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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2월 14일 베이징 켐핀스키 호텔에서 광고기획사 '아자'의 박기영 대표(왼쪽)와 방종삼 금강산국제관광총회사 총사장이 북한에서의 독점 광고촬영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을 당시 안기부 공작원으로 아자에 위장취업한 박채서 전무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
 1997년 2월 14일 베이징 켐핀스키 호텔에서 광고기획사 '아자'의 박기영 대표(왼쪽)와 방종삼 금강산국제관광총회사 총사장이 북한에서의 독점 광고촬영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을 당시 안기부 공작원으로 아자에 위장취업한 박채서 전무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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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 박채서는 2003년 3월경 중국으로 출국해 켐핀스키 호텔에서 당시 북한 작전부 소속 공작원이던 리호남을 만나 개성공업지구 내에 골프장을 포함한 리조트를 건설하는 문제점에 관해 논의하는 과정에서 리호남으로부터 사업대상 지역이 북한의 군사지역이라 군부의 협조가 필요한 바, 북한 군부를 상대로 사업추진을 설득할 수 있도록 북한 군부에 제공할 남한 군사정보나 자료를 구해달라는 지시를 받음으로써 반국가단체 구성원인 리호남으로부터 지령을 수수했다.…(중략)…

피고인은 2003년 9월경 리호남의 지령에 따른 목적수행을 위해 리호남에게 전달할 군사자료를 입수할 목적으로 제3사관학교 2년 선배이며 당시 보병학교 전술학1처장으로 복무하던 김○○(58)에게 접근해 책상 위에 놓인 <보병대대> 교범을 달라고 요청해 건네받은 뒤에 10월경 중국으로 출국해 켐핀스키 호텔에서 리호남 및 북한 국방위 소속 김과장(50대 초반)을 만나 <보병대대> 교범을 전달하고 다음날 돌려받는 등으로 2005년 7월까지 교범 10종을 탐지-수집 및 전달했다."

검찰의 공소장에 따르면, 반국가단체(북한) 구성원인 리호남(56, 본명은 '리철'이나 '리철운'이라는 가명도 사용)은 국가안전기획부의 해외공작원(공작 암호명 '흑금성')'이었던 박채서(56)씨를 포섭해 군사자료 입수 등을 지시한 상부선이다. 공소사실의 핵심은 리호남에게 포섭된 박채서씨가 리호남의 지령에 따라 목적수행을 위해 군사교범 10종과 탈북자 신상자료 등을 베이징 켐핀스키 호텔에서 리호남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공소장에 '리호남' 120번, '켐핀스키 호텔' 20번 넘게 등장

북한 리호남 참사가 2007년 9월 당시 베이징 켐핀스키 호텔 로비에서 안내책자를 살펴보고 있다.
▲ 켐핀스키 호텔의 리호남 참사 북한 리호남 참사가 2007년 9월 당시 베이징 켐핀스키 호텔 로비에서 안내책자를 살펴보고 있다.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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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호남'이라는 이름은 31쪽짜리 검찰의 공소장에서 120번쯤 등장하고, 켐핀스키 호텔도 20번 넘게 나온다. 한마디로 리철-박채서의 모든 간첩 행위가 캠핀스키 호텔 한 곳에서 이뤄졌다는 얘기다. 실제로 공소사실 중에 박씨가 리호남을 만나 '회합'했거나 '지령 수수'했거나 '목적 수행'했던 장소 중에서 켐핀스키 호텔이 아닌 곳으로는, 아래와 같이 단 한 번의 예외가 있을 뿐이다.

