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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시인이 1980년대 허리춤부터 25년에 걸쳐 쓴 <만인보> 30권이 마침내 마무리됐다.
▲ 고은 시인 은 시인이 1980년대 허리춤부터 25년에 걸쳐 쓴 <만인보> 30권이 마침내 마무리됐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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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 사이 태어나는
순간이여 거기에 가장 먼 별이 뜬다
부여땅 몇 천 리
마한 쉰네 나라 마을마다
만남이여
그 이래 하나의 조국인 만남이여
이 오랜 땅에서
서로 헤어진다는 것은 확대이다
어느 누구도 저 혼자일 수 없는
끝없는 삶의 행렬이여 내일이여

오 사람은 사람 속에서만 사람이다 세계이다 -<만인보> '서시' 모두

이 땅에서 살다 스러져갔거나 지금도 살고 있는 만인이 새긴 발자취를 시로 아로새긴 <만인보>.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고 있는 고은 시인이 1980년대 허리춤부터 25년에 걸쳐 쓴 <만인보> 30권이 마침내 마무리됐다. 시 4001편에 등장인물만 해도 5600여 명에 이르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대장정이었다.

고은 시인은 "연작시 <만인보>(萬人譜)를 1980년 여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제7호 특별감 방에서 구상했다"며 "그해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발효된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처와 동시에 체포돼 김재규가 사형 직전까지 머물렀던 방에 갇혀 나를 향해 다가오는 운명의 발자국 소리를 하릴없이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고 말한다.

고은 시인은 이때 쪽창 하나 없이 사방이 벽으로 꽉 막힌 그 무덤 같은 방에서 회고와 추억을 해방구로 삼는다. "이 방에서 나가면 만난 사람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시를 쓰리라" 굳게 다짐을 하면서. 하지만 그 꿈은 6년이 지난 뒤 시인이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은 뒤 사면, 석방되면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시가 스스로 시인을 찾아 다가온다

<만인보> 시작은 '서시'이다. 그 다음으로 '할아버지'와 '머슴 대길이'가 가장 먼저 그 이름을 올린다. 시인은 할아버지를 이렇게 그린다. "이 세상 와서 생긴 이름 있으나마나 / 죽어서도 이름 석 자 새길 돌 하나 없이 / 오로지 제사 때 지방에는 학생부군이면 된다 / 실컷 배웠으므로 / 실컷 배웠으므로"라고.

시인에게 가갸거겨를 가르친 친구네 집 머슴 대길이는 곧고 바른 인격을 가진 아저씨다. 아저씨는 마을처녀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시인은 "대길이 아저씨 / 그는 나에게 불빛이었지요 / 자다 깨어도 그대로 켜져서 밤 새우는 불빛이었지요"라고 쓴다. <만인보>는 할아버지와 머슴 대길이로부터 시작해 고은 시인 가족과 친척, 고향사람들을 골고루 시로 훑으며 이 땅 곳곳으로 25년에 이르는 긴 여행을 떠난다.

<만인보>에는 을지문덕과 김부식, 이황, 황진이, 김구, 노무현 전 대통령 등 유명인도 들어있지만 병옥이 만순이 대길이 등 흔한 이름들도 수없이 들어있다. "나는 천생시인이다"라고 말하는 고은 시인. 그는 시를 일부러 부르거나 억지로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가 스스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아아 50년대!'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논리를 등지고 불치의 감탄사로써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고은 시인. 그에게 50년대는 한국전쟁에 이어 자살 시도, 출가, 환속으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시대였다. 보도연맹 학살과 우익 및 지주 처형, 인공시절 부역자 처단으로 이어지는 살육은 십대 끝자락에 놓인 시인에게 크고 깊은 상처를 남긴다.

"여맹 간부 노릇한 죄목으로 / 이 사내 / 저 사내 / 치안대한테 욕보고 나서 / 혓바닥 깨물고 죽어버"린 임영자. 동네 이사장 구장 이장 다 거치며 존경받다가 이복형제들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치안대에 잡혀 그 치욕을 못 견뎌 우물에 빠져 죽고 만 김병천. "인공 때 / 여맹 간부였다가 / 수복 후 / 어찌어찌 몸 상해버"린 조부희 등이 그러하다.

"만인보는 막말로 말해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한 노래의 집결이다... 우선 내 어린 시절의 기초환경으로부터 나아간다."
▲ 고은 만인보 30권 "만인보는 막말로 말해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한 노래의 집결이다... 우선 내 어린 시절의 기초환경으로부터 나아간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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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보> 30년, 그 아름답고도 아픈 여행 

"만인보는 막말로 말해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한 노래의 집결이다... 우선 내 어린 시절의 기초환경으로부터 나아간다."

