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FTA 결과로… (중략) 마킬라도라로 불리는 1000여 개의 외국계 공장이 밀집된 후아레즈에서는 3초에 TV 한대, 7초에 컴퓨터 한대가 생산된다. 주로 어린 여자를 고용하는데, 싼 임금과 과다한 노동시간 및 열악한 조건에서도 일을 잘 하기 때문이다. 마킬라도라는 24시간 내내 가동된다."

그리고 "후아레즈에서 여자 시체 3구가 또 발견되었다"는 내레이션이 흐릅니다. 이어 경찰들이 이 사실을 보도한 후아레즈의 지역신문사 엘 솔을 수색해 신문들을 모조리 압수해 갑니다. 1993년부터 450명이 넘는 여성이 성폭행 뒤 살해당하고, 500명 가까운 여성들이 실종됐지만 범인은 여전히 오리무중인 멕시코 후아레즈 연쇄살인 사건을 영화화 한 <보더타운(2007년작)>의 오프닝 장면입니다.

영화는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도시인 후아레즈에서 벌어진 끔찍한 참상을 복기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후아레즈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묻혀간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의 죽음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아느냐고. 스릴러 장르를 무색게 할 정도로 후아레즈의 현실을 직설적으로 재현한 영화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그 배후로 고발합니다. 

후아레즈 사건의 배후는 NAFTA

멕시코 남부 원주민 출신 소녀 에바((마야 자파타)는 TV를 조립하는 마킬라도라에서 일합니다. 하루 낮밤을 꼬박 새운 24시간 교대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가려던 어느 날, 납치됩니다. 허허벌판에서 성폭행당한 뒤 목 졸려 암매장되지만 어스름 새벽녘 흙더미를 헤치고 극적으로 살아나옵니다.

 24시간 교대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다 납치된 에바가 성폭행 당한 뒤 암매장됐다 흙더미를 헤치고 살아 나온다.
ⓒ 모비우스 엔터테인먼트&엘 노르테 프로덕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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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는 미국 시카고 센티널지로 이동합니다. 편집국장 조지(마틴 쉰)가 여기자 로렌(재니퍼 로페즈)에게 후아레즈 사건 취재를 지시합니다. 야심만만한 로렌은 특종을 잡을 경우 해외특파원으로 나간다는 약속을 보장 받고 멕시코행 비행기에 오릅니다.

한편, 후아레즈에서 '후아레즈 사건'을 보도했다 신문을 싹쓸이 당한 엘 솔. 발행인 디아즈가 기자들과 후속대책을 논의하는 중에 한 때 함께 일했던 로렌이 방문합니다. 끊임없는 살해 협박에도 불구하고 후아레즈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디아즈에게 취재 협조를 요청합니다. 그리고 며칠 뒤, 에바도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곳이라며 디아즈를 찾아옵니다.

영화는 이들 세 사람의 동선을 따라 후아레즈 사건의 배후를 밀도 있게 천착해 들어갑니다. 비공식적으로 수천 명에 이르는 여성노동자들이 사망 실종됐음에도 멕시코 정부와 경찰은 물론 국제사회가 20년 가까이 침묵하고 있는 것이 누구를 위한 암묵적 카르텔인지 카메라는 집요하리만치 끈질기게 추적해 갑니다.

NAFTA의 상징 마킬라도라

후아레즈는 본래 조용하고 작은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1993년 NAFTA 체결로 자유무역지대가 탄생하면서 마킬라도라가 급속도로 들어섭니다.

 후아레즈 사건의 범인을 잡기 위해 마킬라도라에 위장 취업한 로렌이 성폭행 직전 탈출해 디아즈와 함께 범인의 행방을 추적한다.
ⓒ 모비우스 엔터테인먼트&엘 노르테 프로덕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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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킬라도라는 부품과 원료를 수입해 조립한 뒤 수출하는 임가공업체를 말합니다. 마킬라도라의 주인은 주로 미국 자본이나 미-멕시코 합작입니다. 마킬라도라에서 생산한 제품은 값싼 노동력에 기반한 가격 경쟁력으로 다국적기업의 군침을 돌게 했으며, 그 덕분에 NAFTA 체결 뒤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 것입니다.

멕시코 정부의 관심사는 경제성장을 위해 더 많은 다국적기업의 마킬라도라를 유치하는 데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저임금의 값싼 노동력을 공급할 뿐, 여성노동자들의 안전 등 그 밖의 문제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마킬라도라에서 여성노동자들은 연장수당 없이 주 75시간 노동에 하루 일당 5달러를 받습니다. 열악한 근무환경에 노동조합도 전무한 이곳에서 24시간 교대 근무를 마친 여성노동자들은 범죄의 표적으로 내 몰립니다.

마킬라도라 또한 여성노동자들의 안전을 위해 어떠한 안전조치도 하지 않습니다. 에바와 같은 여성노동자들이 사는 곳은 후아레즈 외곽 빈민촌입니다. 자정에 출퇴근하는 여성노동자들은 각자 알아서 출퇴근해야 할 뿐, 통근버스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여성노동자들이 전신을 구타당한 뒤, 성폭행당하고, 목 졸린 채, 후아레즈 벌판 등지에 암매장되어 왔습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난 에바가 디아즈를 찾은 것 역시 마킬라도라의 현실을 역설적으로 대변합니다. 진범을 잡기 위해 법정진술을 하기로 한 에바를 지켜줄 보호막이 전무합니다.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던 에바는 미국으로 밀입국하고, 디아즈는 결국 살해당합니다. 그 와중에 로렌은 에바가 근무했던 마킬라도라에 위장 취업합니다. 에바와 똑같이 납치당해 살해당하기 직전 탈출해, 범인 중 한 명을 잡지만 주범은 놓치고 맙니다.

