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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8월 영국 <데일리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가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의 기사내용. 대전 산내 낭월동 학살을 다루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군경에 의해 자행된 대전 산내 민간인학살과 관련해 당시 딘 에치슨 미 국무성장관이 주한 미 대사에게 이를 전적으로 부정하라고 지시한 전보통신문이 발굴됐다. 이는 한국전쟁 전후 한국정부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미국의 역할을 가늠하게 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재미 4·3 연구가인 이도영 박사는 최근 제주에서 '4·3 6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주최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제주 대학살 및 대전대학살 진상 조사연구'를 주제로 발표한 발제문을 통해 "대전 산내학살 직후인 1950년 8월 25일, 미 국무성장관인 에치슨이 서울에 있는 무쵸 주한 미 대사에게 '한국군 고위층으로 부터 (대전산내 학살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성명서를 받아서 보내 달라'는 전보통신문을 보냈다"고 밝혔다.
 
이 박사는 발제문을 통해 에치슨의 전보통신문에는 "'우리는 이 만행 날조(데일리워커 관련보도-기자 주)를 무시하려고 했지만 아주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상세하게 부정하는 것을 보내주면 감사하겠다'고 적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 박사는 조만간 에치슨의 전보통신문 원문을 직접 공개할 예정이다.
 
<데일러 워커> '미군 학살 가담' 보도하자 수습방안으로 지시
 
에치슨 장관의 이 같은 전보통신문은 영국의 일간신문인 <데일리 워커>가 1950년 8월 9일자 기사를 통해 같은 해 7월 초 남한 정부의 군경에 의해 자행된 대전 산내학살에 미군의 가담 정황을 지적한 데 따른 것이다.
 
당시 <데일리워커>의 특파원 알렌 위닝턴 기자는 기사를 통해 "총질, 구타, 그리고 목을 자르는 일들은 남한 경찰이 했지만 이것은 미국의 범죄"라며 "(학살이) 미군장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졌고 (학살과정에 동원된) 운전자 몇 명은 미국인"이라고 썼다.
 
이 같은 보도로 런던과 워싱턴 정가에 파문이 일자 당시 주영 더글러스(Douglas) 미 대사와 에치슨 미 국무장관이 수습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학살 사건의 진위를 파악하기보다 런던과 위싱턴에 내놓을 한국군 고위층의 입장이 담긴 반박 성명서를 만들어 보낼 것을 요청한 것.
 
무쵸대사가 대전산내학살을 부정하는 성명을 보냈는지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 "사건 은폐하고 50년 간 비밀해제 거절"

 

 미 정보장교가 대전 산내학살 현장을 촬영해 미국정부에 보고한 사진. 미 정부는 1999년까지 50년동안 관련 자료와 사진을 공개하지 않았다. 사진은 재미 4.3연구가인 이도영 박사에 의해 1999년 세상에 드러났다.

이에 대해 한국 전문가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이 박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에치슨의 전보통신문은 대전에서 일어난 사건(규명)에 대해 미국이 전혀 관심이 없다는 아주 좋은 증거"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당시 미국은 이를 북한이 한 것으로 비난하기까지 했다"며 "하지만 미국은 이를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은폐하고 50년간 비밀해제를 거절했다"고 덧붙였다. 이 박사는 "에치슨의 전보통신문은 미국이 당시 남한정부의 민간인 학살을 조력하고 부추긴 것을 넘어 이를 은폐, 왜곡하려 한 물증"이라고 말했다.

 

실제 미국 측은 <데일리워커>지 보도 이전부터 남한 정부에 의해 자행된 산내학살에 대한 정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 박사에 따르면 지금까지 확인된 대전 산내학살에 대한 첫 보고서는 1950년 7월 3일자 CIA 리포트로 여기에는 "남한 경찰들이 수원과 대전에서 공산주의자들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처형하고 있다"며 "잠재가능성이 있는 제5열을 제거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도영 박사 "민간인 학살 승인했거나 너그럽게 봐 준 것"

 

방첩분견대도 "대전 형무소 수형인의 집단처형이 7월 1일에 남한 정부의 명령 하에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두 보고서 간 차이는 CIA보고서가 처형인원을 1800명이라고 한 반면 방첩대 보고서는 1400명이라고 적었다는 점이다. 

 

 1950년 8월 영국 <데일리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가 쓴 증언록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의 표지. 이 보도는 대전 산내학살에 관한 것으로 당시 주영 더글러스(Douglas) 미대사와 에치슨 미 국무장관의 '이를 부정하라'는 지시문의 원인이 됐다.

미 극동사령부 본부가 1950년 8월 2일 인민군 1사단의 첩보대에서 노획한 문서에도 서울과 남쪽에서 약 1만 1148명의 민간인들이 처형된 것으로 돼 있다. 세부적으로는 대전 4000명을 비롯해 영등포 600명, 수원 1000명, 평택 150명, 부여 2000명 등이다.

 

이 밖에도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주한 미 대사인 무쵸에게 1950년 8월 보낸 편지를 통해 "경상북도 칠곡에서 300명의 사람들에 대한 학살과 대전에서의 유사한 처형이 중단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처형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이 박사는 "여러 자료와 정황은 미군과 미국정부가 대전을 비롯해 남한 곳곳에서 자행된 민간인학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며 "하지만 미국정부는 집단학살을 적극 저지하기보다 이를 승인했거나 너그럽게 봐주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대전학살 현장에 미군 장교들이 있었다는 점은 단적인 예"라고 덧붙였다.

 

한편 1950년 9월 23일 밥 에드워즈 미 대사관 무관은 미국에 보낸 정보보고를 통해 "북한 라디오는 남한에서 잔인한 대량 처형이 있었다고 수차례 주장해 오고 있다"며 "그들의 주장이 다소 과장된 점도 있긴 하지만 전쟁이 발발한 이래 남한 경찰에 의해서 피비린내 나는 처형이 있었다"고 밝혔다.

 

미 대사관 무관 "남한 경찰에 의해 피비린내 나는 처형 있었다"

 

이어 "대전에서의 1800명의 정치범 처형은 7월 첫째 주 동안 3일간 이루어졌다"며 "처형 명령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남한 정부의 고위층으로부터 내려진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미국 측은 당시 수집한 이 같은 정보를 1999년 12월 23일까지 50년 동안 '비밀문서'로 분류하고 공개하지 않았다.

 

한편 <데일러워커> 편집자이자 특파원으로 활동한 위닝턴 기자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쟁 상황과 그 영향을 보도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1950년 7월, 대전 산내 골령골을 방문한 그는 같은 해 8월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좌익 정치범 및 보도연맹원 등 7000여 명이 한국 군경에 의해 집단 학살된 후 암매장됐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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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