그 역시 김시진의 통산승수 기록과 최동원의 통산탈삼진 기록을 돌파하는 시점에서 한국무대에 대한 싫증을 느꼈을 만큼 두 선배의 벽은 거대한 것이었다.

▲ 선동열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기점으로 국가대표팀 에이스로 올라섰고, 1985년에 프로무대에 데뷔했다. 데뷔전에서 삼성의 김일융과 맞대결해 패배했지만, 그 해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챙겼고, 이듬해부터 곧장 김시진, 최동원과 에이스 삼국시대를 열었다. 물론 프로무대에서의 성적은 압도적으로 선동열의 우위였지만, 그 역시 김시진의 통산승수 기록과 최동원의 통산탈삼진 기록을 돌파하는 시점에서 한국무대에 대한 싫증을 느꼈을 만큼 두 선배의 벽은 거대한 것이었다. ⓒ 한국야구위원회


물론 곧 두 사람의 라이벌전에 대해 사람들이 더 이상 관심을 가질 수 없게 만드는, 선동열이라는 이름의 괴물 투수가 프로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것 역시 바로 그 해였지만 말이다.

김은식 프로야구 최동원 김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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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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