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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대전형무소 재소자 사건과 관련, 20일 동안 3차례에 걸쳐 4900여 명이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군과 경찰의 불법행위에 의해 집단 희생됐다고 최근 밝혔습니다. 또 1951년 1.4후퇴 시기에도 대전 산내에서 최소 수백 명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대전충청지역 형무소(대전형무소, 공주형무소, 청주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을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 규명 보고서를 토대로 재조명합니다. [편집자말]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서히 땅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살점과 뼈들을 볼 수 있었다. 그 냄새는 목구멍까지 스며들어와 그 후 며칠 동안이나 그 냄새를 느껴야 했다. 커다란 죽음의 구덩이를 따라 창백한 손, 발, 무릎, 팔꿈치 그리고 일그러진 얼굴, 총알에 맞아 깨진 머리들이 땅 위로 삐죽이 드러나 있었다…." -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

 영국 일간신문 <데일리 워커>의 편집자이자 특파원인 위닝턴 기자가 1950년 학살 직후 대전 골령골 현장을 찍은 사진. 대충 묻어 놓은 흙더미 위로 희생자의 다리가 드러나 있다.
 영국 일간신문 <데일리 워커>의 편집자이자 특파원인 위닝턴 기자가 1950년 학살 직후 대전 골령골 현장을 찍은 사진. 대충 묻어 놓은 흙더미 위로 희생자의 다리가 드러나 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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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일간신문 <데일리 워커>의 편집자이자 특파원인 위닝턴 기자는 1950년 학살 직후 대전 골령골 현장을 이렇게 묘사했다(1950년 8월 9일 보도).

위닝턴 기자의 골령골 학살 보도, 런던-워싱턴 정가를 뒤흔들다

위닝턴 기자의 이 같은 보도는 당시 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이 주한 미 대사에게 산내 학살을 전적으로 부정하라고 지시하는 원인이 됐다. 위닝턴 기자의 보도로 논란이 일자 애치슨은 1950년 8월 25일, 서울에 있는 무초 주한 미 대사에게 "한국군 고위층으로부터 (대전 산내 학살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성명서를 받아서 보내 달라"는 전보통신문을 발송했다. 이 전보통신문에는 "우리는 이 만행 날조(<데일리 워커> 보도-기자 주)를 무시하려고 했지만 (이 보도가) 아주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상세하게 부정하는 것을 보내주면 감사하겠다"고 적고 있다. (관련 보도 : "대전학살 부정하는 성명서 보내달라")  

이는 위닝턴 기자가 해당 보도를 통해 대전 산내 학살에 미군이 가담한 정황을 지적한 데 따른 것이지만, 이 보도가 영국의 독자는 물론 런던과 워싱턴 정가에 끼친 파문의 정도를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위닝턴 기자는 이 기사를 통해 "총질, 구타, 그리고 목을 자르는 일들은 남한 경찰이 했지만 이것은 미국의 범죄"라며 "(학살이) 미군 장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졌고 (학살 과정에 동원된) 운전자 몇 명은 미국인"이라고 보도했다. 이는 또 미국 정부가 한국 군경의 집단학살을 적극 저지하기보다 이를 승인했거나 너그럽게 봐주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당시 위닝턴 기자가 목격한 건 대전 골령골에서 1·2차 집단학살에 이어 자행된 3차 학살 직후였다.

3차 학살은 1950년 7월 6일 무렵부터 7월 17일 새벽까지 벌어졌다. 이 기간은 육군형무소 병력이 대전형무소에 임시 주둔하던 때였다. 따라서 3차 학살은 육군형무소 백아무개 소령의 지휘로 이루어졌다(1차 학살은 헌병대, 2차 학살은 제2사단 헌병대 제4과장 심아무개 중위가 지휘했다).

<한국헌병사>에도 "육군형무소(소장 백아무개 소령)는 7월 7일 대전형무소에 포로수용소를 설치, 업무를 개시한다. (중략) 이후 중범자, 보련(보도연맹) 관련 적색분자를 처벌하고 (중략) 7월 17일에 대전을 출발, 대구 포로수용소로 집결 즉시 업무를 개시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자유의 몸' 됐지만... "대전역에 내리자마자 다시 수감"

 1950년 8월 영국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가 쓴 증언록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의 표지. 이 보도는 대전 산내 학살에 관한 것으로 당시 주영 더글러스(Douglas) 미 대사와 애치슨 미 국무장관의 '이를 부정하라'는 지시문의 원인이 됐다.
 1950년 8월 영국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가 쓴 증언록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의 표지. 이 보도는 대전 산내 학살에 관한 것으로 당시 주영 더글러스(Douglas) 미 대사와 애치슨 미 국무장관의 '이를 부정하라'는 지시문의 원인이 됐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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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기간 동안에는 어떤 사람들이 산내 골령골로 끌려간 것일까? 이와 관련된 증언이 있다. 