"2010. 3. 5 중국 북경 조양구에 있는 '연사우의상장' 지하 서라벌식당 별실에서 리호남을 만나 저녁식사를 하면서 향후 계획 등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2010년 3월 7일 중국 북경에 있는 켐핀스키 호텔 1층 뷔페식당에서 리호남을 만나 저녁식사를 하면서 향후 계획 등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공소장 21~22쪽)

그런데 검찰이 적시한 '연사우의상장', 즉 연사우의상성(燕沙友誼商城)은 베이징의 '루프트한자 센터'를 구성하는 켐핀스키 호텔과 연결된 옌사백화점이다. 결국 베이징을 무대로 한 리호남-박채서 2인의 '간첩 범행 장소' 가운데서 켐핀스키 호텔 구역을 벗어난 곳은 단 한군데도 없다는 얘기다. 한마디로, 두 간첩의 모든 길은 켐핀스키로 통했다. 그러니 '간첩의 소굴'인 켐핀스키 호텔 앞에 '몰래카메라' 한 대만 설치해 놓으면 '게임 끝'이다. 간첩 잡기 참 쉽다.

그런데 공소장에도 나오지만, 켐핀스키 호텔은 국군 정보사 공작관(현역 소령)이었던 박채서씨가 1995년 7월 안기부 대북공작원으로 특채되어 '흑금성'이라는 공작 암호명으로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에 위장포섭돼 당시 '북한 보위부 북경 연락책'이었던 리호남을 파트너로 첩보활동을 할 때부터 주요 활동 근거지였다.

또 1997년 당시 남한의 대통령 선거에 개입해 유리한 정세를 조성하려 했던 북한의 안병수(조평통 위원장대리)와 강덕순(아태평화위 참사) 등 대선공작반이 두 달간 상주하면서 활동했던 무대도, 남한 정치인들이 북측 인사들을 접촉했던 곳도, 이들의 동향을 탐지하기 위해 안기부 공작원들이 첩보활동을 벌인 곳도 켐핀스키 호텔이었다.

켐핀스키 호텔은 1997년 북풍 진원지이자 안기부 북풍공작 주무대

이회창 후보의 당선을 위해 이 후보 특보였던 한성기씨와 대북사업가 장석중씨 등이 1997년 12월 당시 리호남 등에게 판문점 무력시위를 요청한 이른바 '총풍 사건'의 무대도 켐핀스키 호텔이었다.
▲ '판문점 총격 요청'이 이뤄진 켐핀스키 호텔 이회창 후보의 당선을 위해 이 후보 특보였던 한성기씨와 대북사업가 장석중씨 등이 1997년 12월 당시 리호남 등에게 판문점 무력시위를 요청한 이른바 '총풍 사건'의 무대도 켐핀스키 호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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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2월 대선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당선을 위해 이 후보 특보 직함으로 활동한 한성기씨와 대북사업가 장석중씨 등이 사업 파트너였던 리호남의 소개로 북측 인사들을 만나 판문점 무력시위를 요청한 이른바 '총풍 사건'의 무대도 켐핀스키 호텔이었다.

검찰의 총풍 사건 수사결과에 따르면, 당시 무력시위 요청을 받은 리호남(리철운)과 김영수 보위부 과장 그리고 박충(강덕순) 아태 참사 등이 다음날 "평양에 전문을 보냈으나 회답이 없어 답을 줄 수가 없다"고 사실상 거절해 무력시위는 '미수'에 그쳤다.

당시 안기부는 흑금성 공작원의 D브리핑(첩보보고)을 통해 이들의 비밀접촉을 탐지해 이들과 북측 인사들이 켐핀스키에서 주고받은 전화통화를 도청하고 평양에 보낸 전문(電文)을 감청해 무력시위 요청 사실을 확인했다. 이 후보 특보였던 한성기씨는 직접 이 후보에게 대선 관련 보고서를 작성해 전달했고, 평소 친분이 있던 이 후보의 동생 이회성씨에게 판문점 무력시위 요청 계획을 알린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당시 김대중 후보의 낙선과 이회창 후보의 당선을 위해 일련의 북풍공작을 추진했던 권영해 안기부장은 이들의 대공 용의점에 대해 수사하지 않고 은폐했다. 그러다가 정권 교체 이후, 구(舊) 안기부가 개입한 북풍공작과 일부 공기업에 이회창 후보 선거자금을 할당·모금한 세풍(稅風)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내부 제보로 총풍 사건이 불거진 것이다.