NAFTA의 이익 앞에 무릎 꿇는 저널리즘

"후아레즈 여성들의 비명소리는 잠잠해졌다. 아무도 귀 기울이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노동으로 수익을 얻은 다국적기업들도 그랬고 NAFTA로 이익을 보는 멕시코와 미국정부도 그랬다. (중략) 모든 것이 손익계산을 따진 결과다. 그래서 사망자 수는 더욱 늘어만 간다. 에바 히메네즈, 16세. 그녀가 버는 돈은 일당 5달러다."

 로렌이 후아레즈 사건의 특종을 낙종시킨 편집국장 조지를 찾아 가 일전을 벌이고 있다. 로렌은 신문사를 걷어찬 뒤 엘 솔의 편집장이 된다.
ⓒ 모비우스 엔터테인먼트&엘 노르테 프로덕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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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레즈 사건의 특종을 잡은 로렌은 위의 기사를 시카고 센티널지로 송고합니다. 하지만 특종을 잡아 오라고 큰소리 쳤던 조지는 기사를 낙종시켜 버립니다. 미국의 다국적기업과 상원의원과 멕시코 정부가 신문사에 압력을 가해 보도금지로 분류시켜버린 것입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접한 로렌은 시카고행 비행기에 오릅니다. 

데스크에서 조지와 맞닥뜨린 로렌은 한바탕 설전을 펼칩니다. 조지는 후아레즈 기사에 대해 폭로기사나 보도하던 때는 지났다며, 미국의 대기업들이 원하는 자유무역과 세계화 뉴스와 연예뉴스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신문사 회장은 로렌에게 낙종하는 대신 해외특파원 자리를 주겠다며 당근을 던집니다. 반면 로렌은 후아레즈 기사는 에비와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기사라며 목청을 돋웁니다.

FTA 앞에서는 진실보도도 한낱 휴짓조각 취급을 받는 현실에 로렌은 절망합니다. 또한 후아레즈에서 숨져 간 여성들의 죽음이 'NAFTA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카르텔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남미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던 로렌은 신문사를 그만둡니다. 그리고 후아레즈로 돌아가 엘 솔의 문을 엽니다.

또한 미국으로 밀입국했다 추방당한 에바는 로렌과 함께 다시 증언대에 나섭니다. 그리고 얼굴을 드러내는 범인은 충격적입니다. 증언 전날, 에비를 살해하기 위해 범인은 빈민촌으로 숨어듭니다. 이윽고 조금 큰 개집 같은 움막들이 닥지닥지 붙어 있는 곳에서 불길이 타 오르고, 성난 불길은 빈민촌 넘어 마킬라도라를 집어삼킬 듯이 거세게 타오릅니다.

재개되는 한미 FTA는 '퍼주기' 협상에 불과하다

영화는 FTA의 불편한 진실을 한 치도 비켜가지 않고 정면에서 고발합니다. 'NAFTA 카르텔'이 자기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어떻게 가동되며, 멕시코의 값싼 잉여노동이 어떻게 안정적으로 공급는지.

NAFTA를 상징하는 마킬라도라의 도시 후아레즈가 어떻게 붕괴되며, 에바를 비롯한 여성노동자들의 삶과 죽음 앞에서 저널리즘 본연의 역할이란 무엇인지를 라틴아메리카의 정열적인 미학적 색채 위에 투영시킵니다.

영화는 보기 드물게 생생한 현실로 와 닿습니다. 이르면 다음 주에 한미 FTA 협상이 재개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번 협상의 핵심은 '투자자-국가 소송제'(ISD)입니다. ISD는 외국기업들이 투자국 정부의 정책 등으로 손해를 봤을 때 해당 국가를 제소할 수 있는 대표적인 독소조항입니다.

영화 속 멕시코는 ISD로 인해 국가의 공공정책이 침해당한 첫 나라입니다. 미국 기업 메탈클래드가 멕시코에 유독성 폐기물 매립처리장을 건설하기 위해 토지와 건설 허가권을 매입했다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자 멕시코 정부를 상대로 제소한 것입니다. 재판결과 멕시코는 1,668만 달러라는 막대한 보상금을 지급하고야 말았습니다.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이런 ISD를 협상에서 아예 제외시킨 것은 결국 미국 측 요구인 자동차 등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더욱이 연평도 포격으로 미국의 입김이 거세진 상황에서 재개되는 한미 FTA는 '퍼주기' 재협상에 불과합니다. 결국 멕시코처럼 한국의 국가정책 주권을 미국의 다국적기업에게 완벽하게 개방하겠다는 것입니다.

일개 통상교섭본부장이 국민과 국회를 무시하고 한미 FTA를 쥐락펴락하는 이명박 정부에게서 후아레즈에서 숨져 간 여성노동자들의 원혼이 보이는 이유는 무얼까요?

보더타운 NAFTA 한미 FTA 투자자-국가 소송제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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