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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와 세자빈은 경희궁 숭정전에서 가례를 올렸다
▲ 숭정전 소현세자와 세자빈은 경희궁 숭정전에서 가례를 올렸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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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안주에서 푸른 개구리와 검은 개구리가 5일 동안 싸우는 일이 벌어졌다. 지진이 발생하거나 우박이 쏟아지는 기상이변은 가끔 있었으나 덩치가 다른 개구리가 먹고 먹히는 혈투를 벌이는 일은 예전에 없던 일이다.

"괴이한 일이로다."
평안감사의 보고를 받은 인조가 관심을 보였다.

"작은 개구리가 큰 개구리를 잡아먹었다니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징조입니다. 종사관을 보내 자세히 조사하고 제사를 지내야 할 것입니다."

"미물들 놀음에 무슨 제사냐? 일없다."

흉조가 궁궐을 향하여 계속 울어대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매봉에서 부엉이가 울었다. 동네를 향하여 울면 그 마을에서 초상이 난다는 부엉이가 궁궐을 향하여 계속 울어댔다. 그 소리를 세자빈도 들었고 소의 조씨도 들었다. 하지만 느낌은 달랐다. 세자빈은 불길한 마음이 들었고 소의 조씨는 기쁜 소식이 있을 것만 같았다.

숲이 잘 가꾸어진 궁궐 후원. 나뭇잎에 맺힌 이슬이 구르는 소리가 들릴 것도 같은 적막한 후원에 저벅거리는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한두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놀란 새들이 하늘높이 날아오르고 청설모가 나무둥치로 기어올랐다.

"죄인은 어명을 받으시오."

금부도사 오이규가 금군을 이끌고 세자빈이 유폐되어 있는 별당을 찾았다. 햇볕도 들어오지 않은 밀폐된 공간에 갇혀있던 세자빈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분명 사람소리였으나 저승사자 소리 같기도 했다. 환청이려니 생각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있을 때였다.

"뭘 이렇게 꾸물거리는 것이오? 냉큼 어명을 받으시오."

금속성 목소리와 함께 건장한 장정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거의 동시에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부셨다. 얼마 만에 보는 태양인가? 찬란하게 부서지는 햇빛이 너무나 반가웠다. 옷매무새를 고친 세자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명만 있고 글은 없습니까?"
목소리는 나직했으나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을 풍겼다. 금부도사 오이규는 당황했다.

"죄인은 무엄하게도 어명을 따지려 드는 것이오?"

"따지는 것이 아니라 명문이 있어야 받들 것 아닙니까?"
세자빈의 목소리는 칼칼했다.

"죄인을 사가로 폐출하라는 어명이오."

"폐출이라 하셨습니까?"

"그렇소."

선택당하기는 했지만 들어오라 초청해서 들어온 몸이다

"도사도 잘 아시다시피 조선 팔도의 규수가 궁에 들어오고 싶다고 해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승지 강석기의 여식은 세자빈에 간택되어 궁에 들어왔습니다. 선택 당하기는 했지만 들어오라 초청해서 들어온 몸이란 말씀입니다. 이렇게 궁에 들어온 사람을 사가로 나가라 할 때는 합당한 사유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유가 뭐라 합디까?"
되묻는 세자빈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그런 것은 모릅니다."
궁색해진 금부도사가 시선을 피했다.

"삼간택을 통과한 규수는 만백성의 축하를 받으며 세자 저하와 가례를 올렸습니다. 가례는 국혼이며 강씨 가문의 여식이 왕실에 뼈를 묻겠다는 약조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 왕손을 셋이나 생산했습니다. 이러한 세자빈을 폐출하려면 죄목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것도 모릅니다."

"모르다니요? 도사가 그런 것도 모르고 명을 집행한단 말이오?"
오이규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알겠소. 도사를 책망한 것이 아니오니 너무 노여워 마오. 명문도 없는 명(命)이지만 전하의 명이라 하니 따르겠소. 잠시 정리할 일이 있으니 말미를 주시오."
도사가 금군을 끌고 물러났다.

"지필묵을 가져오너라."

"마마! 종이는 있으나 붓과 먹은 없습니다."

시녀 향란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곳이 동궁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세자빈의 입가에 쓴 웃음이 그려졌다.

"그걸 깜박했구나. 종이만이라도 가져오너라."

흐르는 피로 거침없이 써 내려갔다

시녀가 종이를 대령했다. 새끼손가락을 입에 넣고 잠시 머뭇거리던 세자빈이 손가락을 깨물었다. 순간, 붉은 피가 솟구쳤다. 피가 흐르는 계지(季指)를 종이에 가져갔다. 그리고 거침없이 써 내려갔다. 한문 사이사이에 언문도 있었다. 급하게 써내려간 종이를 시종에게 건네주었다.

"이 소지(小紙)를 원자에게 전하라."

"명심하겠습니다."
향란이 종이를 접어 치맛말기속에 집어넣었다. 세자빈의 체온이 가슴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꼭 전하거라. 내가 만약 죽는다면 저승에서라도 고맙게 여기겠다."
세자빈이 손을 뻗어 향란의 손을 잡았다.

"망극하옵니다. 마마!"
향란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세자빈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다.

"세자빈 마마께 예를 올리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일어서려는 세자빈에게 향란이 청했다. 옷매무새를 고친 세자빈이 자리에 앉았다. 곱게 빗은 머리에 소복을 단정하게 입은 단아한 모습이었다. 향란이 일어나 삼배를 올렸다. 세자빈에 대한 마지막 예였다.

밖에는 검은 가마가 대기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세자빈이 별당을 나섰다. 얼마만의 외출인가? 뒤돌아 생각해보니 까마득했다. 세자빈이 가마에 오르자 검은 차일이 가려졌다. 금부도사가 탄 말이 앞장서자 가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 계지(季指)-새끼손가락
소지(小紙)-쪽지



태그:#소현세자, #강빈, #세자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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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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