고은 시인이 <만인보> 1권 머리에 쓴 글이다. 첫 시 '서시'로 시작되는 1986년에 나온 <만인보> 1~3권과 1988년 나온 4~6권은 시인이 어린 시절에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를 '추억'이란 붓으로 그리고 있다. 1989년에 나온 7~9권은 시인이 고향 군산을 벗어나 몹시도 가난하고도 힘겨운 삶을 살 때 만났던 여러 사람들 속내가 발가벗겨져 있다.

<만인보> 7~9권을 펴낸 뒤 7년이나 지난 뒤인 1996년에 나온 10~12권과 1997년에 나온 13~15권에는 1970년대 만난 사람들 삶이 불거져 있다. 그 7년 뒤인 2004년에 나온 16~20권에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으로 이데올로기에 휩쓸린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했던 슬프고도 아픈 삶이 새록새록 숨 쉬고 있다.

2006년에 나온 21~23권은 4·19를 밑그림으로 심아 학생들과 정권 실세, 민초들 삶을 사실 그대로 그렸다. 2007년에 나온 24~26권은 고승들이 겪는 삶과 발자취를 좇아 신라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국불교와 고승들 삶을 담았다. <만인보>가 탁월한 것은 유명인뿐만 아니라 시인 가족이나 마을사람들, 우리네 민초들 삶이 골고루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만인만이 만인이 아닙니다. 만물도 만인입니다"

"지난해 7월 원고를 탈고했다. 그 뒤 역사적 사실관계와 인명 등을 다시 점검하는 등 4천1편을 다시 손봤다... <만인보>의 본질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고대부터 5·18까지 '시로 쓴 인물 백과사전'이라 불리는 <만인보>. 이번에 나온 <만인보> 27~30권에는 시 662편이 담겨 있다. 27~30권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다룬 '봉하 낙화암'을 비롯해 우리시대 인물들을 다루거나 친일행적을 비판한 시 등이 실렸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주춧돌로 삼은 작품들이다.

<만인보> 27~30권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둘러싸고 처절하게 벌어지는 삶과 죽음에 피를 토한다. 그 가운데 시 '김준태'는 5·18 때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쓴 김준태 시인이 주인공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젊은 시인 김준태가 / 거기 있었다 / 자신의 심장 내걸고... 그 통곡의/ 그 오열의 노래를 / 신문사에 넘기고 자취를 감췄다"고 썼다.

모두 4천1편 가운데 마지막에 나오는 시는 '그 석굴 소년'이다. "이야기 다함 없는 오늘 밤도 그대 따라가는 / 만인의 삶 이야기 삶과 죽음 이야기 그칠 줄 모르리 // 지금 세상 밖은 온통 머리 푼 바람 속 // 영겁의 소년 수레여 다할 줄 모르는 영겁의 돌책이여 돌노래여 돌이야기들이여"가 바로 그것이다. 즉, <만인보>는 끝났지만 그 발자취는 끝이 없다는 것이다. 

30권 끝자락에 발문을 쓴 임형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만인보는 실로 '사람에 대한 끝없는 시적 탐구'이자 '시적 역사 쓰기'에 값하는 것"이라고 평했다. 고은 시인은 <만인보> 완간을 기념해 '二十五年與萬人'(이십오년여만인)이라 적은 붓글씨도 출판사로 보냈다. <만인보> 각권 맨 앞자락에는 "만인만이 만인이 아닙니다. 만물도 만인입니다" 등 시인이 쓴 붓글씨 12점이 실려 있다.

고대부터 5.18까지 ‘시로 쓴 인물 백과사전’이라 불리는 <만인보>
▲ 만인보 고대부터 5.18까지 ‘시로 쓴 인물 백과사전’이라 불리는 <만인보>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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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백년 뒤의 어느 날 밤도 현재이다"

"만인보 25년, // 이 바람 치는 여덟 바다에 그물을 펼쳐두었다(張羅八海). / 이제 그 그물을 뉘엿뉘엿 걷어올린다. // 산목숨과 / 죽은 목숨 / 그네들을 누가 감히 따로따로 놔두겠는가. // 이로써 두둥실 달밤 심광심(深廣心)의 끝을 자못 꿈꾸리라. // 만인보 30권, // 끝이라니 이 허허망망한 청사(靑史) 속 그 어느 구석에 / 처음이라는 것 끝이라는 것 함부로 있겠느냐. / 나에게는 신석기시대의 어느 날도 백년 뒤의 어느 날 밤도 현재이다."-2010년 봄, 고은.  

