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개봉한 <심야의 FM>이 <아저씨>의 뒤를 이어 흥행가도를 쾌속질주하고 있습니다. 100만 관객 돌파 초읽기에 들어간 영화의 매력은 스릴러물의 홍수 속에서도 고객 만족도와 메시지가 분명하다는데 있습니다. 여기에 탄탄한 시나리오와 긴장감 넘치는 편집에 배우들의 열연이 맞물리는 피드백의 열기속으로 관객들의 심박수를 높여갑니다.

<심야의 FM>이 여느 스릴러물과 다른 점은 새벽 2시부터 4시까지라는 제한된 시간과 아파트와 방송국 라디오 스튜디오라는 이원화된 공간을 사이에 두고 택시 운전기사 한동수(유지태)와 아나운서 고선영(수애)이 가해자와 피해자로 대립각을 세우는 가운데 매스미디어와 영화의 사회성이라는 보기 드문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있습니다.

선영이 거침없는 클로징 멘트를 날리던 뉴스 앵커 시절부터 '심야의 영화 음악실' DJ로 여전히 사회악과 맞서는 동안 동수가 광기와 증오로 추동돼 '사회의 쓰레기'들을 청소하는 연결고리는 TV와 라디오입니다. 또한 동수가 자신의 롤모델로 여기는 인물이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연출한 <택시 드라이버>의 주인공 트래비스라는 점은, 이 영화가 스릴러물임에도 무시할 수 없는 사회심리학적 통찰을 담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매스미디어의 두 얼굴을 스크린에 담다

 자신의 딸과 여동생 등을 인질로 잡은 동수와 통화하고 있는 선영. 영화에서 선영의 ‘입’은 매스미디어의 일방통행을 상징한다.

자신의 딸과 여동생 등을 인질로 잡은 동수와 통화하고 있는 선영. 영화에서 선영의 ‘입’은 매스미디어의 일방통행을 상징한다. ⓒ (주)주말의 명화 (주)홍필름


우리는 대개 아침에 일어나면 신문을 간단히 훑어보고 출근길에 라디오에서, 직장에선 인터넷으로 집에 돌아와선 TV 등과 같은 매스미디어와 떼려야 뗄 수 없이 일상을 보내곤 합니다. 이런 무의식적인 일상을 통해 매스미디어는 정보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에 대한 인식과 가치를 주입하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동수를 뒤흔든 선영의 대표적 멘트는 트래비스가 말한 '영웅은 고통을 통해 성장한다'입니다.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선영의 한마디 한마디가 살아 있는 명령이듯 동수에게 주입되고, 동수는 트래비스와 같은 영웅이 되어 현실의 쓰레기들을 청소합니다. 이렇게 라디오는 둘을 잇는 핵심통로가 되고 동수의 일상을 완벽하게 지배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선영은 사회악에 대해 멘트 이상 관심이 없습니다. 길거리에서 여자를 무지막지하게 패는 남자를 쓰레기라고 부를지언정 그 따위 일에 엮이는 따위는 질색입니다. 촌철살인의 '입'과 일상의 행동이 따로국밥인 셈입니다. 그런 선영이 말 못하는 딸의 수술을 위해 방송을 그만두려고 하면서 동수의 '동업자를 향한 살육'은 시작됩니다.

동수가 복수에 나선 결정적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선영이 자신의 영웅적 투쟁을 연쇄살인으로 규정하고 뭇매를 퍼붓더니, 과거에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못하는 겁니다. '정의사회' 구현을 위해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업자가 말입니다. 영화는 선영의 입을 통해 메시지와 기호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매스미디어의 폐해를 날것 그대로 드러내면서 임계점을 향해 치닫기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영화가 매스미디어의 일방통행만 도마 위에 올려놓는 건 아닙니다. 그 역의 모습 즉, 정보의 취사선택과 왜곡이라는 민감한 주제도 상징적으로 그려냅니다. 동수가 선영의 무수한 말들 중에서 '영웅 트래비스'만 고집하는 모습이나 살인귀가 된 동수의 살육을 생중계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TV와 기자들은 미디어의 기능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의문을 품게 합니다.

이렇게 영화는 스릴러물임에도 보기 드물게 한 사회의 가치관이나 신념, 행동규범에 영향을 미치는 매스미디어 시스템의 두 얼굴을 경고하는 함의를 한 자락 깔고 있습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사회를 재단하는 미디어

 택시 안에서 선영과 통화는 동수. 영화가 택시 드라이버인 동수가 아니라 선영에 초점을 맞추면서 사회성과 리얼리티는 반감된다.

택시 안에서 선영과 통화는 동수. 영화가 택시 드라이버인 동수가 아니라 선영에 초점을 맞추면서 사회성과 리얼리티는 반감된다. ⓒ (주)주말의 명화 (주)홍필름


매스미디어의 대표적 부작용은 소통을 위한 도구인 미디어가 인간을 지배하는 역설입니다. 그리고 그런 지배를 당사자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영화에서 동수가 거리의 쓰레기들을 청소하다 선영의 뒤를 잇는 DJ마저 살해하고 칼끝을 선영에게 돌린 것은 자신을 지배해 온 선영에 대한 항거이자 라디오에 대한 역습입니다.