독일(루프트한자 그룹) 자본으로 건설된 5성급 켐핀스키(kempinski) 호텔(北京市 朝阳区 50号)이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남북한 첩보원들의 활동무대가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우선 스위스계 호텔이라서 중국 공안의 감시의 눈길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지리적으로 한국대사관과 가깝고 (주)대우의 지분(25%) 참여로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데다가, 독일 건축설계로 튼튼하게 지어서 이른바 '귀때기 도청'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호텔이라는 평가도 한몫했다.

리호남 '보위부 북경 연락책'(1998년)→'작전부 소속 공작원'으로 둔갑

켐핀스키 호텔은 1997년 대선 전에 남북한 첩보전이 펼쳐진 곳으로 유명해졌지만, 1차 서해교전 직후인 1999년 6월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 차관급회담이 열린 곳이기도 하다. 사진은 켐핀스키 호텔에서 열린 차관급 회담을 전한 <동아일보> 1999년 6월 23일자.
▲ 켐핀스키 호텔의 차관급회담 켐핀스키 호텔은 1997년 대선 전에 남북한 첩보전이 펼쳐진 곳으로 유명해졌지만, 1차 서해교전 직후인 1999년 6월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 차관급회담이 열린 곳이기도 하다. 사진은 켐핀스키 호텔에서 열린 차관급 회담을 전한 <동아일보> 1999년 6월 23일자.
ⓒ 동아일보 캡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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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에 개관한 이 호텔(객실 540개)은 아파트(160세대), 사무실(108개), 백화점 등을 갖춘 연면적 4만6천평 규모의 비즈니스 콤플렉스 빌딩인 '베이징 루프트한자 센터'의 일부다. 켐핀스키 호텔은 제1차 서해교전 직후인 1999년 6월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 차관급 회담이 열린 곳으로도 우리에게 친숙하다.

그러나 이 호텔이 한국에서 유명세를 탄 것은 안기부의 비밀공작 문건인 이른바 '이대성 파일'의 외부 유출과 북풍공작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로 안기부 북풍공작의 전모가 드러나면서부터다. 1998년 4월 당시 검찰의 '북풍공작' 사건 수사와 재판결과로 드러났다시피, 권영해 안기부장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남한의 선거에 개입하려는 북한의 대선공작(오익제 편지 사건 등)에 편승해 김대중 후보 낙선 정치공작을 추진했다.

그럼에도 정권이 교체되자 구(舊) 안기부 수뇌부는 새 정부의 '북풍공작' 수사에 저항해 사건의 본질을 흐리기 위해 조직적으로 해외공작원 정보보고를 부분적으로 조작·재편집한 '이대성 파일'을 외부에 유출한 것이다. 그 결과 북한 대선공작반이 상주한 북풍의 진원지이자, 이에 편승한 안기부 북풍공작의 주무대였던 켐핀스키 호텔은 1998년 당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중국 호텔이 되었다.

이후 국정원(대공수사국)과 검찰(서울지검 공안부)은 대대적인 북풍공작 사건 수사를 통해 권영해 안기부장, 이대성 203실장(1급), 송봉선 단장(2급), 김은상 처장(3급), 주만종 팀장(5급), 이재일씨(6급) 등 전현직 안기부 관계자 10명과 안기부 협조자였던 재미교포 윤홍준씨를 구속기소했다. 한나라당 정재문 의원 등 3명은 당국의 허가 없이 북한 조평통 안병수 위원장대리, 전금철 부위원장,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북경 연락책 리철 등을 각각 접촉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그런데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가 '북풍사건 수사결과 발표문'에서 밝힌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북경 연락책 리철'은 이번에 서울중앙지검 공안부가 박채서씨 국가보안법 위반(간첩 등) 사건 공소장에서 박씨를 포섭한 것으로 지목한 '북한 작전부(현 정찰총국) 소속 공작원 리호남'과 동일인물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똑같은 인물을 똑같은 검찰 조직(서울중앙지검 공안부)에서 조사했는데, 그때는 '보위부 북경 연락책'이었는데 이번 수사에서는 '작전부 공작원'으로 둔갑한 것이다.