사실, 글쓴이도 <만인보>에 실린 시를 다 읽어보지 못했다. 원로시인이 25년에 걸쳐 쓴 시 4001편에 등장하는 인물만 5600여명이나 되니, 어찌 그 큰 그릇을 이 작은 그릇이 감당할 수나 있겠는가. 그저 시상이 잘 떠오르지 않거나, 그 어떤 역사를 파고들 때 그때 그 사람들은 어찌 살았을까, 라는 생각이 날 때마다 들쑥날쑥 시를 골라 몇 편씩 읽곤 했다.

고은 시인은 12일(월) 전화 인터뷰에서 완간 소감을 묻자 "술에 취했다가 깬 것 같다"며 "25년쯤 (만인보와) 동행했으니까 내 일상이 되었다. 극적인 감회나 그런 것은 없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것 끝나고 다른 작업도 해야 하니까 고개를 뒤로 돌리기만 할 수는 없다. '한 지점까지 다 왔구나' 그런 느낌은 있다"고 속내를 툭 털어놓는다.

고은 시인은 "시선을 어느 시대에 맞추면 그 시대의 얼굴만 나오는데, 오랜 기간 쓰다보니까 시대마다 변화하는 얼굴이 있어서 좋다"라며 "다채로운 시선이 담겼다. 쓸 것은 더 많고, 사실 아직까지도 마음속으로는 끝낼 수가 없다. 세상과의 약속이니 30권으로 마친다"라고 못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고은 시인은 <만인보>를 끝낸 뒤 서사시 '처녀'를 쓸 계획이다. 그는 "시는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내 주변에 엉겨있는 그 무엇들이 내게 다가와 내 붓이 저절로 춤출 때 '처녀'를 시작할 것이다"라며 "'처녀'에서는 천상과 지상, 바다 밑까지 아우르는 어떤 삶의 동력을 심고 싶다"고 차근차근 설명한다.

그는 "처녀가 죽었다 태어나고 또 죽었다 또 태어나고 하면서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그런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 삶이 한곳에 멈춰있거나 처음과 끝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움직이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려 한다"며 "'처녀'는 장시이긴 하지만 '백두산'이나 '만인보'처럼 길지는 않고, 1천500매쯤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만인보> 완간 기념하는 심포지엄, 축하연도 열려

<만인보> 27~30권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둘러싸고 처절하게 벌어지는 삶과 죽음에 피를 토한다.
▲ 고은 시인 <만인보> 27~30권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둘러싸고 처절하게 벌어지는 삶과 죽음에 피를 토한다.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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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시인 <만인보> 완간을 기념하는 심포지엄과 축하연이 지난 9일(금) 오후 2시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열렸다. 주최는 기존에 나온 <만인보>를 이번에 엮은 27~30권을 더해 모두 11책으로 이루어진 양장본으로 새롭게 펴낸 창작과비평사이며, 후원은 단국대학교와 서울대 기초교육원이다.

이날 행사는 백낙청 문학평론가가 나와 <만인보> 완간에 따른 인사말을 한 뒤 첫 기조발제인 '끌로드 무샤르:고은의 기쁨-<만인보> 완간에 부쳐'와 두 번째 기조발제 '개인사와 민중사의 화엄적 대서사'(염무웅)로 시작되었다.

1부는 문학평론가 김명인 사회로 문학평론가 도정일, 김형수, 박성현이 발제자로 나와 '<만인보>의 작품세계', '문학과 역사의 접점-사회적 전기로서의 <만인보>를 되짚었다. 2부에서는 안선재가 나와 '영어권에서의 <만인보> 및 고은 문학 소개 현황'을, 임형택 윤지관 유성호 진은영이 나와 종합토론을 한 뒤 시낭송, 축하연 등으로 이어졌다.

시인 고은은 1933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18세에 출가해 수도생활을 하던 중 1958년 <현대시>와 <현대문학> 등에 추천돼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펴낸 책으로는 첫 시집 <피안감성>(1960)을 비롯해 시선집 <어느 바람>, 서사시 <백두산>(7권), <고은 전집>(38권) 등 200여 권에 이른다.

고은 시인 시집 및 시선집은 1989년부터 영미, 독일, 프랑스, 스웨덴을 포함 20여 개 국어로 옮겨졌다. 만해문학상, 대산문학상, 스웨덴 시카다상 등을 받은 그는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 가운데 한사람으로 오른다.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 의장, 하버드 옌칭연구소 특별연구교수 등을 맡았다. 지금은 <겨레말 큰사전> 남북공동편찬위원회 이사장이며, 서울대 기초교육원 초빙교수와 단국대 석좌교수를 맡고 있다.


만인보 완간 개정판 1.2.3 - 만인보 완간 개정판 전집 1

고은 지음, 창비(2010)


태그:#시인 고은, #만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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