동수는 자신이 지배당하지도 구속받지도 않았다는 것을 실증하기 위해 선영의 마지막 방송 대본을 미리 짜서 팩스로 보냅니다. 물론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가지만 동수의 복수가 정점에 오르면서 선영의 손에 다시 쥐어집니다. 이것은 미디어와의 관계에서 수동적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는 동수의 광기와 미디어가 조장하는 갈등, 편견, 차별 등 부정적 역할 간의 충돌이 어떻게 파국을 초래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여론조작-매스미디어의 정치경제학>에서 노엄 촘스키 MIT 교수는 매스미디어가 진실을 알리기보다는 특정 권력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의제를 왜곡하여 그릇된 세계관으로 대중들을 지속적으로 세뇌하고 회유하면 대중들 스스로 미디어를 통해 알고 있는 세상을 진실로 알고 자신도 모른 채 미디어에 포섭되어 간다고 지적했습니다. 

마치 조중동이라는 창을 통해 세상을 보는 이들의 눈이 뒤틀린 조중동의 창만큼 삐뚤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조중동이 국민의 알권리와 공정보도를 실천할 사회적 책무와 거리가 먼 만큼 그들이 기획한 펜에 최면이 걸리면 그 펜의 색깔대로 세상과 사회와 사람을 재단하고 단정 짓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논리가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매스미디어의 이중성을 간파해낸 이 말은 미디어의 영향력에 자신보다는 주위 사람들이 더 영향을 받고 나 자신은 예외라고 믿고 싶어 하는 '제3자 효과' 미디어론과도 맞닿습니다. 이는 동수가 선영에 대한 복수의 단계를 고조시켜 갈수록 선영을 부정하는 한편 포획한 선영의 손에 권총을 쥐여주며 그간의 메시지를 재확인하려는 동수의 격렬한 자기 대립과 모순 속에서 확인됩니다.

세련됐지만 위악적인 미디어의 폭력성을 고발하다 

 도시의 변두리 자신의 거처를 향해 걷고 있는 동수는 꿈과 희망을 상실한 채 가상현실에서 허우적거리는 삼류인생을 대변한다.

도시의 변두리 자신의 거처를 향해 걷고 있는 동수는 꿈과 희망을 상실한 채 가상현실에서 허우적거리는 삼류인생을 대변한다. ⓒ (주)주말의 명화 (주)홍필름


영화는 매스미디어의 두 얼굴과 함께 영화 속 영화에 주목게 합니다.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의 차용입니다. 동수가 직업이 택시기사이고 머리를 짧게 깎은 퀭한 두 눈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캐릭터로 창조된 것은 여지없는 트래비스의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택시기사는 세상 민심을 전해주는 '거리의 통신원'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온갖 이야기를 귀동냥할 수 있는 택시는 그래서 도시의 낮과 밤 그 은밀한 속살을 엿볼 수 있는 바로미터이기도 합니다. 국회의원들이 기를 쓰고 택시를 서민 정치 실현의 홍보수단으로 활용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셈입니다.

베트남전 후유증으로 불면증에 시달리던 트래비스는 야간 택시기사로 취직합니다. 동수도 야간 운전대를 잡습니다. 밤거리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와 뒷골목의 쓰레기 그리고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 뒤섞여있는 인간쓰레기들은 뉴욕이든 서울이든 똑같고, 트래비스와 동수는 비슷한 방법으로 처단합니다.

그런 둘을 가르는 차이점은 매스미디어입니다. 트래비스가 베트남전 뒤 미국사회의 빛과 어둠을 상징하며 상처 입은 영혼의 자기 구원 과정을 표현했다면, 동수는 스마트폰으로 상징되는 최첨단 매스미디어 시대의 어두운 뒷골목에서 나뒹구는 한국사회의 한 단면을 소름 돋도록 표현해 냅니다.

더 큰 차이점은 사회의 쓰레기들에 대한 대응방식에 있습니다. 트래비스가 '비가 내려 이 더러운 쓰레기들을 다 씻어줬으면'이라며 독백한 뒤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상원의원을 저격하는 이유는 베트남전 참전이 미국도, 베트남도 위한 일이 아닌 그저 정치적 목적에 희생된 것이라는 점을 비유적으로 상징합니다.

반면 동수는 자신의 도덕적 기준을 트래비스에서 벤치마킹하고 선영의 '입'이 내뱉은 TV와 라디오라는 미디어를 통해 허락을 받을 뿐입니다. 트래비스처럼 어린 창녀 아이리스를 매음굴에서 구해내기 위해 포주를 죽이고 손님까지 살해하는 '해원상생'의 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맹목적인 죽임만 있을 뿐입니다.

트래비스와 동수는 온갖 부조리와 비리가 난무하는 현대사회에서 힘 있는 자들이 배설한 호화로운 밤거리에 부딪쳐 파열음을 내면서 부서져가는 역설화법의 주인공들입니다. 다만, 트래비스가 언론의 왜곡보도로 살인자에서 영웅으로 둔갑하는데 비해 동수는 실시간으로 중계하기 위해 껄떡거리는 TV의 욕망에 걸맞게 연쇄살인범으로 최후를 마칩니다.  

이는 영화가 애초 택시 드라이버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선영에 맞추면서 예견된 결말입니다. 동수를 비롯한 삼류 인생의 삶이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왜곡되고 변형되는지 그 과정을 통찰하는 사회적 리얼리티 보다는 스릴러라는 장르의 전범을 충실하게 따른 결과이지만.

대신 영화는 엔딩 크레딧에서 화마에 휩쓸린 동수의 컨테이너 박스를 통해 세련됐지만 위악적인 매스미디어의 이중성에 의해 갈등과 차별과 편견이 조장되고 범람하는 한국사회의 두 얼굴을 섬뜩하게 고발합니다.

심야의 FM 택시 드라이버 매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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