'하부선' 체포되었는데 '상부선'은 베이징 활보하는 이상한 간첩망

국가정보원 홈페이지에 따르면,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는 '주민사찰을 통한 체제 보위를 담당하는 김정일 직속 기관'이다. 이에 비해 노동당 작전부는 공작원에 대한 기본교육 훈련, 침투공작원의 호송-안내-복귀, 대남 테러공작 및 침투루트 개척 등을 주임무로 하는 공작 전문기관이다. 쉽게 얘기하면, 보위부는 '간첩 침투를 막고, 간첩을 잡는기관'이고 작전부는 '간첩을 훈련해 남파하는 기관'이다.

더구나 노동당의 공작원(간첩)은 엄밀히 구분하면 '전투원'과 '공작원'으로 나뉘는데 '전투원'은 작전부 요원을 의미한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도 김일성대 경제학부 출신의 리호남은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육성해 혹독한 군사훈련과정을 거쳐 실전에 배치되는 작전부 요원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대남사업에 필요한 인물이라면 언제든지 당에서 소환하는 북한 체제의 특성상, 리호남이 '보위부 북경 연락책'에서 '작전부 산하 715연락소에 소환된 대남공작원'으로 신분이 바뀌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런데 국정원과 검찰은 리호남이 작전부(현 정찰총국)에 소환된 공작원이라는 명백한 증거를 제출하지 못하고 있다.

설령 리호남이 공작원이라는 사실을 검찰이 특정하더라도 의문은 남는다. 왜냐하면 검찰의 공소장대로라면 리호남은 1995년 '보위부 북경 연락책'일 때부터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같은 장소(켐핀스키 호텔)에서 똑같은 범행을 되풀이하는 '어수룩한 간첩'이기 때문이다.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특보 한성기씨와 대북사업가 장석중씨 등이 1997년 대선 직전에 베이징 켐핀스키 호텔에서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베이징 연락책 리철운(본명 리철) 등에게 판문점 무력시위를 요청했다는 검찰 수사결과를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한 <동아일보> 1998년 10월 27일자.
▲ 신문 1면에 등장했던 리철운(리호남)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특보 한성기씨와 대북사업가 장석중씨 등이 1997년 대선 직전에 베이징 켐핀스키 호텔에서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베이징 연락책 리철운(본명 리철) 등에게 판문점 무력시위를 요청했다는 검찰 수사결과를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한 <동아일보> 1998년 10월 27일자.
ⓒ 동아일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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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켐핀스키 호텔은 1998년 검찰의 북풍공작 사건 수사 당시 북한의 대선공작반과 남한의 해외공작원들이 득실거린 '스파이 소굴'로 각인된 곳이고, 리호남은 북한 사람으로는 드물게 당시 한국 신문에 큼지막한 제목으로 이름(리철운)까지 공개되었다. 그런데도 한국의 정보기관과 수사 당국 그리고 언론에까지 노출된 장소에서 간첩끼리 회합-통신하고 지령을 내리는 것은 간첩에 대한 일반의 상식을 배반하는 것이다.

또한 '하부선'이 체포되면 '상부선'은 종적을 감추는 것이 지난 수십 년간 국가로부터 세뇌받은 간첩에 대한 백만인의 상식이다. 그런데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박채서씨를 포섭한 반국가단체 구성원'이자 '간첩 박채서의 상부선'으로 '정찰총국 소속 대남공작원'인 리호남은 지금도 대북사업가들과 접촉하며 거리낌없이 베이징을 활보하고 있다.

리호남 "박 선생이 내 지령 받고 움직일 사람이냐?... 나는 '무역성 참사'다"

지난 10월 29일 열린 재판에서 검찰측이 신청한 증인으로 출석한 대북사업가 유모씨는 리호남으로부터 남북한 월드컵 공동CF 사업을 제안받았다고 증언해 관심을 모았다. 90년대 초부터 컴퓨터 부품과 모니터 등을 북한에 수출하고 최근에는 북한산 송이버섯 등을 수입하고 있다는 유씨는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리호남을 두 번 만났는데, 그가 '남남북녀니까 남측의 박지성 선수와 북측 김금종 선수(여자축구 골잡이)가 함께 월드컵 CF광고를 찍으면 어떻겠냐' '나하고 하면 더 적은 투자금으로도 할 수 있다'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밝혔다.

