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한 장면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한 장면 ⓒ 소니 픽처스



할리우드는 지난 10여 년간 꾸준히 중년 로맨스를 만들어 냈다. 내 기억에 가장 오랜 것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1997)>였던 것 같다. 소설가이자 강박증 환자 잭 니콜슨이 천식을 앓는 아들을 키우는 웨이트레스 헬렌 헌트와 사랑에 빠지는 영화였는데 설정이 특이해서인지 중년 영화라는 인상은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극중 나이를 보면 헌트는 적어도 30 중반의 이혼녀고 니콜슨도 그보다 훨씬 늙은 총각이었다.

니콜슨은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Something's Gotta Give, 2003)>에서 본격적인 중년의 사랑을 연기한다. 상대역은 다이앤 키튼. 인기 좋은 플레이보이 독신남이 자기의 영계(미국에서도 영칙스(young chicks)라고 부른다) 애인의 엄마한테 반하는 이야기다. 의사로 나오는 또 다른 영계 키누 리브스가 다이앤 키튼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스토리가 겹쳐 진행되다가 결국 중년-중년의 연애로 마무리된다.

2년 뒤엔 케빈 코스트너가 중년 연애에 합세한다. <미스언더스탠드(The Upside of Anger, 2005)>에서 네 딸의 엄마인 조앤 앨런은 남편이 젊은 여비서와 도망쳐 버린 성마른 여자다. 쉴 새 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딸들과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라디오 방송 디제이로 간신히 먹고 사는 전직 야구선수 코스트너와 사랑에 빠진다. 셋째 딸 에리카 크리스텐슨이 아버지뻘인 마이크 바인더와 사랑하는 이야기도 병행된다.

코믹한 중산층의 중년 연애

15년 전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에서 사진작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따라가지 못하고 가정을 지켰던 중년 주부 메릴 스트립은 <사랑은 복잡해(It's Complicated, 2009)>에서는 이혼한 전남편 알렉 볼드윈과 과감한 불륜(?)을 자행한다. 젊은 여비서와 눈이 맞아 이혼한 볼드윈의 배신을 삭이는 데 10년을 소비한 후 역시 이혼의 상처를 다독이는 건축가 스티브 마틴과 사귀려는 순간, 스트립은 넉살스럽게 접근하는 전남편 볼드윈에게 빠져들면서 배신자를 배신하는 묘한 상황을 연출한다.

지금까지 할리우드의 중년 연애는 중산층과 코믹이라는 특징을 보였다. 중년 연애 당사자 중 적어도 한 사람은 경제적, 사회적으로 안정돼 있다는 설정은 그들의 나이 때문에라도 설득력이 있다. 또 당사자가 사랑에 빠져드는 과정이 코믹하게 처리된 것은 아직 무언가 남은 쑥스러움을 가려주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하비의 마지막 로맨스(2008)>는 이러한 할리우드 중년 연애의 전형에서 좀 벗어나 있다. 더스틴 호프만과 엠마 탐슨은 둘 다 경제적으로 중산층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안정돼 있지도 않고, 정서적으로도 불안하기 짝이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불쌍한 '호프만'과 '탐슨'

<하비의 마지막 로맨스(2008)> 원제목은 <하비의 마지막 기회>다. 그 마지막 기회는 호프만의 것만이 아니라 탐슨의 것이기도 하다.

▲ <하비의 마지막 로맨스(2008)> 원제목은 <하비의 마지막 기회>다. 그 마지막 기회는 호프만의 것만이 아니라 탐슨의 것이기도 하다. ⓒ 위키 백과사전의 사진

호프만은 젊을 적 소원이던 재즈 음악가가 되지 못하고 광고 음악을 만들며 입에 풀칠하는 이혼남이다. 탐슨은 작가의 꿈을 접지 못한 채 설문 조사원으로 살아가는 노처녀다. 호프만은 전처와 딸로부터 냉대를 받는데 '그래 마땅한 루저(loser)'로 그려져 있고, 탐슨도 집착 증세를 보이는 어머니 때문에 다른 인간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한다.

그러니 아무리 봐도 통상적인 할리우드식이 아니다. 할리우드 영화는 대개가 위너들 사이의 대결이거나 루저를 구원하는 위너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하비의 마지막 로맨스>의 주인공들은 둘 다 루저들이다.

사람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두 요인이 있다면 일과 사랑일 것이다. 하고 싶은 일에 성공하고 살고 싶은 사람과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호프만은 일과 사랑에 모두 실패했다. 재즈 음악가가 되지도 못했고 아내와 딸도 잃었다. 탐슨 역시 낙태로 끝나고 만 사랑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혼자 사는 계약직 직원이다.

