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이준익은 이제 막 50대에 접어들었다. 나이 50을 지천명이라 했던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보는 내내, 하늘의 뜻은 어떤지 몰라도 인간사에 관해서는 그가 한 깨침을 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영화가 보여주는 사내들의 꿈과 욕망, 그 사내들을 향한 한 여인의 사랑은 그 나이가 되기 전에는 쉽게 포착하기 어려운 경지가 아닌가 싶다. 

박찬욱과 봉준호로 대변되는 젊은 피들이 영화판을 장악하고 있는 지금, 원숙한 시선으로 웃으며 세상을 통찰하는 이준익이라는 작가의 존재는 조로증에 시달리는 한국사회 전체의 건강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닌가 싶다. 그는 꿈을 향한 사내들의 이야기를 그려냄으로써 꿈을 잃은 관객들에게 꿈을 꾸게 한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몽학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몽학 ⓒ 영화사 아침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차승원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차승원 ⓒ 영화사 아침


<왕의 남자> 이후 5년 만에 그는 다시 조선으로 간다. 이번엔 궁궐의 높은 담을 넘어 반란과 전쟁이 넘실대는 저잣거리로 나간다. 그곳에는 사내들이 있다. 썩어빠진 세상을 뒤집어버리겠다며 '대동(大同)'의 깃발을 함께 들어올렸지만, 그 혁명의 진로와 방법을 두고 갈라서는 두 사내. 앞길을 막아서는 스승 정여립을 베고라도 반란의 길을 나아가는 조선제일검 이몽학(차승원 역), 변질된 혁명에 반발하며 이몽학의 야망을 막으려는 봉사 검객 황정학(황정민 역). 이 두 사내를 그려내는 감독의 솜씨는 영화를 보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

황정학만큼 많은 장면에 등장하진 않지만, 그리고 사적이고 내면적인 모습은 좀체 드러나지 않지만, 이몽학의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원작은 어떤지 모르지만 영화에서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서늘한 실루엣은 이몽학의 것이다. 비록 그가 구사하는 검법액션의 독특함을 제대로 살려내기에는 예산이 턱없이 부족했을지 몰라도, 발음이 살짝 새면서 씹는 듯한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와 칼끝 같은 시선만으로도 영화의 긴장감을 유지하기에 충분하다. 캐릭터의 힘만큼이나 배우의 힘이 빛을 발하는 경우인 것 같다. 차승원은 우리도 덴젤 워싱턴 같은 배우를 가질 수 있겠다 기대하게 만드는 배우다.

얼핏 기타노 타케시가 연기했던 '자토이치'를 떠올리게 하는 맹인검객 황정학은 이준익의 해학정신을 온몸으로 발산하는 캐릭터이다. 이몽학과 맞설 만큼의 검술 실력과 기생들의 혼을 빼버릴 듯한 의술의 보유자다. 무협지에 단골로 등장하는 개방(거지 문파)의 장문인처럼 내공을 속으로 갈무리하고 누추한 차림으로 저잣거리를 떠도는 황정학은 정치 논리와 개인적 야망에 오염된 '대동' 혁명의 순수성을 순진할 만큼 지켜내려는 트로츠키 같은 인물이다.

이몽학에게 아버지를 잃고 무작정 복수하려는 견자를 제자로 거둬들여 인간으로 만들고 검법도 가르치는 황정학은 이 영화의 재미를 책임지는 인물이다.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장난스럽고 때로는 세상을 달관한 도인의 풍모도 보여주는 황정학이 없었더라면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앙꼬 없는 찐빵'이 되었을 것이다. 캐릭터의 존재 이유도 배우의 연기도 시덥잖은 견자라는 인물이 그나마 버틸 수 있는 건 황정학이라는 인물의 힘이다.

마침내 이몽학과 벌이는 최후의 결투에서(여전히 칼싸움은 그다지 스타일리시 하지 않다) 이몽학의 목에 칼을 들이대지만 차마 내려치지 못하고 이몽학의 칼날을 받아들이고 만다. 황정학은 애시당초 이몽학을 벨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비로소 '격조'를 획득하게 된다.

황정학은 이몽학을 사랑하였던 것이다. 내가 너를 베고 막아설 수도 있지만 차마 그리는 못하는, 그리하여 차라리 너의 칼을 내 몸으로 받아서라도 너의 헛꿈을 일깨워 주겠다는 경지. 목에 와닿은 황정학의 칼날을 느끼면서도 이미 질러버린 이몽학 칼끝은 황정학의 몸속을 파고든다. 그 어리둥절한 순간에 나누는 두 사람의 대사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한양에 가지 마라, 몽학아."
"이 꿈을 깨기 싫소."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여기가 아닌가 싶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황정학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황정학 ⓒ 영화사 아침