유씨는 이어 "통일부에 북한주민 접촉결과 보고서를 낼 때 리호남으로부터 월드컵 CF광고사업을 제안받았다고 구두로 밝혔는데 통일부에서 '남북관계가 정상화되기 전까지는 협력사업 진행이 곤란하다'고 해서 그 뒤로 리호남을 만나진 않았다"고 덧붙였다. 유씨의 법정 증언에 따르면, 리씨는 조명애-이효리 CF광고 사업으로 광고 돈벌이에 눈을 떠 최근까지도 월드컵 남북한 공동 CF광고 사업을 제안하는 등 여전히 돈(외화) 벌이가 되는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하는 경제사업 일꾼임을 알 수 있다.

만일 그가 국정원-검찰의 주장대로 '경제사업 일꾼'이 아니고 '대남공작원'이라면, 국정원은 그런 사실을 통일부에 통보하고, 통일부는 '공작원 리호남'과 교류협력사업을 추진하려는 남한 사업가들에게 경고를 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통일부가 리호남의 정체성과 관련, 대북사업자들에게 '공작원이니 접촉하지 말라'는 경고를 보낸 사례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공안기관이 마음만 먹으면 여전히 '제2, 제3의 간첩 박채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리씨는 박채서씨가 긴급체포된 뒤에도 여전히 예전처럼 베이징을 왕래하면서 대북사업가들을 만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 과정에서 리씨는 자신이 박채서씨를 포섭해 간첩 지령을 내렸다는 혐의에 대해 "그건 말도 안되는 얘기"라면서 "박 선생(박채서씨)이 내 지령을 받고 움직일 사람이냐"고 강하게 불만을 피력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또 "나는 경제사업만 하는 사람인데, 왜 나를 갖고 그러는지 모르겠다"면서 "나는 '무역성 참사'다"고 자신의 신분을 명확히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97년 2월 베이징 켐핀스키 호텔에서 당시 남측의 광고기획사인 '아자'의 박채서 전무(왼쪽에서 두번째)와 광고사업을 협의한 리호남씨(맨오른쪽)를 기자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정무원 대외경제위 처장' 명함을 사용했다. 그는 최근에도 '내각 무역성 참사' 직함을 사용하고 있다.
▲ 대외경제위 처장 시절의 리호남 97년 2월 베이징 켐핀스키 호텔에서 당시 남측의 광고기획사인 '아자'의 박채서 전무(왼쪽에서 두번째)와 광고사업을 협의한 리호남씨(맨오른쪽)를 기자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정무원 대외경제위 처장' 명함을 사용했다. 그는 최근에도 '내각 무역성 참사' 직함을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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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리호남 참사를 처음 만났을 때인 97년 2월 당시 그는 정무원 산하 대외경제위원회 처장 명함을 사용했다. 당시 대외경제위는 외국과의 무역상담, 시장조사 및 개최, 외국 투자유치, 기술도입 등의 업무를 관장했다. 이후 98년 9월 헌법 개정으로 대외경제위가 폐지되고 내각 산하에 무역성이 신설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북한의 '경제사업 일꾼'(무역성 참사*)인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리호남 참사가 국정원-검찰의 공소장대로 북한의 '차관급 대남공작원'인지, 아니면 경제 부문에 종사해온 '차관급 경제관료'인지를 규명하는 것이 재판부의 선결 과제이다.

덧붙이는 글 | 북한의 내각 참사는 남한의 실·국장~차관급 직책이다. 2004년 6월 장관급회담 당시 북측 대표였던 권민 내각 참사에서 보듯 '참사'는 실·국장~차관급에 해당하고, 전금진·김령성 내각 책임참사에서 보듯 그보다 상위급인 '책임 참사'는 통상 장관~부총리급에 해당한다.



태그:#흑금성, #박채서, #리호남, #켐핀스키, #북풍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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