"전쟁이 나자 6월 27일 영등포형무소에 갇혀 있던 죄수들을 모두 풀어줬다. 자유의 몸이 됐으니 각자 알아서 하라고 했다. 함께 수감돼 있던 같은 마을 이복환·이희수씨와 귀향길에 올랐다. 수원까지 걸어가다 피난열차를 탔는데 대전역에서 정차했다.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경찰들이 몰려와 무작정 두들겨 팼다. 곧바로 고개를 숙이게 한 채 대전형무소로 끌고 갔다." (2000년 4월 23일 <오마이뉴스> 보도)

안병남씨는 당시 대전형무소 복도와 형무소 앞마당까지 인산인해였다고 기억했다. 안씨는 대전형무소 앞마당에 무릎이 꿇린 채 얼굴을 땅에 박고 꼬박 하루를 처박혀 있었는데 머리가 짧은 사람들이 뒷머리만 내놓고 있던 당시 상황을 그는 '마치 가마니에서 밤을 가득 쏟아놓은 듯했다'고 묘사했다.

그는 살아났지만 함께 귀향길에 올랐던 같은 마을 이복환·이희수씨는 이후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대전형무소는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그의 증언은 당시 대전형무소 재소자 집단학살이 수감자에 국한되지 않고 서울, 수원 등 대전 이북 지역 형무소에서 출소 혹은 가석방된 후 귀향 또는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까지 포함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대전형무소 특별경비대 정아무개씨도 진실화해위원회에 한 증언에서 "7월 1일 이후에 영등포와 서울의 죄수와 보도연맹원들이 계속 대전형무소로 들어왔다"고 밝혔다. 위닝턴 기자 또한 "그리고 10일 동안 다른 지역의 정치범들이 비어 있는 감옥으로 집중적으로 옮겨 왔고 인부들은 또 땅을 파러 갔다"고 썼다.

당시 여러 자료에 따르면 청주형무소의 징역 5년 이상 일반사범 200여 명은 7월 11일 대전형무소로 이송됐고, 서산경찰서 보도연맹원 400명을 비롯해 태안·부여·강경·홍성·서천경찰서에서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 중 주동자급은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태안, 부여, 강경, 홍성, 서천 등의 보도연맹원, 대전형무소로 끌려가 

3차 학살 기간 동안 희생된 피해자에 관한 증언도 많다.

송영섭씨의 경우 충남 태안군 태안면사무소에서 서기로 근무하던 중 전쟁이 터지자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됐다. 그는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같은 해 7월 10일 산내로 끌려가 희생됐다. 처형 날짜를 알려준 이는 당시 군 장교로 있던 송씨의 처남이었다. 최재봉씨도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체포돼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가 7월 13일 산내에서 총살당했다. 그의 희생일을 전해준 이는 같은 동네에 살았던 대전형무소 형무관이었다. 

3차 학살 기간 동안 희생된 이들의 수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육군형무소가 대전에서 후퇴하기 직전인 7월 15일부터 16일 이틀 동안에 많은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이 살해된 것만은 분명하다. 이와 관련, 1950년 <런던 옵서버>지 기자로 한국에 왔다가 북한군의 포로가 된 필립 딘은 '나는 한국에서 포로였다'에서 "미군이 대전에서 철수하기 직전 남한 경찰이 1700명의 재소자들을 트럭에 겹겹이 싣고 와 내가 있던 교회 부근 숲에서 처형했다"는 프랑스 신부 카다르(당시 72세)의 증언을 전하고 있다.  

앞의 위닝턴 기자는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에 "7월 16일 인민군이 미군의 금강전선을 돌파하자, 남아 있는 정치범들에 대한 학살이 (또다시) 시작됐다. 이날 무수한 여자들을 포함해 적어도 각각 100명씩 트럭 37대, 3700여 명이 죽었다"고 썼다.

위닝턴 기자 "나치 수용소에 관한 내 상상이 어처구니없었다"

 대전 산내 골령골에 당시 희생자 유해로 보이는 두개골이 나뒹굴고 있다.
 대전 산내 골령골에 당시 희생자 유해로 보이는 두개골이 나뒹굴고 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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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 방법은 7월 첫째 주에 있었던 2차 학살 때와 동일했다. 이와 관련, 한국전쟁 초기 북한 유격대 중대장이었던 김남식씨는 "국군이 후퇴하면서 시신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질러 시신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노가원, 월간 <말> 1992년 2월호).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이곳에 수감됐던 보도연맹원의 총 희생 규모에 대한 정확한 통계자료는 없다.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일까지 예비검속 등으로 체포된 민간인 1400명(1차), 1950년 7월 첫째 주의 정치범 1800명(2차), 그리고 미군과 한국군이 후퇴하기 전인 7월 17일까지 1700명(3차) 등 시기별 희생 규모를 합하면 희생규모는 20일 동안 4900명에 이른다. 3차 시기에 1700명이 아닌, 앨런 위닝턴의 주장대로 3700명을 더하면 총 희생규모는 6900명으로 늘어난다.

위닝턴 기자는 당시 쓰레기처럼 아무렇게나 묻혀 있던 시쳇더미를 본 심정을 이렇게 적었다.

"예전에 벨젠(Belsen)이나 부쉔발트(Buchenbald)의 나치 살인수용소에 관한 글을 읽으며 그곳이 어떠했을까를 상상해본 적이 있다. 그때의 내 상상이 어처구니없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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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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