그리고 사랑 이야기. 기생 백지(한지혜 역)는 이몽학의 여자다. 반란을 결심하면서 사랑하는 여자의 목숨은 구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발길을 끊은 멋진 사내 이몽학을 사랑하다 못해 죽여버리고 싶다고 한다(빈 말이지만). 이몽학의 칼에 아버지를 잃은 견자(백성현 역)가 백지를 찾아간다. 이몽학이 어디 있냐는 견자의 어설픈 추궁에, 여기 내 가슴에 있다며 자기 가슴을 친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에 실소가 나오지만 이어지는 장면에서 자신을 덮치려는 견자의 몸짓(원수의 여자를 짓밟겠다는 건지 백지가 너무 섹시하다고 느껴서인지는 알 수 없다)을 마치 젖을 찾는 아이의 보챔을 보듯 무심히 받아들이는 그녀의 얼굴은 한 순간 관세음보살이다.

이준익은 역시 여자를 모르는 감독이다. 아니, 자신만의 판타지와 로망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여자들만 보는 것 같다. <님은 먼 곳에> 같은 현대물 속의 그 여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공감하기에 너무 가까운 시대의 인물이므로. 그러나 사극 속 이준익의 여자는 그래서 오히려 더 매력적이다. 비오는 밤 상엿집 장면은 그 로망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런데, 그 로망이 가슴에 와 닿는다. 묘한 일이다.

"네가 왜 그런 줄 알아? 꿈이 없기 때문이야." 백지의 말을 들은 견자는 복받치는 울음을 차마 다 삼키지 못한다. 이빨 사이로 새나오는 설움을 백지가 안아준다. 엄마처럼. 안타깝다. 이건 배종옥이 맡았어야 할 배역이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건 배종옥이 이 역을 맡기엔 조금, 아주 조금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백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백지 ⓒ 영화사 아침


몇 가지 아쉬움들이 있다. 좀 더 멋질 수도 있었던 이몽학을 끝까지 개인적 야심에 사로잡힌 일차원적 인물로 그려냈다는 점. 황정학의 다른 생각에 상응하는 이몽학의 다른 생각 하나가 있었다면 영화가 훨씬 더 깊어졌으리라는 안타까움이 있다.

견자라는 인물, 혹은 그 역을 맡은 배우는 한 마디로 부담스럽다. 황정학과 백지의 캐릭터에 기대 겨우 목숨은 유지하지만, 견자가 영화의 뒷발목을 잡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백지를 사이에 둔 이몽학에 대한 감정선의 미묘함을 좀 더 살렸다면, 끝까지 징징대고 악만 쓰지 말고 어떤 계기(상엿집 신 같은)를 통해 매력 있는 청년으로 변화하는 모습이 보였더라면 감히 제 2의 이준기가 될 수도 있는 배역이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역시나 저렴한 칼싸움 장면들. 액션 신들은 시간과 돈에 크게 영향을 받는 장면이다. 50억 예산에 이 정도 작품을 뽑아낸 것도 기적에 가깝지만, 눈에 거슬리는 건 거슬리는 거다.

그리고 경복궁에서 벌어지는 엔딩은 미리 정해둔 어떤 장면을 향해 서둘러 간 듯 부자연스럽다. 조금씩 넘치는 듯한 감정선들은 폭넓은 대중과의 공감을 염두에 둔 장치로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김수철의 음악은 대체로 전면에 나오지 않지만 영화를 잘 받쳐주고 있다. 특히 황정학과 견자가 만드는 익살과 해학 장면에서의 음악은 감칠 맛이 난다. 옥의 티라면(취향의 문제일 수 있겠지만) 백지가 가야금에 맞춰부르는 노래가 현대화된 가곡이라는 점이다. 좀 더 클래식한 음악이었다면 백지라는 캐릭터와 영화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지 않았을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몽학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몽학 ⓒ 영화사 아침


이 모든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시대물을 다루는 장인으로서의 이준익의 내공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수작이다. 주,조연과 상관없이 등장인물 모두의 입에서 수시로 터져나오는 세상에 대한 통찰은 명불허전이다. 서두에서 언급햇듯, 그 나이의 감독이 아니면 포착하고 표현할 수 없는 인생의 진한 맛들이 묻어나오는 대사들은 이준익이 아니면 불가능한 경지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극 속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힘은 <왕의 남자> 이후 처음인 것 같다. 애둘러 온 만큼 <왕의 남자>의 서두르는 듯한 행보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여유와 통찰이 영화 전체를 풍성하게 감싸고 있다.

혁명군의 무기를 만드는 방짜쟁이와 황정민이 뒷뜰 평상에 앉아 혁명이라는 것, 꿈꾼다는 것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장면 하나만으로도 나는 감히 <왕의 남자>를 넘어섰다고 말하고 싶다. 관념적이고 서걱일 수 있는 영화의 주제에 가슴으로 젖어들게 만드는 명장면이다.

덧붙이는 글 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daum.net/song1600)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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