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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에서 쓰던 가마.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가마 궁중에서 쓰던 가마.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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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문을 빠져나온 가마가 정선방 동구에 있는 돌다리를 지나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세자빈 가마행렬이 운종가에 이르자 장안의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나왔다. 가마를 붙잡고 흐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예 길을 막고 통곡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마마께서 가시면 언제 돌아온단 말입니까?"
"어린 왕손들은 어이하라고 이렇게 떠나신단 말입니까?"
"세자저하 승하하신 것도 가슴 아픈 일인데 마마마저 떠나시면 너무나 억울합니다."
아낙들의 구슬피 우는 소리가 운종가를 진동했다.

"저승사자는 뭐하나 물러. 잡아갈 사람은 안 잡아가고 ..."
굶은 목소리가 군중들 속에서 튀어 나왔다.

"구미호 한 마리가 여러 사람을 잡는단 말이여. 그 여우 잡아갈 귀신은 없남?"
"조정에 간신들이 득시글거려 이 모양 이 꼴이여."
"간신이 따로 있남? 임금이 임금다우면 모두가 충신이 되고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면 충신도 간신 되는 것이졔."

인왕산 범바위
▲ 범바위 인왕산 범바위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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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 두 놈만 물어 가면 될 터인데 인왕산 호랑이는 뭐하는 겨?"
"경복궁에 내려와 어슬렁거리지 말고 그놈들 식(食)하면 누가 뭐라나."

"그 놈 두 놈이 문제가 아니라 한 놈이 문제여."
"그 놈 하나만 없어지면 세상이 조용해질 텐데 저승사자는 뭐하고 그놈을 안 잡아 가지..."

"이 사람이 포청에 잡혀가 경 치려구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구 있어?"
구렛나루가 시커먼 사나이가 왕방울 같은 눈동자를 굴렸다.

"나라님도 없으면 욕 한다 했는데 욕 좀 했기로서니 뭐가 잘못된 거 있수? 잡아가려면 잡아 가래지, 먹고 살기도 팍팍한데 전옥서에 들어가 공짜 밥이나 좀 얻어먹게..."

"이 사람이 전옥서가 봉놋방인줄 아나벼. 들어가면 살아나오기 힘든 곳이 전옥서여."
사나이가 주변을 살피며 슬슬 자리를 옮겼다. 말은 그리 했지만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말세야, 말세. 난리통에도 지조 있는 충신들이 중심을 잡고 나라를 지탱해 왔는데 시정잡배나 다름없는 소인배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지들 뱃대지 채우는데 급급하니 나라가 이 꼴이지."

황토현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은 가마행렬이 북쪽을 향해 내달렸다. 육조거리를 지나니 문루가 사라진 대문이 홍예만 덩그렇게 드러낸 채 초라하게 서있었다. 광화문이란 현판도 간 곳이 없다. 허물어진 궁장 사이로 주춧돌만 보일 뿐 화려했던 전각들은 보이지 않고 잡초만 무성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50년이 지났건만 중건은 염두도 못 내고 방치되고 있었다.

겸재 정선이 그린 청풍계곡
▲ 청풍계 겸재 정선이 그린 청풍계곡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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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서쪽 궁장 끝에 우뚝 솟아있는 서십자각을 끼고 다시 한 번 우측으로 방향을 잡은 가마가 북쪽을 향하여 쉬지 않고 달렸다. 청계천 원류 백운동 천(泉)에서 발원한 물줄기와 인왕곡(谷) 청풍계(靑楓溪)가 만나는 지점에 가설된 돌다리를 건넜다. 신교(新橋)다. 다리를 건너니 동네사람들이 길을 메웠다.

"세상에 이런 변이 있을까?"
"동네 처자가 국모 될 거라고 경하했는데 이런 날벼락도 있단 말인가?"
"동기간 다 죽이고 이젠 세자빈 마마를 죽이려나 봐."

드디어 가마가 솟을대문 앞에 멈췄다. 한 때는 대감댁보다도 세자빈댁으로 알려졌던 집이다. 김장생 문하에서 수학한 강석기는 사마시와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로 출사했다. 승지로 있던 강석기는 둘째 딸이 세자빈에 간택되어 동부승지와 우의정을 역임했지만 청빈한 삶을 살았다.

"마마!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버선발로 뛰어나온 어머니가 가마를 부여잡고 통곡했다. 세자빈이 가마에서 내렸다. 좌우를 휘둘러보았다. 집은 집이로되 동기간들과 뛰어놀던 옛날 그 옛집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심어놓은 오동나무가 마당 한 구석을 지키고 있을 뿐, 을씨년스럽게기 짝이 없었다.

"마른하늘에 뇌성도 유분수지 이것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씀입니까?"
신씨가 세자빈의 손을 잡았다. 뜨거운 체온이 전해졌다.

"어머니 고정하십시오."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질 것만 같았으나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신씨의 손이 세자빈의 얼굴로 향하려할 때였다.

"죄인에게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은 국법이 용서치 않을 것이오."
찬물을 끼얹는 금부도사의 일갈이었다.

"이봐라. 자리를 대령하라."
겁먹은 노복들이 돗자리를 준비해왔다. 마당에 돗자리가 깔렸다.

"죄인은 무릎을 꿇고 어명을 받으시오."
"폐출 외에 또 다른 어명이 있단 말이오?"
세자빈이 되물었다.

"그렇소."
도사가 당당하게 답했다.


태그:#소현세자, #인왕산범바위, #서십자각, #청풍계, #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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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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