'위로'와 '격려'가 필요해

루저와 루저가 힘을 합쳐서 위너가 될 수 있을까? 영화는 거기까지 그리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럴 수 있다는 암시는 주고 있다. 루저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와 격려다. 남자 루저 호프만은 여자 루저 탐슨에게 딸의 결혼식에서 냉대 받는 처지를 털어놓고 위로를 받는다. 여자 루저 탐슨은 낙태로 인한 상처를 털어놓고서 남자 루저 호프만에게서 위로를 받는다.

여자 루저는 잔뜩 위축돼 있는 남자 루저를 부추켜 딸의 결혼식 피로연에 참석해서 멋들어진 연설을 하도록 만든다. 남자 루저는 여자 루저가 포기하지 못한 작가의 꿈을 부끄러워하지 말도록 격려한다. 호프만의 피아노 연주를 탐슨이 칭찬하고 탐슨의 아름다움을 호프만이 감탄한다. 별꼴이다.

그러나 이들의 '별꼴'은 아름답다. 위로와 격려를 거듭하면서 이들은 재즈 음악가와 작가를 위한 자신들의 "마지막 기회"를 불사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호프만을 위한 마지막 기회일 뿐 아니라 탐슨을 위한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원 제목은 <하비의 마지막 기회>다. '마지막 로맨스'라는 한국말 제목은 흥행을 위한 것이리라).

베이비 붐 세대의 노령화가 만든 트렌드

중년 연애를 다루는 할리우드 영화는 아직도 진화 중이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에서만 해도 중년 여성이 중년 남성과 눈이 맞았다 해서 일을 벌일 수 없는 윤리가 작동 중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1997)>와 <사랑할 때 버려야할 아까운 것들(2003)>을 거쳐 <사랑은 복잡해(2009)>에 이르면 적어도 중산층의 중년들은 거리낌 없이 짜릿한 연애를 즐길 수 있다.

그러다가 <미스언더스탠드(2005)>와 <하비의 마지막 로맨스(2008)>에 이르면 멋들어진 저택을 갖고 있거나 비즈니스를 경영하거나 전문 직업을 갖지 못한, 그래서 중산층에 끼지 못하는 궁상맞은 중년들의 연애 모습도 보여준다. 할리우드는 중년 연애의 보편화를 향해 진화중인 것이다.

이같은 진화는 왜 생겨난 것일까? 그것은 미국의 베이비 붐 세대의 노령화 덕분일 것이다. 비교적 안정적으로 늙어온 이들은 은퇴시기에 접어들었음에도 아직 건강하고 정신도 말짱하다. 이들에게 누려 마땅한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해야 하는 것은 할리우드의 의무일 것이다. 베이비 붐 세대라고 해서 모두 중산층은 아닐 테니까 궁상맞은 중년의 모습도 보여 주어야 한다.

'중년 연애' 영화의 흥행 성적?

그렇다면 할리우드의 중년 연애는 흥행이 되는 걸까? 이 역시 진행형인 듯싶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3억1000만 달러, <사랑할때 버려야할...>은 2억7000만 달러, 그리고 <사랑은 복잡해>도 2억2000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배트맨: 다크 나이트(10억 달러)>나 <007:카지노 로얄(5억9천만 달러)>에야 훨씬 못 미치기는 한다. 하지만 아직 훨씬 젊은 디카프리오와 윈슬렛 주연의 <레벌루셔너리 로드(2008)>도 7500만 달러의 수입을 올리는 데 그친 것을 보면 적어도 중산층 중년 연애 영화들은 대박은 아니라 해도 나쁜 성적은 아니다.

그러나 궁상맞은 중년 연애는 사정이 좀 다르다. <미스언더스탠드>는 2800만 달러, <하비의 마지막 로맨스>는 3200만 달러의 수입을 올리는 데 그쳤다. 호프만과 탐슨이 주연이었는데도 그 정도다. 중산층 연애에 비해 10분의 1이고, 같은 해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다른 하비 영화 <밀크(2008, 5400만 달러)>의 절반에 불과하다.

하이힐까지 벗어던진 탐슨이 호프만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화사한 런던의 가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이 아름다우면서도 조금 위태롭게 느껴진 것은, 상영관의 썰렁함과 저조한 상영 수입 때문인 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할리우드의 궁상맞은 중년 연애는 당분간 '코믹'이라는 수식어를 단 채 진화를 계속해야 할 것 같다.

평미레 뜻철학 호프만 탐슨 마지막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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